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을 물었더니] 화엄사 각성스님
"가축이 집을 나가도 찾는데 마음이 나가도 찾으려 안해"
물질에 얽매여 목숨버리고 마음까지 팔아
불변의 순금덩이같은 인간본성 깨달아야
손 잡고 함께 가는 동행의 모습이
파수공행(把手共行) 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경지를 이르는 선어(禪語)다.
한 가닥 뒤얽힘도 없는 도반의 세계가 그 말속에 뚜렷이 나타난다.
속세도 마찬가지다. 서로 손을 맞잡는 데서 어울림의 싹이 튼다.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인간다운 삶의 길로 이끄는 경전이 화엄(華嚴)의 세계다.
부산 사하구 엄궁동 승학산(乘鶴山) 자락에 자그마한 화엄도량이 숨어 있다.
화엄의 대가 각성(覺惺ㆍ68) 스님이 자비의 꽃을 가꾸는 화엄사다.
화엄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다. 자비의 원력으로 피어난 꽃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업중생이 모여 사는 공동체이지요.
반듯한 사람이 많으면 맑은 사회가 되고 바르지 못한 사람이 많은 사회는 혼탁하게 마련입니다.
다수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지는 게 동업중생의 세계입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내 안에 세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요.
”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ㆍ일미진중함시방)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가 곧 전체라고 보는 화엄의 우주관이다.
잔잔한 호수에 낙엽 하나가 떨어지면 그 곳을 중심으로 파장이 인다.
그 파장은 호수 안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우주 끝까지 미친다.
바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 속에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알지 못한다. 설사 안다고 해도 잊고 살아간다.
“마음이 집을 나가서 그런 겁니다.
하다못해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 집을 나가도 찾으려 애씁니다.
그런데 가축보다 소중한 자
기 마음은 동서남북 어디로
갔는지도 잊고 지내면서
거두어 찾아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구하려 하고, 얻으려 하고,
뺏으려고만 하는 악착 같은 욕심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스님은 묻는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사람들은 물질(돈)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실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게 내 몸이지요. 그보다 더 귀한 게 목숨이고.
설사 목숨이 붙어 있다고 해도 마음이 없으면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생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꾸로 알고 살아갑니다.
마음보다 생명, 생명보다 몸, 몸보다 물질을 앞세우거든요.
물질에 얽매어 목숨을 버리고 마음을 파는 사람이 끊이질 않습니다.”
스님의 말은 무심(無心)을 향한다. 곤혹스럽다.
수행자와 보통 사람의 삶의 지향점이 다를진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스님의 설명이 뒤따른다.
물질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갖고 싶을 때 갖되 자아를 잃지 않으면 된다는 덧붙임이다.
자아란 양심이니 결국 무심에 다가가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다.
“무심이란 마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음과 의식의 작용을 여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듯 마음에 한 물건도 머물지 않은 상태를 무심의 마음(無心之心ㆍ무심지심)이라고 하지요.
그렇다고 돌이나 나무처럼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 무심의 반대 편에 유심이 있다.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소유의 마음이다.
그런 욕심을 가끔은 쉬라는 주문이다.
비풍비번(非風非幡ㆍ바람도 깃발도 움직이지 않는다) 의 선문답은
마음의 속성을 가장 간결하게 보여준다.
중국의 육조 혜능(慧能ㆍ638~713) 스님이 은둔에서 벗어나 한 법회에 참석했다.
절 마당에는 유명한 선사의 법석답게 깃발까지 게양돼 있었다.
그 때 거센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며 소리를 내자 두 스님이 말싸움을 시작했다.
한 스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風動ㆍ풍동).”
이에 다른 스님이 반박했다. “아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幡動ㆍ번동).”
이렇게 시작된 입씨름은 그칠 줄 몰랐다. 이를 지켜보던 혜능 스님이 입을 열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두 스님이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움직인다는 말입니까?”
혜능 스님의 답이 돌아왔다. “두 스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혜능 스님의 가르침은 무엇이든 밖에서 찾으려 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리게 하는 방편이었다.
