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설 거사는 왜 환속했나
[가상인터뷰]
집착-번뇌 끊으니 예토가 곧 불국토라
부설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더불어 불교사에서 3대 거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속명은 진광세로 신라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던 해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홀로 앉아 명상하기를 즐기고 살생을 꺼려했던 그는 나중에 불국사로 출가해 부설(浮雪)이라는 법명을 받고 영조, 영희 두 스님과 함께 전국 각지를 돌며 일심으로 정진했다.
그러던 중 묘화와 인연이 맞닿은 것은 세 스님이 변산에서 10년간의 용맹정진을 마치고 오대산을 향하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세 사람은 만경현 백연지 옆 청신도 구무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그런데 구 씨의 무남독녀로 18년 동안 벙어리인 줄 알았던 묘화가 별안간 부설을 보고 스님과 삼생연분이 있으니 결혼을 해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간청했다. 깊은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부부의 인연을 받아들인 부설은 등운, 월명 두 남매를 낳은 뒤 다섯 해 동안 면벽과 묵언수행을 한 뒤 큰 깨달음을 얻었다.
세월이 흘러 영조, 영희 두 스님이 옛 벗이었던 부설거사를 찾았고 두 스님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안 거사는 물이 든 병을 들보에 매달아 그것을 깨뜨려보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두 스님의 병은 깨지는 동시에 물이 쏟아졌지만 거사의 병은 깨졌어도 물이 그대로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두 스님은 더욱 발심해 정진했고, 거사의 부인인 묘화와 등운, 월명 남매도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반갑습니다, 거사님. 한국불교사에서 이름을 남긴 재가불자가 극히 드문데 부설거사님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글쎄~, 그나저나 내가 이 인터뷰 대상으로 적합한가?”
▶사실 처음엔 망설였습니다. 거사님에 대한 기록이 16세기 이전에는 전혀 없고 그저 설화로만 존재해 오셨으니까요. 하지만 1300년 됐다는 월명암 창건설화가 그냥 만들어진 것 같진 않고, 또 거사님과 관련된 오래된 마을 이름도 있는 걸 보면 그냥 생긴 것 같지도 않고요. 무엇보다 거사께서 실존인물이냐 아니냐를 떠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줬고 여전히 주고 있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인도의 유마거사님처럼요.
“굳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물어보시게나.”
▷거사님께서는 출가자의 길을 걷다가 결혼이라는 환속의 길을 택하셨습니까? 묘화 낭자와 그 부친의 애원 때문인가요?
“내 누생(累生)의 업연 때문이지.”
▷도반이었던 영조 스님이 그런 거사님을 보고 ‘계행이 없는 한낱 지혜로 헛된 견해를 이루었고, 한 조각 자비로서 애욕의 끈에 묶이었네’라고 비판했던 걸 기억하시죠. 행여 자비라는 명분 아래 거사님께서도 의식하지 못한 욕망이 꿈틀거렸던 것은 아닐까요?
“내가 도반들과 떠나면 묘화 낭자가 자결할 것은 물론 무남독녀 잃게 될 그 부모까지 삶을 포기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네. 욕망의 유무를 떠나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따로 할 수 있었겠나.”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인을 안느니 차라리 불타는 나무를 안으라. 그 편이 괴롭기는 해도 악보(惡報)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매정하더라도 일단 깨우치면 더 많은 중생을 제도할 수도 있었을테고요.
“누구를 위한 깨달음인가. 결과만을 위해 과정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부처님께서도 그러하셨듯 나는 애욕에 탐착했던 게 아니라 대승보살의 자비행으로서 묘화 낭자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라네.”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목적이 외면된다면 자비행도 결국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깨달음은 자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자비는 깨달음에 의해 완성되네. 내가 만일 결혼을 한 후 그들과 더불어 욕망의 노예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면 세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다 죽는다 하더라도 출가자의 길을 접지는 않았겠지. 나를 떠나는 영조·영희 스님에게 ‘도라는 것은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하얀 옷에 있지 아니하며, 도라는 것은 번화로운 거리와 조용한 초야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얘기한 것은 무애자재한 대승적 보살이 되겠다는 내 다짐이자 경책이었네.”
