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부처님 마음

[삶의 길을 물었더니]불국사 선원장 종우 스님

淸潭 2006. 9. 19. 13:59
 

[삶의 길을 물었더니]

불국사 선원장 종우 스님       <한국일보 2005/6/1>


"양보하며 살면 당신도 출가자"
각자 자기 분야에서 밥먹을 자격 갖추면
그것이 수행자의 길


“마음만 가져 오너라.” 불국사 선원의 조실 월산(月山) 선사는 몇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주 앉은 청년에게 한 마디만 던지고 그만이었다. 허나 눈빛은 자애롭기 그지 없었다.

 

경주의 불국사 선원은 이른바 절집에서 금오(金烏) 문중의 큰 어른이었던 월산 선사의 원력으로 일군 도량이다. 제자 종우(宗雨ㆍ57) 스님은 스승의 자취가 머물고 있는 염화실에서 어렵사리 말문을 연다. 스승의 가르침이 행여 잘못 알려져 누가 될까 염려하는 망설임일 것이다.

 

종우 스님이 장차 은사가 될 월산 선사와 처음 마주한 자리도 염화실, 이 자리였다. 입대를 앞두고 무전여행에 나선 그의 발길이 일단 멈춘 곳이 불국사였다. 한 신도에게 가장 높은 고승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서너 달 가까운 무전취식은 출가를 향한 예행이었겠지만 몰골이 하도 사나워 스스로 생각하기에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 신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염화실로 안내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염화미소다. 부처가 꽃을 들자 가섭(迦葉)이 미소로 답함으로써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 꽃이 피어난 것이기에 그러하다.

 

월산 스님 또한 아무 말 없이 지그시 바라만 보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른 뒤 월산 스님은 “객실에서 몸을 추스르며 쉬어가게나”라고 권했다. 객실로 가면서 청년은 속으로 언젠가 월산 스님 품에서 머리를 깎겠다고 결심했다. 3년 뒤 자신에 대한 약속을 지켰다.

 

눈밝은 명안종사(明眼宗師)로 추앙 받던 스승이 훗날 늦깎이 제자에게 선원장 자리를 물려주자 종단 안팎에서는 오랫동안 놀라는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불과 마흔 일곱의 나이에, 그것도 출가경력 20년이 채 안 되는 수행자였기에 스승의 선택은 그야말로 파격일 수밖에 없었다.

 

“수행자는 남을 위해 사는 길을 스스로 찾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물질적인 도움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바른 삶이 가장 큰 자비의 실천이니까요. 그러니 부처님과 예수님은 영원히 중생을 위해 봉사하는 분들이지요. 누구에게나 출가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출가자의 마음이란 모두가 머리 깎고 중이 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수행을 하고 살아가는 셈이지요.

각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그 일로 밥을 먹을 자격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으로서, 스승과 제자로서, 수행자로서, 정치인으로서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사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는 그런 삶의 자세를 스승에게서 보았다. 이제는 안 계신 스승의 가르침은 그에게는 개안의 원음(圓音)이자 각지(覺地)로 올라가는 사다리였다.

 

병아리의 부화 과정은 수행자가 깨달음을 완성해가는 것과 같다. 선가(禪家)에서는 이를 ‘줄탁동시( 啄同時)’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미 닭은 보통 스무 하루쯤 알을 품는다. 그러다가 알의 체온이 어미 닭과 일치될 때 새끼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고 안에서 알을 쪼기 시작한다. 때맞춰 어미 닭도 밖에서 껍질을 쫀다.

 

병아리가 알의 안쪽에서 먼저 톡톡 쪼는 것을 ‘줄(줄)’이라고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껍질을 탁탁 쪼는 것이 ‘탁(啄)’이다. 줄과 탁의 일치에 의해 껍질이 깨지면서 비로소 병아리가 세상에 나온다. 서로 쪼는 위치가 어긋날 경우 병아리는 알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제자의 수행이 무르익었다고 해도 스승의 눈이 어두우면 소용없고 스승이 아무리 잘 이끌어도 제자가 따라주지 못하면 그 역시 줄탁의 기연(機緣)을 맞을 수 없다. 둘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 제자의 마음을 싸고 있던 무명의 껍질이 툭 떨어지는 것이다.