불교에선 흔히 인간의 본마음을 순금덩이에 비유한다.
장인의 손에서 금덩이는 반지 귀고리 목걸이 등 가지가지 모양의 장식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장인의 기술, 금에 가해지는 열, 그리고 다른 조건에 따라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다.
이들 장식품은 모양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금이라는 그 본질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의 본마음도 이와 같다. 본래 청정하고 진실해서 금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경계에 놓여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참 나이며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
다시 말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티끌만큼도 차별이 없다고 일깨웠나 보다.
우리는 번뇌망상에 휘둘리는 중생이다.
남이 잘 되기를 바라기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픈, 심술궂은 중생이다.
호박만한 자기 허물은 덮어두고 호박씨보다 작은 남의 허물은 입에 담기를 좋아하는,
이기심 많은 중생이기도 하다.
허나 결점 투성이인 중생임을 깨닫게 해주는 또 하나의 내가 분명히 있다.
그것이 불성이며 참 나이다. 부처의 법문이니 거짓이 아니다.
“참 나를 잊고 사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생사에 집착해서 그런 겁니다.
생사본무(生死本無) 라고 했습니다. 꿈을 깨고 나면 생사가 본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선사들은 꿈꾸지 않는 꿈을 꾸라고 일렀습니다.
장자(莊子)는 꿈속에서 자신을 잊고 나비가 됐지 않았습니까.
자신을 잊어버리는 꿈이야말로 수행자들이 지향하는 꿈꾸지 않는 꿈일 것입니다.”
‘한 생각의 미망(迷妄), 이것은 언제부터인가 자기도 모르게 시작된 졸음과도 같다.
’ 옛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미망에 갇혀 너와 내가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
서로 용납할 수도 없어 스스로 만든 장벽도 허물지 못한다.
미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 되면 삶은 훨씬 자유롭다. 그리고 편안해진다.
미망에서 깨어나는 순간 피안(彼岸)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lkc@hk.co.kr
각성스님은
“부처님의 마음을 선(禪), 부처님의 말씀을 교(敎)라고 하지 않습니까.
선과 교의 관계는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새는 한쪽 날개로는 날 수 없지요.
선교를 겸한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올바른 깨달음의 길입니다.”
조계종의 대표적 강백(講伯ㆍ강사)으로 꼽히는 각성스님은
선 중심의 수행풍토에 대한 안타까움을 에둘러 표현한다.
부처의 마음과 입이 둘이 아니듯 선교도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님은 특히 화엄경에 통달, 화엄학연구원을 세우고 후진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화엄경은 부처가 깨달음의 세계를 이 세상 언어로 가장 먼저 표현한 경전이다.
그 심오하고 오묘한 경지를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자
부처는 중생의 수준에 맞게 49년간 설법의 길에 오른다.
전남 장성의 유가에서 태어난 스님은 유년 시절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다.
14세에 집안 어른의 비문을 지을 만큼 문리가 틔었고 그 실력을 토대로 유불선 3교를 두루 섭렵했다.
18세 때 더욱 정진하기 위해 해인사 백련암을 찾았다.
결코 출가를 향한 걸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서 삶의 행로를 바꾸게 되는
불교와의 깊은 만남이 이뤄졌고 결국 입산 2년 만에 머리를 깎았다.
은사는 당대의 율사로 불리던 도원(道圓) 스님이었다.
출가 3년 만에 경북 영천 은혜사에서 금강경을 강의할 정도로 천재성을 발휘했다.
선방과 강원을 넘나들며 수행을 하던 스님은 지금은 고인이 된
운허(雲虛) 탄허(呑虛) 관응(觀應) 스님 같은,
선교를 겸수한 대종사들의 귀여움을 듬뿍 받았다. 역경사업에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님의 장서는 10만 권이 넘는다. 장제스(莊介石) 총통이 소장하고 있던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영인본(원광대 간행)만 8만 권에 달한다.
유불선을 망라한 저서도 30권에 육박한다.
<한국일보 2005/3/20/수/기획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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