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세상사는 이야기

장손아닌 장손 이야기

淸潭 2007. 2. 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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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손아닌 장손 이야기 ♠ 날씨가 거짓말처럼 갑자기 씨원해졌다. 그래서, 시원한 글좀 써볼까 일단 슈퍼에서 50% 세일하는 여름빙과류등 쭈쭈바를 잔뜩 사왔다. 난 정서불안으로 오는 현상으로 빠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쭈쭈바 중 이름은 몰르구 토마토맛인데 개안타..ㅎ 쭈쭈바 하나를 질겅질겅 씹으며 여유롭게 그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과 작별을 고한다. 쭈쭈바속 달콤한 얼음물 밀어 올리듯 그 탈력으로 내 어릴적 시절까지 밀어버렸다. 티비 연속극중에 '대추나무에 사랑 걸렸네'라는 극이 있는데, 난 이 제목만 봐도 채널을 돌려 버린다. 둥근 보름달이 뜬 어느 밤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엔 가시가 무성하게 돋아있고 그 가시에 내 사랑이 피를 흘리고 있다. 증말 장손아닌 장손으로 손에 장을 지진 것처럼 아린 맛도 나는 불쌍한 나의 얼굴이다..ㅎ 내 어릴 적 살던 시골은 W시에서 한 시오리 떨어진 시골이였다. 초가집이 사오십채 옹기종기 모여 군락을 이룬 이젠 전설의 고향에서나 봄직한 전형적인 우리 나라 시골마을이였다. 이런 동네에 우리 가족은 집성촌처럼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었다. 그 동네 한 가운데 기와집이 딱 한 채 있었는데 그 집이 우리 큰 집이였었고..그 집 행랑채에 작은집인 우리 가족이 살았었다. 그런데 내 큰어머니는 시집을 오셔서 애기도 못낳다가 내리 딸만 3을 낳게 되었고 울 엄마는 시집을 오시자마자 단 번에 나를 나아버렸다. 그래서 큰집 큰 딸이 나와 동갑이나 개월수로는 내가 반년이상 빨랐다. 그래서 나는 장손아닌 장손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라면서 각종 비리에 연류되었다. 내가 생각해봐도 그 시절은 예상컨데 버르장머리도 없었다. 나중에 커서 그 버르장머리를 고치기 위해 아니, 고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적응하느라 내가 무척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었기 때문에 기억나는 일은 별로 없다하더래도 그럴 것이라 유추하고, 수긍이 가고도 남는 꼬라지였다. 그래도 편린처럼 기억나는 것으로 제사때 제사가 끝나면 할머니가 나만 몰래 뒤란으로 부르시고는 사탕이며 과자를 남보다 특별히 더 주시면서 비밀이라고 했다. 난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제사가 끝나면 난 당연히 할머니가 챙겨주시던 비밀의 장소를 미리 가서 기다리기도 했고, 그 추운 어느 겨울밤에도 눈이 와서 하얀 밭을 거닐며 과자랑 사탕을 혼자 다 먹고 들어오느라고 추위와 싸우며 빨리 안넘어가 쩔쩔매기도 했다. 이런 특수훈련을 어릴 때 이미 받아서 비밀은 잘 지킨다..ㅎ 그러다가 어느날 드뎌 진짜 장손이 태어났다. 그 불행의 씨앗을 미리 예측했었더라면 어떻게 사전에 작전이라도 했어야 했었는데 난 좀 멍청한 관계로 무방비상태로 멋모르고 지내다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 아닌 천덕꾸러기로 되어버렸다. 올 해의 날씨와 똑같은 변덕이였다. 어제까지 더웠었는데..... 나는 단번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 어린 마음에 방랑자되어 혼자 고추밭, 깨밭, 콩밭속에서.. 안울은 밭이 없을 정도로 내 눈에 펼쳐진 밭들은 다 눈물밭, 울음밭이 되고야 말았다. 내 아버지는 다른 곳에 근무를 하신 관계로 집에는 가끔 오셨었고, 내 어머니도 갖은 시집살이에 나를 돌볼 시간적 여유가 없으셨다. 난 그래서 가출을 생각했지만.. 하루는 농사쟁기들을 놓아두는 광에 혼자 들어가 잠이 들었다가 내가 없어졌다고 온 식구가 난리를 치며 찾았었는데 들키고 나니 그나마 내 위신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었다. 그 날 저녁밥은 그래도 행복했다. 난 그놈이 태어나자마자 완존히 밀려났다. 장손은 장손답게 병치레도 자주 했으며 삐쩍 골아서 골골댔다. 그러면 그럴 수록 식구들은 더 옥이야 금이야 갖은 방정을 다 떨며 나의 비단같은 마음을 찢어놨다. 그런걸 쳐다 보고 있는 나로서는 어린 맘으로도 속이 뒤집어지는 무척 괴로운 나날들이였다. 