▷그러면 거사님께서는 왜 나중에는 병을 핑계로 수년간 면벽참선을 하셨습니까? 출가에 미련이 남은 것이 아니라면 세속에서의 정진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가사장삼을 걸치고 고요한 산중에 있다고 출가가 아닌게야. 마음이 세속을 맴돌면 여전히 범부요, 시장바닥에 있더라도 불꽃같은 의지로 도를 향해 나아간다면 그이가 바로 출가자지. 내가 접은 건 출가수행자의 길이 아니라 삭발염의(削髮染衣)였을 뿐이네. 그렇기에 홀로 수행해도 좋을 인연이 됐을 때 그에 따랐던 것이고.”
▷거사님께서 훗날 영조 스님과 영희 스님이 찾아오셨을 때 병속에 든 물을 깨는 시합을 했는데 혹시 그건 미묘한 승부욕이나 과시욕 아닌가요?
“과시가 아니라 교화의 방편이었네.”
▷왜 하필 물병을 깨는 것이었나요?
“두 스님은 평생을 청정하게 사셨지. 그러나 그 분들에게는 계율과 교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오히려 깨달음의 장애가 되고 있었어. 물은 병이나 그릇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넘어서 병이라는 틀이 깨질 때 비로소 물이라는 진면목이 환히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네.”
▷거사께서 내리친 막대기에 병은 깨졌지만 물은 그대로인 것을 본 두 분 스님의 충격이 컸겠군요?
“그랬지.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 『금강경』에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 하면 이 사람은 그릇된 도를 행함이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 두 스님은 나를 재가자라는 형상의 편견을 벗어던지고 내게 법을 청해왔네. 참다운 수행자였기에 그렇게 법을 청할 수 있었던 게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재가자를 바라보는 출가자의 우월감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네. 부처님께서 이 사바에 다시 나툴 때 가사장삼을 수하지 않은 걸인의 모습이라면 과연 그 분께 삼배의 예를 올리고 법을 청할 스님이 얼마나 되겠나. 그러니 두 스님 또한 남다르다 할밖에.”
▷거사님, 제가 거사님과 관련된 설화를 읽으며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거사님 자녀인 등운과 월명 스님에 대한 얘기입니다.
“말해보시게나.”
▷거사님의 아드님인 등운 스님이 동생인 월명 스님이 절의 부목이 욕정을 품고 접근한다는 고백에 몸을 허락하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동생의 고요하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고 등운 스님은 동생과 함께 부목을 뜨거운 아궁이에 가둬 죽입니다. 그리고 ‘살인자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깨쳐야 한다’며 죽을 각오로 정진해 마침내 일주일만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살해해도 깨달음은 가능한 건지, 또 그렇게 부도덕한 방법으로까지 굳이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도 옳지 않다고 보네.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래도 굳이 얘기하자면 등운이 몸을 허락하라고 한 것은 『화엄경』에 관세음보살님이 바수밀다라로 화현해 성으로 중생을 제도했듯 월명으로 하여금 그런 보살의 길을 걸으라고 한 것이었겠지. 그러나 등운의 생각과는 달리 월명 에게는 무리였다네. 그러다 보니 등운은 동생에 대한 가책으로 그런 식의 구도적인 배수진을 쳤던 것이겠고…. 부목에게는 안됐지만 중생의 삶이란 나고 죽음의 연속이니 두 사람이 깨우치면 그 공덕으로 부목 또한 언젠가는 성불하리라는 믿음도 있었겠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방법이 정당화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마지막으로 요즘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는 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아니겠나. 