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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19 - 인수 박팽년( 朴彭年)편

淸潭 2007. 9. 8. 21:45
 
몽유도원도19 - 인수 박팽년( 朴彭年)편

 

박팽년 : 태종 17년 ~ 세조 2년(1417 - 1456)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본관은 순천, 판서 중림(仲林)의 아들로 세종 16년(143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成三問 등과 함께

집현전학사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 29년(1447)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다시 급제하였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기도 하였다.

 

세조가 즉위하고 나서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公文)에 신(臣)이라고

자칭한 일이 없었다.

세조 2년(1456) 형조참판으로서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金질)의 밀고로 탄로난 후,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처형당하였다.

그후 아버지와 동생 大年, 아들 憲도 처형되었다.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과 과천의

민절서원(愍節書院) 등에 배향되었으며,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고,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에

그의 글이 약간 실려 있다.

 

 

 

 

[ 작품 해설 ]

 

백대가 지나도록 스러지지 않는 일이 있나니

진실로 사람들의 이목을 움직일 만한 기괴한 자취가 아니어든

어찌 이와 같이 멀리 후세까지 전해질 수 있으리오?

 

도원의 고사를 시문으로 지어 전하는 것이 매우 많거니와

나는 세상에 태어남이 늦었는지라 직접 보고 듣지 못하였으므로

신선세계로 가는 길이 영영 이대로 묻혀 버리고 마는가 싶었다네.

 

그러던 어느날 비해당이 몸소 지은 <몽유도원도>를

나에게 보여주었다네.

그 행적이 진기하고 문장이 섬세한데

깊숙한 시내와 들판의 상황 그리고 도원의 멀고 가까운 모습들이

옛날의 시문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네.

 

나 또한 따라 노니는 그 행렬 속에 끼어 있었던 바,

그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감탄하여 말하였다네.

 

 

 

 

 

[이러한 일이 있었다니 참으로 기이하도다!]

 

동진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이나 떨어져 있고,

무릉도원은 우리 나라에서 만리나 멀리 있는 곳.

만리가 넘게 떨어져 있는 바다 건너 이 나라에서

수천년 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길 잃은 곳의 모습이 당시의 상황과 서로 이어져 있으니

이 어찌 더욱 기괴하지 아니한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정신이 만나면 꿈이 되고, 형체가 접하면 일이 된다 ]고

하였으며,

[ 낮에 생각한 것을 밤에 꿈으로 보니 정신과 형체의 만남이라 ] 하였네.

 

무릇 형체가 비록 밖으로 사물과 만난다고 할지라도,

안으로 밝은 정신으로써 주재할 수 없다면

어찌 형체가 이를 접할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나는 우리의 정신이 형체를 의지하지 않고서

자립하여 있고, 사물을 기다리지 않고서 존재하며,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며, 갑작스럽지는 않되 빠르며,

언어로써 형용하여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겠네.

 

그러니 깨어 있을 때 한 바는 정말 옳고,

꿈속에서 한 바는 진실로 거짓된 것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으리오?

하물며 사람의 세상살이 자체도 또 하나의 꿈속임에랴!

 

또한 어찌 옛사람이 만난 바는 실제이고

지금 사람이 만난 바는 꿈속이라고 할 수 있으며,

어찌 옛 사람만 홀로 기괴한 자취를 마음대로 하고

 

 

 


 


 

 

지금 사람은 도리어 거기에 미칠 수 없다고 하겠는가?

꿈과 깨어 있는 상태에 대한 논의는

옛 사람도 어려워한 바이거늘,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그 사이를 분별하여

따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제 그 글을 읽고 그 행적을 생각하여

내가 평소부터 품어오던 마음을 달래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울 뿐이네.

 

비해당께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제기(題記)까지

지으신 데다가 문사들에게 시문으로

이를 읊도록 하셨다네.

 

나도 그 곳 노니는 행렬 속에 끼어 있었다 하여

특별히 글을 짓도록 명하시는지라,

글솜씨 서툴다 하여 이를 사양할 수도 없어

짐짓 이 글을 써 두는 바이네.

 

정통 12년(세종 29, 1477) 4월  일

봉직랑, 수집현전교리, 지제

?교경연부검토관

 

평양 박팽년 인수 머리 조아려 삼가 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