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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6- 안평대군과 안견

淸潭 2007. 9. 8. 21:13
 
몽유도원도 6- 안평대군과 안견

 



 

세종대왕의 3째 아들인 용(瑢)은 특히 부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예술활동에 전념을 할 수가 있었다.

하루는 세종께서 <安平>이란 호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다. <安平>이란 뜻은

"그 이름이 안일하고 안이한 의미를 띠고 있다" 

그리고는 증민지시(蒸民之詩)를 직접 읊으시면서 

"게으리지 않은" 즉 "부지런한" 뜻의 비해(匪懈)로 

당호(堂號)를 바꾸시도록 했다는 기록이

박팽년(朴彭年)이 쓴 [匪懈堂記]에 보인다.

 

이처럼, 세종의 따뜻한 배려속에 <安平>은

수많은 회화작품을 소장하였었는데,

기록에 보면 17세부터 27세까지 10여년간

모은 소장품중에 <안견>의 그림이 30점 포함되어 있고,

중국의 고개지(顧愷之)작품을 위시하여 222축(軸)의

중국 역대의 서화들이 있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신숙주가 남긴 보한재집(保閑齋集)에 보면 

[ 안평이 나(신숙주)에게 보여 주며 " 나의 성격이

이것들을 좋아하는데 이것 역시 병이오, 열심히

찾고 널리 찾기를 10여년 한 후에 이만치 얻었소,

하아! 물건의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때가 있으며

모여지고 흩어짐이 운수가 있으니

대저 오늘의 이룸이 다시 내일의 무너짐이 되고

그 모음과 흩어짐이 또한 어쩔 수 없게 될는지

어찌 알랴" 라고] 하였다

 

이 소장품 가운데에는 그 당시 중국의

최고 화가였던 <곽희(郭熙)>의 그림이 17점이나

들어 있었으므로, 자연히 <안견>이 보고

토대로 하여 자성일가(自成一家)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 뒤에도 더 많은 작품을

수집하였으리라 생각되는데,

그가 불길하게 예견했듯이 이 소장품들은

1453년 10월 그가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우직(友直)이 진도(珍島)로 옮겨진 뒤

1개월 만인 11월 그의 노비들이 몰수될 때

함께 몰수되었다가 흩어지게 되어

그 후로는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한편, <안견>은 <안평대군>의 비호아래

승승장구하여 화원으로서는 최초로 정사품(正四品)의

벼슬까지 올라가게 된다. 

두 사람 사이는 밀월의 관계처럼 항상 함께하였는데

어찌하여 나중에는 갈라서게 되었는가?

 

신숙주의 화기(畵記)에 보면

" 우리 조정에 유명한 화가가 한 사람 있는데

<안견>이라 한다. 字를 可度, 小字는 得守이며

本은 池谷이다. 지금은 護軍이 되었다.

성정이 총민하고 精博하며 옛 그림을 많이 보아

그 요체를 모두 얻고 여러 대가들의

좋은 점을 모아 총합하고 절충하였다.

못 그리는 것이 없었지만 <산수화>가 특히

그가 잘 그리는 분야였다.

옛것으로부터 빌었지만 그와 필적할 만한 사람은

얻기 어렵다.

匪懈堂에 陪遊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비해당>이 그의 그림을 많이 소장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후에[成宗實錄]에 보면  안견의 아들인

소희(紹禧)가 화공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제한에서 벗어나 大科인 文科에

급제하였다는 기록과  비록 반대에 부딪쳐

사헌부의 정6품인 현감은 되지 못했으나

양반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文科를 칠 수 있었던

것부터가 예외에 속함을 이 기록( 1479년)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계유정란(1453년)이 일어났던 때로부터

훨씬 뒤의 기록이므로 안견이 계유정란을

피하여 생존에 있었음을 나타내며

그의 아들까지 출세가도를 달릴 수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 궁금증은 윤전(尹鐫 1617 ~ 1680년)의

[白湖全書]에 의해 풀 수 있다.

 

" 權聖中이 그 집에 오랫동안 소장해 온 <산수도>

여덟 폭을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조선왕조) <안견>이 그린 것이다.

안견은 묵묘로써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떨치던

사람으로서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었다고 한다.

나는 그림을 모르지만 안견의 사람됨에 대하여는

일찌기 약간 들은 바 있는데 그 그림이 가애롭다는

것만은 아니다. 세조의 癸酉靖難을 당하여

<안평대군>은 공자의 귀한 몸으로서,

문화를 크게 끼고 한묵을 스스로 좋아하며

당대의 명류들과 널리 교유하여,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 흠앙하고 부러워하며

뜻을 주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안견>도 역시 畵技 때문에 부름을 받았는데

그는 정말로 뛰어난 화가라서 <안평대군>이

특히 그를 아껴 잠시도 그 집 문밖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안견은 때가 위험스러움을 알고

스스로 <안평대군>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평대군이

북경의 저자에서 용매묵환(龍煤墨丸)을 얻었기로

안견을 급히 불러 그 먹을 적셔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마침 안평대군이 일어나 안에 들어갔다가

돌아와보니 그 용매먹이 간 곳 없었다.

안평대군이 종과 시비들을 다그치니 계집종들은

스스로 변명하며 안견에게 협의를 두는 것이었다.

<안견>이 일어나 소매를 떨치며 스스로 변명하려

하였으나 먹이 홀연히 그의 몸 속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안평대군>이 별안간 노하여 그를 꾸짖어 내쫓고

다시는 집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안견은 아무 말도 못하고 좀 있다가 달아나

물러간 후 집에 돌아가 숨어서

스스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이 드디어 떠들썩하게 일세에 전하여졌더니

조금 있다가 <안평대군>이 큰 화를 만나서

그의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로 연루되어

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안견>만이 홀로 그 화를 모면하게 되었던 것이니

사람들이 비로소 이를 기이하게 여기에 되었다.

 

아! 덕을 품고도 행실은 더러워 스스로

勢利의 화염(禍炎)을 면하였구나.

이것은 고인들도 하기 어려운 것인데

<안견>이 홀로 능히 하였다.

이것이 어찌 또한 일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괴이하게 홀로 행한 선비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일을 내가 들으니 아마도 <안견>은

비단 그림에 대한 재주만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높은 식견과 멀리 미치는 생각과

가볍게 볼 수 없는 뜻이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이것으로써 이 세상에 놀고 그 예술에

몸 담았던 것인지, 이것을 가히 알 수 없도다.

나는 진실로 그림을 알지 못하나 이 그림을 보니

그 水石이 푸르고 멀며 風煙이 잔잔하고 희미하여

비록 簡逸하고 疎蕩하지만 돌아보건대

스스로 사람들이 쉽게 엿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어찌 또한 그림의 형상도 그 그린 사람이

그러한 때문일까.

이것을 기록하여 여러 호사가들에게 전하는 바이다.

夏村의 病寓에서 쓰다"

 

이 기록은 비록 안견보다 약 2세기 뒤의

것이지만 당시에 구전되고 있던 것을

적은 것으로 믿어진다. 단순히 꾸며진 이야기로만으로

보기에는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짜임새가 있으며

신빙성이 강하게 느껴진다.짐작하여 보건대,

안견은 그림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조망하고 판단하는 기지를 지녔었고

머리가 명석하고 회전이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우리들이 판단을 한다면

어느 것이 옳고 그른 지 알 수가 없다.

각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는게

나을 성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