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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은 왜 강화에서 굶어죽었나'

淸潭 2016. 10. 20. 10:29

'송강 정철은 왜 강화에서 굶어죽었나'/ 이광식

송강 정철이 강화에서 굶어서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강화대교 초입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십리쯤 가다 보면 길섶에 ‘숭뢰리’라 새겨진 장승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에 송정촌이라 불리던 마을로, 강화만으로 흘러드는 한강 줄기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이곳 어느 허름한 농가에서 한 달 남짓 송강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이듬해 연말이었다.

송강은 그 노경에 어쩌다 홀로 강화까지 흘러들어왔을까? 조선문학의 최고봉이요, 한때는 서인의 거두로서 서슬 푸른 권력을 휘둘렀던 송강이 대체 어쩌다가 늘그막에 강화 섬으로 흘러들어와서 겨울 저녁풍경처럼 스산한 말년을 보내다가 홀로 쓸쓸히 죽어갔단 말인가?

여기서 파쟁과 유배로 점철된 그의 굴곡진 생애를 죄다 둘러볼 수는 없지만, 강화행 직전의 상황만 간략히 살펴본다면, 임진난을 맞자 선조는 유배 중인 송강을 불러 명나라 사신으로 보냈다. 하지만 사신을 다녀온 후 모함을 당하자 송강은 스스로 임금에게 사면을 청하고는 강화로 은거했던 것이다.

그가 은거처를 강화로 정한 것은 당시 강화에 살던 그의 문인 석주(石洲) 권필과 관계가 있을 법하다는 추측과 함께, 혹 나라에서 급히 부를 때 바로 달려가기 위한 노신의 충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강화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당장 생계를 꾸리기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비록 현직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정승 직책을 지니고 있던 송강이었지만, 워낙 청렴한 성품이라 무엇 하나 챙겨둔 것이 없었던 터이다. 그가 얼마나 궁핍에 시달렸나 하는 것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로도 알 수 있다.

“내가 강화로 물러나온 후 사면을 둘러보아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평일에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것도 여지껏 감히 받지 않았는데, 장차 계율을 깨뜨리게 되니, 늘그막에 대책 없이 이러는 게 못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도 약간의 것인즉 마음 편하겠지만, 많은 것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송강의 곤궁함과 염치가 손에 잡힐 듯하다. 송강이 죽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시에도 그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외로운 섬 나그네 신세 해조차 저무는데
남녘에선 아직도 왜적 물리치지 못했다네
천리 밖 서신은 어느 날에나 오려는지
오경 등잔불은 누굴 위해 밝은 건가
사귄 정은 물과 같아 머물러 있기 어렵고
시름은 실오리 같아 어지러이 더욱 얽히네
원님이 보내온 진일주(眞一酒)에 힘입어
눈 쌓인 궁촌에서 화로 끼고 마신다오.(박영주 역)

송강의 이런 고단한 삶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은거 한 달 남짓 만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한다. 향년 58세. 온 나라가 환란 중에 있었던 1593년 12월 18일, 추운 겨울날, 송강은 홀로 굶어죽었던 것이다.

송강이란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송강과 동갑내기 로 같이 벼슬살이를 한 율곡 이이가 “송강은 충직하고 맑으며 의로운 선비다. 다만 성격이 편협하여 아량이 적은 것이 흠이다”고 평한 것을 보면, 그가 왜 당쟁의 한가운데서 수많은 정적을 만들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백사 이항복이 “송강이 손뼉 치며 담소하는 것을 보면 마치 신선을 보는 듯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타고난 시인임을 알 수 있다.

송강은 죽은 후 선영이 있는 경기도 고양 땅 신원리에 묻혔다가, 70여 년 후 우암 송시열의 주선으로 충북 진천 환희산 자락으로 이장되었다. 지금의 송강사이다. 송강의 문인으로 강화에 같이 인연을 맺었던 당대 최고의 문장 권필이 송강 묘를 찾아 지은 칠언절구가 전한다.

空山木落雨蕭蕭 빈산에 잎 지고 궂은비 내리는데
相國風流此寂寥 재상의 풍류 또한 이같이 쓸쓸하네
惆悵一杯難更進 슬프다 한 잔 술 다시 올리기 어려우니
昔年歌曲卽今朝 예전의 그 노래는 오늘을 말함인가

‘예전의 그 노래’는 송강의 사설시조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말한다. 저 멀고도 고적한 곳, 북망(北邙의) 적막한 정경을 우리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며 술 한 잔을 권하는 절창이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혀 매어가나 유소보장에 만인이 울어예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숲에 가기곳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친들 어찌리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바람...' -북망의 스산한 풍경을 단어 몇 개로 어쩌면 저렇게 손에 잡힐 듯이 그릴 수 있을까. 가히 대가의 솜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송강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하여 송정촌에 들러 마을 어르신을 붙잡고 송강이 만년을 보낸 집터를 물어보았다. 예전엔 한강이 마을 바로 앞에까지 들어와 있어 송정포라 했는데, 포구 어름의 어느 허름한 농가에서 잠시 살다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가끔 고려산 아래 사는 젊은 선비가 찾아오곤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뿐이라 한다.

그 선비는 아마 송강의 문인 권필 시인이리라. 그뿐, 어디에도 송강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어 서운한 마음을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기사 벌써 4백 년도 더 전의 일. 흐르는 바람 따라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게 어디 그뿐이랴.

하지만 송강의 전후 미인곡과 관동별곡을 일컬어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이 세 편뿐"이라고 서포(西浦) 김만중이 평했듯이 송강의 명구는 아직도 살아남아, 요즘도 '관동별곡'의 결구를 가다끔 읊조리곤 한다. 강화도와 석모도 사이를 흐르는 강석해협에 푸른 달빛이 휘영청할 때면 어김없이 이 구절이 읊조려지곤 하는 것이다.

"명월이 천산만락(千山萬落)에 아니 비쵠 데 없다."

어떤 진경산수화보다 아름답지 않은가!

(서울신문/ 이광식 통신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