烈女閣과 忠奴閣
烈女에게 내리는 旌閭는 흔하지만
종에게 내리는 旌門과 忠奴閣은 생소한데
어느 눈 오는 날
한 소년이 대갓집 문 밖에 쓰러졌고,
눈을 떠 보니
주인 마님과 댕기머리 소녀가 눈 앞에 보이는데
'정신이 들었으면 미음이라도 먹어라'
주인 어른의 말에 13세 된 딸은
미음 숫가락을 소년의 입에 대 주면서
소사와 만석의 첫 대면이 시작됐읍니다.
만석은 역질에 부모를 잃고 떠돌아 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니
갈 곳 없는 만석은 이집 종살이로 새 삶을 시작하며
박소사와 고만석은
주인 딸과 종의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고
만석은 소사를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설레었지만
주인과 종의 신분이라 어이할꼬
경상감사가 약방 노파에게 먼저 심문했다.
“네가 검시를 했다고 하니 검시 결과를 상세히 고하라. 박소사가 수태를 했더냐?”
“아, 아니옵니다.”
“무슨 근거로 아니라고 하느냐?”
“박소사는 乳小而乾하여 태아를 갖지 않은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무슨 뜻이냐?"
"젖꼭지가 작고 말라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 무슨 근거가 있느냐?”
“腹捷於背하였습니다.”
"그건 또 무슨뜻이냐?"
"배가 등에 붙은 것으로 배가 부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허면 박소사가 사통을 한 것이냐?”
“박소사는 眞凄子也이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춥고 쓸쓸하다는 뜻으로 남자와 동침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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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소사는 17살에 시집을 갔지만
신행 사흘만에 청상과부가 되었는데
이웃 동네 김조술이란 놈이
박소사가 자신과 동침하여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고,
박소사가 관아에 고발하였으나
김조술에게 뇌물을 먹은 영천 현감은
송청조차 열지를 않고,
이에 억울함을 하소연 할데 없어
박소사는 자진을 하였읍니다
한편 만석은 한양으로 올라와서
삼 년 동안 기다렸다가
순조의 陵行 御駕를 보고
징을 쳐서 억울한 사연을 상소하니
순조는 경상감사에게 재조사를 지시하여
박소사의 억울한 누명은 벗어지게 되고
순조는 박소사에게는 정려를,
고만석은 사후에 정문을 내리도록 했읍니다.
열녀각과 충노문은 경북 영주시에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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