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부처님 마음

[깨달음의 자리]도봉산 무문관 제선 선사

淸潭 2006. 9. 19. 14:12
 

[깨달음의 자리]도봉산 무문관 제선 선사

<한겨레 2005/10/12/>

 

사방 막힌 방안에서 천하를 깨닫다

 제선 선사가 6년동안 두문불출하고 좌선 정진했던 도봉산 무문관.

천축이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를 말한다. 도봉산역에서 1시간 가량 도봉산대피소를 거쳐 가파른 길을 따라 도봉산에 오른다. ‘천축’으로 가는 길이다. 인수봉 못지않은 미륵봉 기암 아래 천축사가 숨어있다. 천축사 안쪽 외진 곳엔 대리석으로 지은 3층 집이 있다. 무문관이다. 무문관이란 밥이 드나드는 구멍 외엔 출입문까지 봉쇄한 방이다. 사방이 꽉 막힌 방에서 수행자가 견성(깨달음)해 벽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천지를 활보할 대자유를 얻을 때까지 나오지 않겠다고 스스로 들어간 감옥인 셈이다.

 

2001년과 2002년 겨울 기자는 이곳에서 이 무문관의 마지막 수행자인 원공 스님을 만난 적이 있다. 무문관에선 1차로 1966~71년에, 2차로 72~77년에 부처님의 6년 고행을 본뜬 정진이 있었다. 2차 때 유일하게 6년 정진을 마친 원공은 그 뒤에도 이곳 무문관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십여 년을 차 한 번 타지 않고 걸어만 다녔던 원공은 남들이 준 여비를 꼬박 모은 돈 1천여만 원씩을 두 차례나 통일을 위한 기금으로 써달며 기자를 통해 <한겨레>에 전했다. 그러나 원공 자신은 끼니 때가 되자 라면을 스프 없이 끓여 소금만으로 간을 해 아무런 반찬 없이 들고 있었다. 3년 전 홀연히 이곳을 떠난 원공의 소식조차 모른다는 이 절 소임자의 전언에 더욱 허허로워진 가슴팍을 무문관의 전설이 스치고 지난다.  

1,2차에 걸쳐 무문관엔 내노라 하는 스님 100여명이 거쳐 갔다. 그러나 1차 때 6년 결사는 단 2명만이 마쳤다. 한 명은 지난해 2월 95살로 입적한 직지사 조실 관응 스님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6년 결사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려 당시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들의 가슴에 전설로만 남았다.

그가 무문관 선승들 사이에서 ‘가장 철두철미하게 수행했던 수행자’로 알려졌던 제선 선사다. 제선의 화신인가. 무문관 앞에 큰 바위가 산처럼 앉아있다.

 

어린 아들 갑자기 죽은 뒤 홀대한 개 ‘인과응보’ 깨우침
밥구멍 빼고 꽉 막힌 무문관 6년 정진 뒤 자취 감춰

▲ 계룡산 대자암 무문관의 한 방에 수행자가 벽에 한 낙서. 

바른 인연을 심어 자신의 근본 성품을 깨달아 생사를

기필코 타파하겠다는 처절한 의지가 느껴진다.

제선의 전설을 찾아 다시 충남 공주 계룡산 갑사 대자암으로 향했다. 천축사 무문관을 지었던 정영 스님(83)이 다시 무문관을 세운 곳이다. 정영은 1940년 해인사 백련암으로 포산 선사에게 제선과 같은 해 한 날에 출가했다. 제선이란 법명은 ‘제주도에서 참선하러 왔다’고 해서 주어졌다고 한다. 만공 선사로 부터 법(깨달음)인가를 받은 포산은 수많은 제자들이 스승 삼아 몰려들었다. 정영은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제선이 “특출했다”고 회고했다. 키는 작았지만 목소리가 크고, 당차기 그지 없던 제선은 한 번 좌정하고 앉으면 움직이지 않은 독종이었다. 그러면서도 일 또한 남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해냈다. 훗날 성철선사가 머물다 열반한 백련암의 축대는 제선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한때 일본의 친척집에 묵으며 유학생활을 했던 제선은 고향에 돌아와 결혼을 해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나무랄 데 없이 잘 생기고 똑똑해 그는 식민조국을 독립시킬 제목으로 키울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뒤 갑자기 쓰러지더니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기가 막힌 제선은 아이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몇 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울부짖었다. 폐인이 될까 염려하던 어머니의 권유로 제선은 유람 길에 나섰다. 그는 묘향산에 이르러 감자밭을 일구며 토굴에서 정진하던 한 스님을 만났다.  

제선이 “아이가 왜 그렇게 죽었는지 까닭을 모르고선 살 수가 없다”고 말하자 스님은 “7일만 잠 안자고 기도하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제선은 그 날부터 “관세음보살”을 염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을 부릅 뜨고 염불하는가하면 어느 샌가 밭두렁에 가꾸로 처박혀 코를 골고 있었다. 스님은 그 때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게 했다. 그렇게 42일째 되던 날 드디어 잠이 사라져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7일이 지나도 아들이 죽은 까닭을 알 길이 없었다. 화가난 제선이 불상의 목을 떼버리겠다며 가던 중 소매가 탁자에 걸려 넘어졌다. 바로 그 찰라 아들이 다가왔다. 너무 반가워 안으려 하면 아들은 도망갔다. 그는 겨우 쫒아가 아이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아이는 “아야!”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데, 개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를 지극정성으로 따르던 충견이 떠올랐다. 일본 친척집에 머물 때 개가 갑자기 병이 들자 친척아저씨는 그에게 개를 교외로 데려가 버리게 했다. 그러나 그를 애타게 좋아했던 개는 자전거에 매달리며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개를 떼어내고 도망치다시피 집에 돌아왔는데, 그 개는 일주일 만에 집을 찾아 왔다. 그리곤 전과 다르게 섬뜩한 눈빛으로 그를 대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제선은 인과응보를 깊이 깨달았다.

무문관 6년 정진을 마친 제선은 마중 온 제자와 함께 부산까지 간 뒤 혼자서 배를 탔다고 한다. 그 뒤로 그의 행적은 끝이었다. 누군가는 평상복을 입고 서울의 한 판자촌에 숨어 수행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남해의 외딴 섬에 산다고도 했다. 정영은 “소문을 쫒아 남해의 섬에 찾아가보았지만 그는 없었다”고 했다.

문 없는 문을, 자취 없는 자취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3년 정진을 앞두고 공사 중인 대자암 무문관 방에 들어가 보니 가을 창공이 하나 가득 아닌가.

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