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인물초대석

허난설헌(許蘭雪軒)

淸潭 2016. 6. 3. 11:28

허난설헌(許) 

 

 

 

조선의천재 여류 시인(詩人),

난설헌() 허초희(許楚姬)

 

 

소 재 지:~ 강원도 강릉시 난설헌로193번길 1-29(초당동 477)

 
<개    요>
 

강릉이 낳은 대표적인 문인으로서의

허균()과 허난설헌()을 비롯한

허씨 5문장의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 5기가 허균의 생가(生家) 터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세워져

문학 산책로로 조성된 지역 중의 하나다.

 

 

난설헌의 이름은 초희, 성은 허(許)이다.

그녀의 본가는 대대로

문학적인 조예가 많은 집안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홍길동저자,

허균이 그녀의 동생이다.

(확실히 피는 물보다 진한 듯?)

난설헌() 아버지와 오빠에게

글을 배우고, 시(詩)를 썼다.

그녀가 여덟 살 때 지은 한시는

높은 완성도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詞(죽지사) ,

 

집은 강릉땅 돌 쌓인 갯가에 있어,

문앞의 강물에 비단옷 빨았어요

아침이면 한가롭게 목란 배 매놓고

 

짝지어 나는 원앙 부럽게 바라봤지요

 

☆★☆★☆★  ☆★☆★☆★ ☆★☆★☆★  ☆★☆★☆★ 

 

결혼을 한 난설헌()

시(詩)를 쓰는 며느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시어머니와 무능한 남편 때문에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거기다 아이들까지 모두 잃고,

친정은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 몰락했습니다.

 

결국 허난설헌()은 27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세상을 떠난 뒤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재평가된

허난설헌()은 뛰어난 천재 시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도 시집 《난설헌집(軒集)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일본에서도 출간되어 지식인과

문인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애송되었다고 합니다.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능하고 통이 좁은 남편,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 등으로

허난설헌()은 건강을 잃고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시(詩)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 예언은 적중해

허난설헌()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 사후(死後)

남양 홍씨와 재혼하였지만

곧이어 터진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싸우다 전사하였다.

 

 

그녀의 비극적인 삶 때문일까.

그녀의 생가 안으로 들어서자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담장과 마당을 잇는 출입문에는

별도의 좁은 문이 달려 있었는데,

이는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여자들만 따로 다니도록 만든 쪽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난설헌은 이곳을 드나들며

일찍이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느꼈을 거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계집은 감히 사내처럼 행동하지 못하게끔

어릴 때부터 세뇌 받았으니까 

조선의 봉건적 시스템에 억압받아

자신의 뜻을 다 못 피우고 죽은 

여류 시인(詩人) 난설헌(). 

그녀는 그렇게 시대를 잘못 태어난 천재였다.

 

 

 

 

조선중기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軒.1563~1589)은

허난설헌()의 존재가 독특한 것은

그녀가 사대부가의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당시 강조되던 현모양처로서의

부덕을 갖추었다거나 성공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올곧게 그녀가 창작한 시(詩)의

탁월함 때문이었다는 데 있다.

허난설헌()은 왜곡된 형태이긴 하나

제한적으로 사회활동이 자유로워

문재를 뽐내는 것이 가능하던

황진이 같은 기생도 아니었고,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율곡 이이같은 훌륭한 자식을 길러낸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신사임당처럼

부덕을 상징하는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시(詩)로서

그 이름을 남겼고 훗날 그녀의 시(詩)는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지식인 문인(文人)들에게

격찬을 받으며 오랫동안 애송되었다.

 

 

 

난설헌() 생가는 크진 않지만 넉넉하다.

안채와 사랑채가 자를 그리고,

행랑채가 따로 나 있는 구조다.

 

마당과 담장에 심은 꽃과

나무들이 한옥과 어울려

제법 운치를 자아낸다.

 

주변 풍경을 구경하며 안으로 들어서면

그녀의 영정을 볼 수 있다.

꽉 다문 입술과 반듯한 코, 날카로운 눈매.

한 손에 책을 든 채 다부진 표정을 지은

그녀의 모습은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시(詩)를 쓰는, 영락없는

여류 시인(詩人)의 그것이었다.

 

 

 

 

책을 읽고 시(詩)를 쓰던 그녀의 평온함은

열다섯에 결혼을 하며 금이 갔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그녀의

글재주를 달갑지 않게 여긴 것이다.

 

자고로 그 당시 아녀자가 갖춰야 할

미덕이란 지아비를 보조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전부였다.

 

당연하게도 시어머니는

하루가 멀도록 구박을 일삼았고,

남편은 저잣거리에 나가

한량들과 어울리며 그녀를 등한시했다.

 

이 와중에 그녀의 어린 자식들은

돌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스물 일곱에 세상을 떠났다.

 

 

<감우()>~ 허난설헌()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 )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西 )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 )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 )

 

 

 

허난설헌()은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詩)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시(詩)는

족히 방 한 칸 분량이 되었다고 한다.

허난설헌()의 시집(詩集)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작들을 모두 태웠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은

찬란한 천재성을 가진 누이의 작품들이

불꽃 속에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가 친정 집에 남겨놓고 간 시(詩)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詩)들을 모아

<난설헌집(軒集)>을 펴냈다.

 

 
 
 
 
 
 
2    0    1    6.    6.    2   .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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