 

“진실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진실은 자기의 참모습이며 그것을 되찾는 과정이 수행입니다. 깨달음을 도라고 할 때 도는 진실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도인을 초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도인은 진실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람은 대개 진실보다 돈, 명예 같은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기게 마련이다. 진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지 자문할 때마다 한 점 부끄러움이 남아 있다면 갈 길은 멀다.

 

“부처님은 남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는 행위는 절대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지요. 스승에 대한 존경심에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옛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처럼 계율의 정신은 ‘남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은 이념에 얽매이지 않은 않은 분이었기에 편견이 없었습니다. 편견에서 자유로우니 남에게 해를 끼칠 일도 없지요. 이념을 갖게 되면 편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자기와는 다른 사람에게 적대감이 생기고 갈등과 대립의 싹이 틉니다. 종국에는 사람을 해치려 들지요.”

 

그래서 조사들은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말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치라니…. 여기서 죽인다는 말은 살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착을 여의라는, 선가의 농축된 언어다.

당나라 때 단하(丹霞ㆍ737~824) 선사가 행각을 다니다가 추운 겨울날 하룻밤을 한 절에서 보내게 됐다. 객실은 그러나 언제 불을 땠는지 앉아 있기조차 어려울 만큼 추웠다. 야박한 절 인심에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한 그는 법당에서 목불을 들고 나와 도끼로 쪼개 방에 군불을 지폈다. 이를 발견한 한 스님이 달려와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부처님을 훼손하는가?”

상대의 힐난을 단하 선사가 맞받아쳤다.

“다비를 해서 사리를 얻어볼까 해서요.”

그 스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 언성을 더욱 높였다.

“예끼, 이 미친 중아! 어찌 목불에서 사리가 나온단 말인가?”

단하 선사가 다시 말을 받았다.

 

“그러면서 어찌 나를 꾸짖으시오? 나는 나무토막을 태운 것이지 부처를 태운 것이 아니잖소!”

부처만이 위대하고 그 밖의 사람은 보잘 것 없다면, 이는 부처에 집착하는 행위다. 모든 사람이 존귀하고 평등하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은 유한한 삶을 무한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옛 사람은 지인무명(至人無名)이라고 했다. 곧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다는 말이니, 종우 스님의 바람은 그런 사람이 많은 사회가 아니겠는가.

 


 

종우 스님은

화두는 대개 스승이 내려주는 것이 절집의 관행이다. 스승이 제자의 근기(根機), 즉 능력을 헤아려 정해주는 것이다. 종우 스님은 이런 과정을 밟지 않은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비록 늦은 나이에 먹물 옷을 입었지만 대학시절 불교에 처음 눈을 뜨고 난 뒤 10년 가까이 홀로 경전을 보고 참선을 하면서 나름대로 수행의 길을 걸었다.

 

생사의 열병을 누구보다 심하게 앓는 동안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 뭣고’ 의 화두를 자연스럽게 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출가한 뒤 스승이 화두를 내리는 전통에 반대했다. 수좌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틈 만나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 스승인 월산 선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너 같이 안 되는 사람은, 그렇다면 공부를 하지 말란 말이냐!” 스승의 벼락 같은 할(喝)이었다. 스승은 제자의 가능성에 내심 흐뭇해 하면서도 하심(下心)을 잃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우정 꾸지람의 방편을 사용한 것이다. 종우 스님은 그렇게 스승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전북 정읍이 고향인 스님은 나이 서른, 발심의 뜻을 세운 지 무려 10년 만에 산문에 몸을 의탁했다. 아직 지혜의 문고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감추고 있다.

 

“사람의 뒷모습이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떠난 뒤에 명료하게 나타난다. 사람은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더 잘 가꿔야 한다. 그런데도 앞모습만 잘 보이려고 한다. 참사람은 뒷모습이 깨끗하고 아름답다.” 스승이 언젠가 법상에서 한 법문이다. 종우 스님은 그렇게 살려고 지금도 가부좌를 틀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