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부처님 마음

삶의 길을 물었더니

淸潭 2006. 9. 19. 14:00
 

삶의 길을 물었더니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욕심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깨달음의 빛이 빚어낸 삶이 이런 정경일 것이다. 세간에는 고려 말 나옹(懶翁) 선사의 선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문수(文殊)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 즉 문수보살게다.

 

나옹선사는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들기 전 이 게송을 읊은 뒤 스스로 다비를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 게송이 더욱 널리 회자(膾炙)됐는지 모른다.

 

암도(岩度ㆍ67) 스님에게 문수보살은 구도의 빛이다. 문수보살은 사바(娑婆)세계에 나타나 법우(法雨)를 뿌리는 지혜의 화신이 아니던가. ‘그래, 문수보살의 삶을 살자’, 그렇게 원력을 세우고 운수행각에 나선지 올해로 반세기다.

 

설법의 달인으로 꼽히던 스님이 홀연히 자비의 발걸음을 멈추고 전남 장성 백암산 백양사(白羊寺)의 암자 청량원에 묻혀 산 지 다섯 해 남짓 흘렀다. 재출가의 마음으로 고향이나 다름없는 백양사로 돌아온 것이다. 백암산의 한 줄기 백학봉(白鶴峯) 기슭에서 그야말로 ‘물같이 바람같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스님은 우리 삶에 밀접한 소재를 중심으로 지혜의 보따리를 조금씩 풀어간다.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잘 먹는다’는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기본적으로 여섯 가지가 필요합니다. 물 밥 공기 마음 나이 돈이 그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물 밥 공기는 생명유지에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요. 마음을 잘 먹어야 합니다. 자살도 마음을 잘못 먹은 게 그 원인입니다. 다음으로 나이를 잘 먹어야 합니다. 흔히 나이 값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갈수록 돈만 먹으려는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스님은 잠시 주저하면서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 남녀관계다. 부부관계의 정음(正淫)은 문제될 것 없지만 사음(邪淫)과 방종은 세상을 늘 시끄럽게 만든다. 방종은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다. 인간의 정신을 끝없는 불안과 방황으로 내모는 것이 방종인데 사람들은 그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한다. 쾌락은 그저 단순한 육체적 즐거움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희열은 정신적 즐거움이다. 스님은 쾌락과 희열이 어우러진 상태가 희락인데, 이는 부부생활이 원만할 때 맛보는 행복감이라고 설명한다.

 

“무엇에 빠지는 것을 ‘미친다’고 하지요. 물론 세상살이가 보는 대로 빠지게 돼 있습니다. 불교는 말하자면 정신차리자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에 잘못 빠지고 잘 못 먹어서 탈이 납니다.

빠져도 올바로 빠지고 먹어도 잘 먹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지요.” 그래서 마음이 중요하다. 본디 마음은 우주를 담을 만큼 무한한데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좁아지고 있다. 오로지 돈밖에 모르니까.

 

“옛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네 일을 보려면 집 일을 버리고 나라 일을 맡으려면 동네 일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소위 나라 일을 한다는 이들이 동네 일도 하고 집 일도 하려고 하는 게 요즘 세태인 것 같습니다. 이는 명예와 재물을 동시에 탐하고 취하자는 행위입니다.

 

지성이 부족해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요. 지성인이란 자기를 버리고 이웃을 위해 애쓰고 희생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우리의 선비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는 게 많고 배운 게 많다고 저절로 지성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본분(本分)을 알라는 할이다. 본분은 책임이다.

 

