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에 급제해 부산으로 발령 받아 내려가던
조익 [趙翼, 1579 ~ 1655] 이
밀양에서 날이 저물어 하룻밤을 주막에서 묵어가는데,
술을 한잔 하자 불현듯 지난 일이 떠올랐다.
‘십여년 전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 박주현의
고향이 밀양이었지. 그때 참 친하게 지냈는데….’
밀양에서 뼈대 있는 집안이라 그 집을 찾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대궐같은 박주현의 집 솟을대문을 두드렸다.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사랑방에 좌정하자 소복을 입은
젊은 부인이 나와 인사를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박주현은 한달전에 죽었고 소복 입은 부인은 바로 박주현의
미망인이었다. 안방 옆 곁방에 차려 놓은 빈소에서
조익이 절을 올릴 때 미망인은 섧게 곡을 했다.
조익은 박주현의 자취가 담긴 사랑방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촛불을 끄고 누웠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박주현과 함께 천렵과 수박 서리를 하던 때를 생각하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보니 삼경이 가까웠다.
그때 ‘쿵’ 하고 담 넘는 소리에 이어 뒤뜰 대나무 밭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익은 잽싸게 문을 열고 나가
기둥뒤에 몸을 숨기고 대나무 밭을 응시했다. 도적이구나!
그런데 대나무 밭에서 나온 도적이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겨 안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안방에
촛불이 켜졌다. 조익은 뒤뜰로 가 열어 놓은 들창으로
안방을 들여다봤다.
이럴수가! “오늘밤은 소복을 입으니 더 예쁘네 잉.”
땡추가 미망인을 껴안고 있었다. 목소리를 낮추라며
손가락으로 땡추의 입을 막은 미망인은 부채로 화롯불을
살려 석쇠를 올리고 그 위에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미망인이 미리 차려 놓은 주안상을 당겨 약주를 따랐다.
한잔 마신 땡추가 입을 벌리자 미망인은 석쇠 위의 고기
한점을 입에 넣어 준다. 번들번들 개기름이 낀 땡추는
윗옷을 풀어헤치고 비스듬히 보료에 기대어 한손엔 술잔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미망인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고기 안주에 술이 얼큰해진 땡추가 미망인의 옷고름을 풀었다.
미망인이 코맹맹이 소리로 “잠깐만. 상 치우고 올게요.”
하며 부엌으로 나가자 조익은 끓어오르는 분을 참을 수 없어
옷 속에 품고 다니던 장도를 꺼내 들창 안으로 던졌다.
땡추가 목덜미에서 선혈을 쏟으며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
조익은 잽싸게 사랑방으로 돌아갔다.
잠시후 안방에서 미망인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집안의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날이 새자 밀양 관가에서
형방과 나졸들이 나오고 친인척도 몰려와 집안이 어수선
해졌다. 조익은 모른 척 행랑아범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간밤에 미친 땡추가 상중의 안방마님을 겁탈하려고
들어왔다가 안방마님의 장도에 찔려 죽었습니다.
안방마님은 자살하려는 걸 저희들이 막았습니다.”
이듬해 다시 밀양땅에서 하룻밤 묵게 된 조익이
박주현의 집을 찾았더니 집 앞에 정절부인에게
내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져 있었다.
조익이 친구 집안의 명예를 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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