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서예실

몽유도원도 3-안견의 그림과 안평대군의 발문(拔文)

淸潭 2007. 9. 8. 21:09
 
몽유도원도 3-안견의 그림과 안평대군의 발문(拔文)

 


 

 

몽유도원도의 그림 부분의 현재 크기는

38.6 x 106.2cm이나 원래에는 더 컸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상하좌우변이 표구를 하면서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몽유도원도]의 구성은 우측부터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라는 글씨와  찬시가 있으며,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있으며

안평대군"발문"부터 그 당시의 21명이나 되는

詩文書畵에 통달한 사람,또는 젊고 뛰어난

집현전의 학사들, 음악의 대가, 불교계의 대표자등이

대거 참여하여 자신의 필치로 <찬시>를 썼다.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詩, 書, 畵의 3絶이 모인

최고의 회화작품인 것이다.

 

[몽유도원도]의 현재의 상태는 上, 下의 2개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1947년 일본 동경의 표구사에서 만들었다. 

 

상,하권 두루마리의 크기는 각권 높이가 같은

41cm인 반면 길이는 上卷은 8.57m.

下卷은 11.12m로 총 길이는 19.69m이니

약 20m에 이르는 大作品인 것이다.

 

안견은 수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는

眞作은 오직 [몽유도원도]한 점만이 남아 있다.

 

[몽유도원도]가 어떻게 일본으로 넘어 갔는가?

하는 점은 정확한 근거가 없어서 알 길은 없지만,

1893년 11월 2일부로 발부된 <鑑査證>이라는

일본 문서에 일본인 소유자가 처음으로 나오게 된다.

그 뒤에 1933년에는 일본의 <重要美術品>으로

지정이 되며, 1939년 5월에 <日本 國寶>로

지정이 된다.

 

그러다가 法令의 개정에 따라 <重要文化財>로

변경이 되는데, 현 소장처인 <天理大>에서

대금을 분할 지불을 하고 사간 1955년후의 일이다.

 

1953년에 우리나라 부산에 [몽유도원도]를

가지고 와서 팔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엄청난 대금 때문에 살 사람이 없어서 가져 갔다는

말이 있었으니 참으로 원통하기 이를 데 없다.

 

현재에는 사고 팔 수가 없으며, 이런 일은

국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그러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몽유도원도]는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여

可度<안견>가 그렸다.

 

1447년 4월 20일에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桃源"을 여행하고 그 본 바를 안견에게 이야기하고

그리도록 하여 그로부터 3일 후인 4월 23일에

완성을 본 것이다.

 

대부분의 그림은

"우측에서 좌측으로"감상토록 하는 데 반하여

"좌측 하부에서 斜線으로 우측 상단부"로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하였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이 감상의 여행을 하면서 점진적으로

시각적인 절정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池谷 可度作>이라는 款署와

"可度"라는 朱文方印이 이야기가 끝나는

우측 가장자리에 되어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池谷"은

충남 서산군 지곡면으로 보고 있다.

즉 안견이 "충남 서산 지곡면" 출신이거나

최소한 그 곳을 本貫으로 했던 인물로 보고 있다.

 

[몽유도원도]의 감상은

"좌측에서 우측으로"하는데 그림이 크게 4단계로

나눠져 있다.

 

그것은 아래의 <안평대군>의 "발문"을 통해서 이해를 한

다음에 부분으로 나눠서 설명하고저 한다.
 

 


 

 

" 정유년 4월 20일 밤에 바야흐로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아른하여 잠이 깊이 들므로 꿈도 꾸게 되었다.

그래서 인수(박팽년)와 더불어 한곳 산 아래에 당도하니,

층층의 묏부리가 우뚝 솟아나고 깊은 골짜기가

그윽한 채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고,

오솔길이 숲 밖에 다다르자, 여러 갈래가 나서

서성대며 어디로 갈 바를 몰랐었다.

 

한 사람을 만나니 산관야복으로 길이 읍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이 길을 따라서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하므로,

나는 인수와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산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그 골짜기에 들어가니 마을이 넓고 티어서

2, 3리쯤 될 듯하여, 사방의 산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숲이 어리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 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이에 주저하며 둘러보기를 오래 하고,

인수한테 이르기를"<바위에다 까래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더니,

어찌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도원동이다"라고 하였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으니 바로 貞父(최항),

泛翁(신숙주)등인데, 함께 시운을 지은 자들이다.

서로 집신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을

하다가 문득 깨었다.

 

아아! 通都와 大邑은 진실로 번화한 벼슬아치의

노니는 곳이요, 깊은 골짜기와 깎아지른 언덕은

幽潛한 은사의 깃드는 곳이다.

이러므로 몸에 靑紫가 얽힌 자는 족적이

산림에 다다를 수 없고, 泉石으로 성정을

도야하는 자는 꿈에도 조정을 그리지 않나니,

대개 정적하고 조급함이 길이 다른 것은

이치의 필연이다.

 

옛 사람의 말에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대궐 안에 몸을 의탁하여 밤낮으로 왕사에

종사하고 있는데 어찌 꿈이 산림에 이르렀으며,

나의 좋아하는 친구가 하도 많은데 어찌 반드시

도원에 노닐면서 이 두어 사람만 동행하게 되었는가.

아마도 그 천성이 유벽한 것을 즐겨 본시 천석의

회포를 지녔으며,


 

 

또 이 두어분과 더불어 사귐이 특히 두터웠던

까닭에 이렇게 된 것인 듯하다.

 

이제 可度(안견)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나, 다만 옛날 말한 그 도언도

역시 이와 같았는지는 모르겠다.

훗날 보는 자가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한다면 반드시

가부의 말이 있을 것이다.

꿈깬 뒤 3일만에 그림이 완성되었기로

비해당(匪懈堂)의 매죽헌(梅竹軒)에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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