본분을 잊고 사는 사람을 푼수라 부른다. 본분을 지키고 분수(分數)를 헤아리는 삶이 잘 사는 길이다. 스님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삶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의식과 나그네의식이지요. 얻어먹고 뺏어먹고 등쳐먹고 놀고먹는 이는 주인의식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정당하게 사는 방법은 스스로 노력해서 벌어먹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사회의 주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사사삼매(事事三昧)에 빠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의 일에 충실하고 열중하라는 말입니다. 사사삼매에 들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할지라도 저절로 재미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요. 일하면서 즐겁게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복지사회입니다.”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사람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업(業)을 짓고 살아간다. 업은 인도말 카르마(karma)에서 나왔다. 한자로는 갈마(?磨)라고 쓰는데 우리말로는 갈무리, 즉 씨앗(종자)인데 요즘 유행어로는 원초적 본능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람은 본래 악업을 짓도록 태어납니다. 살생본능을 갖고 있는 거지요. 우선 한 인간이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올 때에는 몇 억분의 일에 달하는 경쟁을 거쳐야 합니다. 혼자서 살아 남은 것이니 그 죄업이 보통 큽니까. 그나마 의리 있는 태어남이 쌍둥이 일겁니다. 도둑질이나 음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해보면 스릴 있고 재미있겠지요.”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허물을 신구의(身口意) 삼업이라고 하는데 모두 10가지에 달한다. 그러면 10악업을 어떻게 10선업으로 바꿀 수 있을까. 살생은 방생, 도둑질은 근면과 노력하는 자세, 음행은 부부관계에만 정성을 쏟는 정음(正淫)으로 돌리는 것이다. 말이 고와야 마음도 바로 선다. 부정적인 사고와 말로는 사회정의가 세워질 수 없다. 탐진치(貪瞋痴) 삼독은 각각 보시 자비심 지혜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정신문화의 척도는 정직입니다. 계율은 세속에서 말하는 약속과 같은 겁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는 약속이 결심입니다. 자기와 남과의 약속은 그대로 약속이지요. 좋든 싫든 지켜야 할 사회적 약속이 법입니다.

 

지금 말한 것만 잘 지키면 정직한 사람이랄 수 있지요. 삶은 약속의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의 마음에는 안정이 깃듭니다. 해탈(解脫)은 약속을 지키는 가운데 저절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탈을 구하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가 누구를 구속했단 말인가. 자기의 마음인 것이다. 마치 누에가 자기 입에서 실을 내어 자기를 속박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우리를 구속하고 있을 뿐이다. 자비는 사랑과 용서와 나눔을 동반한다. 부자는 사랑과 나눔이, 빈자는 용서의 마음이 부족하다고 암도 스님은 안타까워한다.

 

절집에서는 사바세계를 욕계로 부른다. 욕망이 가득찬 곳이라는 뜻이다. 욕망을 탐욕으로 확장하는 대신 용서하고 나누고 사랑하는 삶이 자비의 실천이다.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사회는 희망이 샘 솟는 정토(淨土)가 될 것이다. 암도 스님은 문수보살을 대신해 그런 희망의 비를 뿌려 왔다.


암도스님은

 

암도 스님은 조계종에서 부처의 10대 제자 가운데 설법제일로 기록된 부루나에 비견된다. 상대의 근기를 헤아린 뒤 그 수준에 맞는 설법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그의 설법은 ‘암도식 인생강좌’라고 불린다. 지난 30년간 해온 설법만 6,000회에 달한다.

“우선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가르침대로 살게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그런 인연을 맺어주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지요.” 부처의 가르침을 골고루 나눠주는 법시(法施)의 길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스님의 첫 은사는 2년 전 입적한 서옹(西翁) 전 종정이다. 그런데도 선방수행 대신 일찍부터 포교로 눈을 돌리게 됐다.

 

스님은 17세에 백양사로 출가했는데 제대 후 선배들이 수행의 다른 길을 보여주었다. 절 집에도 현대교육을 받은 스님들이 절실하니 대학에 진학하라고 권한 것이다. 인재가 아쉬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서른 가까운 나이에 동국대에 들어가 대학원까지 마치고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출가의 인연은 가난이었다. 고향이 고창인 스님은 신문배달을 하며 종단에서 운영하던 정광중에 다녔지만 건강 때문에 절에서 요양을 하게 됐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라 저절로 삶의 무상함을 느끼게 됐다. 스님에게 그런 심정을 털어놓았더니 “세상은 무상한 게 아니다. 무상하지 않은 법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길로 백양사를 찾았다.

 

스님은 설법 못지않게 축대 쌓는 일도 잘 한다. 행자시절 온갖 노동을 해야 했지만 특히 축대 손질에 너무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어 암도라는 지금의 법명을 새로 받았다. 원래의 법명은 지행(知行)이었다. 지금도 스님의 손에서는 무슨 돌이든 안성맞춤으로 다시 태어난다.

 

“돌도 쓸모 없는 게 하나도 없는 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저마다 적재적소에 쓰이게 끔 태어났는데 단지 마음 하나 잘못 쓰는 바람에 삶의 행로가 달라지는 사람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