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범어사 선덕 대정 스님은 “미혹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진정한 마음의 빛을 볼 수 없다”며 “인욕과 정진을 통해 불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주영미 기자불교의 근본은 마음을 밝히는 것인데 그 마음은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크지도 작지도, 무겁거나 가볍지도, 착하거나 악하지도 않으며,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차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분별심에 사로잡혀 마음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어둡고 좁고 천하고 귀한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중생을 위해서 교화하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승법과 대승법으로 흔히 말하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입니다. 소승불교는 태국,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에서, 대승불교는 중국, 티베트, 한국, 일본에서 크게 발전했습니다.
소승-대승 있을 수 없어그러나 불교 근본에서 비춰볼 때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소승과 대승의 구분은 부처가 되기 위한 예비과정으로 보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소승불교가 수행과정에 있어서 일단 몸에 근본을 둔 반면 대승불교는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몸은 한계가 있지만 그 마음은 크고 무한정입니다. 소승불교가 아라한을 지향한다면 대승불교는 보살을 지향합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계는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 모두가 받아야 합니다. 이 계를 받은 사람은 보살이 되는 것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대승 보살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위로는 깨침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으로 나와 남을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 대승 보살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의 마음을 보살도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부처가 된 것은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했기 때문에 부처가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중생이 있는 한 나의 보살도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대승 경전인 『유마경』에서 유마 거사는 “자식이 병이 나면 부모가 아프듯이, 중생이 병이 들면 보살이 아프듯이 중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내가 나온 것”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곧 자비입니다. 자비를 통해서 큰 지혜가 생깁니다.
자비를 아주 쉽게 설명하면 ‘남이 잘 되면 내가 잘 된 것처럼 좋고 남이 잘못되면 내가 잘못된 것’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은 남이 잘되면 기분 나쁘고 남이 잘못되면 고소해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촌이라고 하면 가장 가까운 형제나 다름없는 관계임에도 잘 되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중생심이 솟구치는 근본 원인은 시기와 질투심에 기인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탐욕에서 나오고, 탐욕은 집착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를 향해 ‘미혹한 중생’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입니다. 마음이 안정돼 있지 않으면 해탈은 고사하고 선정에도 들 수 없습니다. 맑은 거울에 먼지가 많이 내려 앉아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먼지를 털어 내고 깨끗이 닦아야 거울의 가치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시기질투하고 중상모략하는 마음이 먼지이니 우리의 불성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털어 버리면 거울이 본래 모습이 드러나듯 우리의 불성이 발현됩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처의 마음도 중생심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벗어나서 찾아보겠다고 한다면 어리석고 못난 수행입니다.
평등이라는 것은 원만함을 말합니다. 물질문명이 서양에서 고도로 발달되었다면 동양에서는 마음의 정신문화가 발달됐습니다. 동양 정신문화의 근본은 불, 유, 도 세 개의 사상에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윤리나 도덕, 예의를 중시하고 도교는 수신, 마음을 닦는 것을 중시하지만 불교는 깨침을 통한 지혜를 중시합니다. 따라서 ‘마음’측면서 보면 유교는 선을 중시하는 양심이고, 도교는 덕을 근본으로 하는 본심이고, 불교는 지혜를 닦는 진심입니다. 이 모든 마음은 깨끗하고 고요한 것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맑고 깊은 고요를 조성하면 양심과 본심이 살아남은 물론 진심이 절로 나옵니다. 맑고 고요한 마음에 계, 정, 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업장을 소멸한 후 본래의 마음인 진심이 발현되면 샘솟습니다. 양심과 본심을 갖추면 군자가 되고 본래의 마음인 진심을 내면 성인군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끗한 물과 고요한 바다, 맑은 하늘은 최고의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하면 자연히 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도를 성취하면 중생의 어지럽고 탁한 마음은 저절로 소멸되고 맑고 고요한 마음만이 그대로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 참모습입니다. 여기서 기도도 하고, 참선도 하고, 깨치기도 하는 것이지 이것을 벗어나서는 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업장 소멸 후 지혜 발현우리 금정선원에서는 딴 게 없습니다. 맑음과 고요함을 서서히 깊게 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지 않고는 업장도 소멸되지 않으니 자비가 일지 않습니다.
명심회(明心會)에서 ‘명심’은 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밝힌다 함은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자신의 거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어 보십시오. 불성본연의 마음을 볼 것입니다.
거룩한 부처님 법은 허물이 없습니다. 단 한 점의 미혹도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그 법이 살아서 움직이고 숨을 쉽니다. 이 정도에 이르면 선지가 번뜩이고 선지가 성성하면 도안이 열립니다.
미혹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진정한 마음의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중생심의 분별과 의심에 사로잡히면 오고 갈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별과 의심도 수행을 통한 도력으로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이후에 드러나는 우리의 성품이 그대로 법이요, 이것이 바로 견성입니다.
인내-정진 통해 道力 얻어우리의 목적은 바로 견성입니다. 견성을 함으로 해서 바로 부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성품이 원래 청정했음을 분명히 알고 체득하면 자재무애합니다. 알고 보면 법과 도라는 것은 우리와 가장 가깝습니다. 가장 믿고 의지하고 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법과 도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부처가 있고 중생이 있고 알고 모르고 깨치고 못 깨치고 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겁니다. 절대 변화가 없습니다.
이 도력은 아주 강력한 불굴의 의지, 즉 인내와 정진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법이라 하고, 마음이라 하고, 부처라 하는 것은 우리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중생의 어두움, 분노, 분별의식, 이와 같은 고약하고 나쁜 버릇으로 인해서 중생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 나쁜 버릇만 소멸되어 버리면 됩니다. 구름이 다 지나가면 푸른 하늘은 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화두고, 선이고, 도이고, 마음이고, 부처이고 우리 자신입니다.
부산지사 = 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9월 10일 부산 금정선원에서 대정 스님이 ‘명심회 창립기념’초청 법석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