그렇기에 무릇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이 가야하는 길인 게지. 그 길에 출재가의 구별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산 넘어 행복의 파랑새를 꿈꾸지 말고 자신이 처한 그 자리에서 집착과 욕망을 끊어가게나. 서로서로 아끼고 보다듬으며 말이지. 그러다보면 예토가 곧 불국토요, 너와 내가 모두 부처임을 깨닫게 될 걸세.”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부설거사 어록
‘사랑하는 처자권속 빽빽이 둘러있고/ 비단에 금은보화 산 같이 쌓였어도/ 죽음에 다달아선 다 버리고 외론 넋만 돌아가니/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부질없어라./ 날마다 번거로이 세상사에 바쁘고/ 벼슬이 드높아도 인생 한번 늙어지면/ 고관대작 두렵지 않고 염라대왕 오라시니/ 이것도 생각하면 허망할사 부질없어라./ 비단결 같이 고운 생각 천둥번개 몰아치는 말솜씨/ 천편 시 문장으로 만호후(萬戶侯)를 비웃어도/ 다생에 너다 나다 잘난 자랑 길러올 뿐/ 이것도 생각하면 허망할사 부질없어라./ 입으로 설법하되 구름 덮듯 비 내리듯/ 하늘 꽃 떨어지고 돌사람 끄덕여도/ 번뇌를 끊지 못하면 생사고를 면치 못하리니/ 이것도 생각하면 허망할사 부질없어라.’
(四浮詩)
‘눈에 무엇이 보이건 분별이 없고/ 귀에 어떤 소리 들려도 시비가 일지 않는다./ 분별 시비 다 내려놓고/ 내 마음 부처께 귀의할 뿐’
(열반송)
찬탄과 공경
“부설거사는 몸만 진세(塵世)에 묻혀 있을 뿐이요, 마음은 항상 불법에 어리어 있었다. 그리하여 본래면목을 깨치고 원각의 바다에 놀게 되었다.”
(대은 스님)
“부설거사는 오늘날 불교계에 널리 알려진 신라대의 이상형적인 불교인이다.”
(김영태 동국대 명예교수)
“부설거사는 애욕에 탐착해버린 범속(凡俗)이 아니라 애욕이 방편이 되었던 대승의 보살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여인과 처는 있었지만 염착(染着)함이 없었다.”
(황패강 단국대 명예교수)
법보신문 859호 [2006-07-05]
부설거사 일가
<변산·월명암>
『부설수좌, 빨리 걸읍시다. 이렇게 가다간 해전에 마을에 이르기가 어려울 것 같소.』
『공부하는 수좌가 뭘 그리 마음이 바쁘오.』
때는 통일신라 신문왕 시절. 부설, 영희, 영조 등 세 수좌는 여름 안거에 들기 위해 전라도 변산을 거쳐 오대산으로 가고 있었다.
그 중 우리나라 거사선(禪)의 대표적 인물로 자주 거론되는 부설은 본래 불국사 스님이었다. 경주 태생으로 불국사에서 원경이란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전국 각지를 두루 돌며 열심히 수도하던 중 쌍선봉 아래 조그만 암자를 짓고 10년간 홀로 공부했다. 그러다 도반들이 찾아와 오대산에 들어가 대중과 함께 정진하자는 제의에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선 것이었다.
걸음을 재촉하는 두 도반과 함께 그날 밤 부설은 만경 고을 구씨란 사람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음력 3월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부설이 잠시 뜰에 나와 거닐고 있으려니 어느새 다가왔는지 주인집 딸이 옆에 서 있었다.
『스님, 언제 떠나시나요?』
『내일 아침 일찍 떠납니다.』
18세쯤 되어 보이는 묘화는 스님에게 무슨 말인가 할 듯하면서 선뜻 말을 못한 채 망연히 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가씨, 소승에게 무슨 할말이 있으신지요?』
잠시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던 묘화는 중대한 결심이나 한 듯 입을 열었다.
『스님, 떠나지 마옵소서.』
『아니, 떠나지 말라니요?』
『소녀 저녁 무렵 스님을 처음 뵙는 순간 평생 지아비로 모시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설은 뜻밖의 말에 내심 크게 놀랐으나 조용한 어조로 타일렀다.