아니, 어른들이야 속상하면 나가 친구들과 대포라도 한 잔 하련만 그 어린 나는 뻔한 동네 골목어귀를 돌아다니며 돌맹이만 발로 차며 헤메다가 결국 배가 고파 들어왔다. 누가 장손 새옷을 사오면서 내 옷은 사오지도 않았다. 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그래도 난 원심이 착한 아이라 그럭저럭 잘 견디며 학교에 제법 취미를 붙힌 시기였었는데 가끔씩 참지 못하는 월례행사가 꼭 벌어졌다. 울 장손의 병치레 중에서 주특기가 경기였었는데 한 달에 한 두번꼴로 잠을 자다가도 무서운 꿈을 꾸고는 경기를 해서 들쳐업고는 한 2km정도 떨어진 돌팔이 의사한테 가곤 했었다. 그러면 무슨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집안이 들썩거렸다. 내가 학교에서 상장 받아온 것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나의 그 영광들은 기억속에 다 살아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상장에 먹물로 이름이 적힌 부분에 눈물이 떨어져 내 이름이 다 지워지고 있었다. 그 대단한 장손놈 때문에 난 저녁도 못먹고 날도 어느새 밤이 되어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에 얄미운 보름달만 걸려 있었다. 고통은 계속되었다. 만만한 심부름꾼으로 전락해버렸다. 큰아버지가 동네 이장을 보고 계셨기때문에 서류봉투에 관한 각종심부름을 나만 시켰다. 지금같으면 용돈이라도 챙길 수 있었겠지만 그 때야 욕이나 안먹으면 다행이였다. 학교나 출장소에서 보내는 공문이나 서류들은 나를 통해서 큰아버지께 전달이 되곤 했었는데 심지어 우체부 아저씨도 나만 보면 중간에서 잔뜩 우편물을 쏟아놓곤 가버렸다. 만인의 호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두 하나의 아이디어를 냈다. 서류봉투를 이젠 큰아버지에게 갖다 드리지 않고 나도 꼭 장손놈을 찾고는, 그놈에게 단단히 일러 큰아버지께 드리라고 시키게 되었다. 글케 쫄다구를 하나 맹글고 나니 한 결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장손 그놈은 무슨 호기심이 그리 많은지 큰아버지에게 갖다 드리기 전에 꼭 봉투를 개봉해서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는 것이였다. 종이밖에 없다고 글케 주위를 줘도 항상 담 뒤란으로 가서는 혼자 몰래 뜯어보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버릇을 고칠 요량으로 누런 서류봉투를 하나 구해서 그 속에 물뱀 한 마리를 산 채로 넣어서 봉해가지고 그놈에게 큰아버지 갔다 드리라고 시켰다. 그리고 어쩌는지 슬쩍 미행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거의 도착해서는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장옆으로 새는 것이였다. 이 정도면 성공이다 싶어 나는 친구들이 기다리는 방앗간으로 가서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잠깐잠깐 장손이 놀래 자빠지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 했다. 참으로 오랫만의 깨소금 터지는 통쾌한 맛이였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날이 어둑해지자 저녁먹을 때가 되어서 대문쪽을 살피며 들어 오는데 집안분위기가 꽤 험악했다. 마당에 큰아버지가 양손을 허리에 언고는 서 계시다가 내가 들어 오는 것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니 놈이 한 짓이 아니냐고 하시길래 어쩔 수없이 내가 그랬다고 고개를 끄떡이니 바로 내 따귀를 있는 힘껏 때리시는 것이였다. 나는 날아가다시피 나뒹굴어 쳐박혔다. 장손놈이 완존히 맛이 가서는 개거품 물고 쓰러져 병원으로 곧장 실려 갔단다. 그 건으로 해서 그 동안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댓가같은 것과 함께 오지게 맞았다. 맞은 강도를 생각하면 얼마나 미우면 이렇게 쎄게 때릴까도 생각했다. 내 어머니는 먼 발치서 보고만 계셨었는데 얼마나 쇼크를 먹으셨는지 그것을 지금도 틈만 나면 두고두고 얘길 하신다.ㅎㅎ 물론 장손 그 놈은 기억하는 것이 제대로 없다.ㅋㅋ 그 때 넘어지면서 뒤통수가 크게 다쳐 피를 많이 흘렸었는데, 지금도 보면 흉터자리가 있다고 하나 나는 못본다..ㅍㅍ 차라리 담배를 다시 피던지...절대 폭력은 삼갑시다... 출처;존재의 의미(허벌대사) ♬ Travellin' - Jeremy Spenc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