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서예실

몽유도원도 5-"도화원기"와 "몽유도원도"비교

淸潭 2007. 9. 8. 21:11
 

몽유도원도 5-"도화원기"와 "몽유도원도"비교

 


 



 


[몽유도원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참고로

도잠(陶潛)(= 陶淵明. 365~427년)의

[桃花源記]부터 알고 나면 훨씬 이해가 쉽다.

 

 

" 東晉의 太元연간(376~396년)에 武陵의 어떤 사람이

고기를 잡아 생활을 했는데 어느날,내를 따라 가다가

길을 잃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복숭화꽃나무 숲을 만났다.

냇물의 좌우 양쪽 언덕의 수백 보에 걸쳐

(복숭아나무 이외에는)잡나무가 일체 없고

향기로운 풀들만이 산뜻하고 아름다우며

떨어지는 꽃잎들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어부가 이것을 매우 이상히 여기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 그 복사꽃숲이 끝나는 곳까지

가보고자 하였다.

 

숲이 다 하는 곳에 물이 흐르고

문득 산 하나가 나타났다.

산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는데

마치 빛이 있는 듯하였다.

곧 배를 버리고 구멍을 따라 들어 갔다.

처음에는 아주 좁아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수십 보을 가니 확 뚫리며 밝아졌다.

땅은 평평하고 넓으며, 집들은 엄연하고

좋은 밭과 예쁜 연못과 줄지은 뽕나무와

대나무 등이 있었다.

길은 사방으로 뚫려있고,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가운데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남녀의 옷 입는 것은 모두 밖의 사람들(세상사람들)과

같았고, 노인이나 어린이들은 다 같이

기쁘게 즐거워하였다.

 

어부를 보고 크게 놀라 어떻게 왔는가를 물었다.

갖추어 답하니 당장에 초청하여 술을 빚고

닭을 잡아 식사를 대접하였다.

이 어부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캐물었다. 그들 스스로 말하기를

<선세에 秦나라 때의 난을 피하여 처자와 邑人들을

이끌고 이 絶境에 와서 다시 나가지 않았소. 그래서

드디어 바깥사람들과 떨어지게 되고 말았소>라고

말을 하면서 < 요즘은 어떤 세상이오? >라고

묻는 것이었다.

漢나라가 있는 것도 모르고 魏,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어부가 일일이 들은 바를

말하니 모두들 놀라고 탄식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각기 다시 자기 집에 그를 끌고 가

모두 술과 음식을 내었다.

여러 날 묵고 사양하며 떠났다.

이들 중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다른 사람에게는 얘기를 마시오 > 라고 하였다.

 

밖으로 나와 배를 찾아서 먼저 길을 오며

곳곳에 표시를 했다.

郡에 이르러  太守을 만나 이처럼 설명하였다.

태수는 곧 사람을 보내 그를 따라 가서 표시한 바를

찾도록 했지만 다시 그 길을 찾지 못하였다.

河南省 南陽縣의劉子驥(名. 麟之 )는 고상한 선비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혼연히 가볼 계획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멀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그 후로는 마침내 그 길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

 

 

위의 내용은 [도화원기]며 [몽유도원도]와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점이 많음을

알 수가 있다.

[안평대군]은 이미 "桃花源記"을 잘 알고

있었으며 중국의 유명한 사람들이 읊고 그린

"도원도"을 충분히 보고, 듣기도 하였을 것이다.

 

唐의 李白이 읊은<山中問答>에

"桃花流水는 그대로 흘러서 가 버리지만

人間處 아닌 곳에 別天地가 있네"라고 했고

 

宋의 蘇軾도 " 桃花流水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武陵이 어찌 반드시 신선만

사는 곳이리오"라 했다.

 

그림에도

唐의 吳道子, 南宋의 劉松年, 元代의 錢選,

조맹부, 商琦, 明代의 沈周와 文嘉, 淸代의 石濤등은

"도원도"를 직접 그린 사람들이다.

 

하지만 [몽유도원도]와는 감히 비교를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도원]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추측컨데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알려졌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문헌상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그 후인 고려시대에 <도원가>라는 시가 있으며,

이인로(1152~1220년)는 "지리산의 청학동을

도원과 다르지 않은 곳"으로 비유하였다.

 

어찌 되었든 <안평대군>은 왜 "도원"을 꿈꾸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종>이 서거하기전

3년전의 일이니<안평대군>의 나이가

29살 때의 일이다.

한창 나이인지라 호탕한 성격에 위의

두 형님(문종,수양대군)과 마찰이 있을 성 싶다.

특히, <수양대군>과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며,

이 때 무렵에는 <수양>과 <안평>은

자신의 입지를 돈독히 하려고 앞다투어

가신을 많이 양성하고 있을 때라고 본다.

[몽유도원도]의 말미에 보면

짐작이 가는 대목이 있다.

 

"나는 대궐 안에 몸을 의탁하여 밤낮으로

왕사에 종사하고 있는데 어찌 꿈이

산림에 이르렀는가"라고 했으니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고 주도하면서도

오히려 거기에서 오는 갈등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찰이 그로 하여금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하게 했을 것>으로  <안평>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도원]이 꿈에 보였을 것으로 본다.

 

[도화원기]와 [몽유도원도]와의

큰 차이를 하나 찾으라고 한다면,

나는 이 점을 꼽을 것이다.

 

[도화원기]에는

"가축들이 뛰어 다니며, 많은 사람들이

웅성 거리며 활기에 넘치지만

 

[몽유도원도]에서는

"가축도 보이지 않고 텅 빈 집,

허물어진 벽담, 덩그러니 떠 있는

빈 배"라 하겠다.

 

생각컨데, 비교한 점에서

하나는 활기가 넘치고 있는 현실세계와

쓸쓸한 신선의 세계에서 몇 년 뒤의

<안평대군>의 비극을

암시하지나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