『그 무슨 철없는 말이오. 소승은 큰 뜻을 품은 수도승이 아닙니까?』
『스님, 제가 어찌 그걸 모르겠사옵니까. 하오나….』
스님은 과년한 처녀의 심중을 헤아리는 듯 다시 일렀다.
『그대의 애끓는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허나 이 사람은 도반과 함께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가는 길인데 어찌 장부의 뜻을 굽혀 그대의 청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스님의 장하신 뜻을 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장차 도통하여 많은 중생을 구하실 스님이 작은 계집 하나 구해 주지 못한다면 어찌 큰 뜻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단정한 용모에 재기와 덕기를 겸비한 묘화는 결사적으로 애원했다.
부설은 그녀의 끈덕진 호소에 감동하여 그녀와 혼인하기로 결심했다.
이튿날 아침 두 도반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다는 듯 오대산을 향해 떠났다.
묘화의 부모도 하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많은 곳에서 청혼이 들어와도 들은 척도 않던 딸이 길가는 객승에게 빠져 시집을 가겠다고 막무가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부설은 묘화와 결혼하여 지금의 김제군 성덕면 성덕리 고련부락에서 살았다. 그 마을에는 이상하게도 늘 눈이 떠돌아다니므로 부설은 마을 이름을 부설촌이라 했고, 자기 이름도 부설이라 불렀다.
부설은 아들 딸 남매를 낳고 살면서도 아내와 함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대산으로 떠난 옛 도반들이 찾아왔다.
『우리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네. 가장 공부를 잘해 장래가 촉망되던 자네가 혹이 몇 씩이나 붙은 낙오자가 되다니….』
도반들은 부설이 안됐다는 듯 측은한 어조로 말했다.
옆에서 이 말을 들은 묘화 부인은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듯 말을 꺼냈다.
『두 분 스님께서 공부의 도가 높은 듯한데 그러면 저희집 어른과 한번 겨뤄 보시면 어떨까요?』
영희, 영조 스님은 어떻게 도를 겨루자는 것인지 의아해하면서도 한편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선뜻 허락했다.
부인은 병 3개에 물을 가득히 담아 벽에 걸어놓고는 물만 벽에 매달려 있고 병은 땅에 떨어지게 하자는 문제를 냈다. 두 스님은 모두 실패했으나 부설만이 일을 해내니 두 스님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뒤 부설 내외는 남매를 데리고 옛날 공부하던 변산으로 들어가 전에 공부하던 자리에 부설암을 짓고, 부인을 위하여는 낙조대 올라가는 중간에 묘적암을, 그리고 그 딸을 위해 월명암을, 아들을 위해서는 등운암을 지어 각자 일생 동안 수도생활에 정진했다.
그의 딸 월명도 어머니를 닮아 15·6세가 되니 자태가 고울 뿐 아니라 글 공부에 능통하여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루는 재색을 겸비한 그녀에게 그 절 상좌가 정을 구해 왔다. 월명이 오빠에게 상의하니 청을 들어주라고 했다. 오빠의 말에 따르고 나니 얼마 후 상좌는 다시 정을 구해 왔다. 오빠는 또 들어주라고 승낙했다. 이런 일이 자꾸 되풀이되자 오빠 등운은 그 일로 누이의 공부에 장애가 될 것을 염려하여 그 상좌를 부엌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 죽였다.
그 상좌는 저승에 들어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하소연하면서 등운을 잡아들여 보복해 줄 것을 해원했다. 저승에서는 사자를 보내 등운을 잡아들이게 했으나 등운의 경지가 워낙 높아 잡아들이지를 못했다.
세 번이나 헛걸음치고 돌아가는 저승 사자에게 등운은 말했다.
『공중에다 모래로 줄을 꼬아서 나를 묶는 재주가 있다면 나를 잡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나를 잡을 수 없으리라.』
저승에서는 끝내 등운을 잡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누이동생 월명도 마침내 도통하여 육신이 있는 채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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