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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17- 이적 (李迹) 편

淸潭 2007. 9. 8. 21:42
 
몽유도원도 17-  이적 (李迹) 편

 

 

이적 (李迹) : 세종 20년 (1438)전후

호는 부훤당거사(負喧堂居士). 본관은 驪州.

 

藝文館大提學 행(行)의 아들로, 태종 원년(1401)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장흥고직장(長興庫直長)이

되었으며, 판통예문사(判通禮門事)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 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즉위년(1418)에 공조판서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明나라에 파견되었다가 홀로 南京까지 들러 이듬에 귀국하고

京畿監司가 되었다.

 

세종 원년(1419) 매형인 김훈(金訓)의 역옥(逆獄)에 연루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外方에 付處되었다.

 

세종 20년(1438) 조카 자(孜)와 유산상속으로 쟁송을 하다가

부친에게 회답한 서신이 증거로 제시되었는데,

그 언사(言辭)의 패역(悖逆)스러움이 문제가 되어

부모를 욕한 죄로 부대시교형(不待時絞形)을 판결받고

1등(等) 감형되어 함길도(咸吉道) 경원부(慶源府)에

유배되었다.

 

세종 32년(1450) 유배에서 풀려 경기도 加平에 퇴거(退居)하였다.

 

 

[작품 해설]

 

적송자는 이미 떠나갔고

소사 또한 가 버렸네.

 

후씨의 산 지금도 남아 있는데

도원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길은 풀만 무성하여라.

 

진실로 비범한 기골이 아니어든

어찌 선경에 노닐 수 있으리.

 

밤마다 영혼이 교유하는 일은

아침마다 마음이 꾀한 바일세.

 

중니는 주나라 성현을 꿈꾸었고

장자는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거니

 

존귀한 왕자께서 진짜 대장부임을

이제야 비로소 알겠도다.

 

몸은 비록 궁궐에 있지만

뜻은 오히려 신선세계에 두고 있네.

 

황홀스럽게 꿈속에 빠져 들어

멀리 초야의 늙은이를 만났네.

 

서로 인사하고 꽃길을 물어보니

바로 도원이라고 웃으며 답하네.

 

짚신 신고 막대 짚어 발자취를 찾아보니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멋있게 노니네.

 

문득 깨어나니 뜨락에 달빛 휘영청 밝고

이슥토록 앉아 있노라니 은하수만 반짝이네.

 

옮겨 그린 그림 몹시도 신묘하여

기이한 장관은 견주기가 어렵네.

 

훌륭한 문장은 수놓은 비단을 펼치고

 


 


 

 

힘찬 필체는 은고리를 움직이네.

 

이제부턴 이슬방울을 먹으며

해마다 계속하여 열 곱은 더 사시리.

 

 

 

<참조>

 

赤松 : 곧 적송자. 신농씨 때의 신선, 수정(水晶)을 복용하고

곤륜산상(崑崙山上)에 거하였다고 함.

 

蕭史 : 진목공(秦穆公) 때의 신선, 퉁소를 잘 불었으며

진목공의 딸 농옥(弄玉)과 결혼하여 함께

하늘로 날아갔다고 함.

 

候氏山 : 곧 구씨산. 신선 왕자교(王子喬)가 학을 타고 내렸던 산.

 

仲尼 : 곧 공자(孔子)

 

姬聖 : 곧 주공(周公)

 

方壺 : 삼신산(三神山)의 하나, 方丈山,

여기서는 신선의 세계를 뜻함.

 

銀鉤 : 아주 잘 쓴 草書의 형용, 잘 쓰는 글씨.

 

下十籌 :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 東方朔)을 단위로 하여

그 10배의 수명을 누리시라는 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