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이단(異端)녀 '어우동(於于同), 유감동(兪甘同)'
역사를 들여다 볼 때 재미를 느끼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시대 사람들의 숨소리를 느끼며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현 시대를 비추어 가
상의 상황을 스스로 체험해 가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쓰여 진 역사는 그 자체로서는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쓴 사람 눈을 통해서 관측된 것이 그 시대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각색되어지면서 하나
의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로 완성되어진 것이기도 하다.
진실 된 역사는 그것을 바라보는 후세인들의 마음속에서 각기 개별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
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는 죽은 사체가 아닌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형태야 어떻든 정치는 지배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한 수단일 것이다.
조선조에서는 특히 그러했고, 만인의 백성을 위한다는 형식적인 구호는
모든 것을 지배자를 중심으로 축을 형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미몽책에 불과하
기도 했다.
그 가운데 중심축에서 밀려난 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타고 지배하는 자들의 환락은 끝을 모르
고 탐욕을 채워가고 있었다.
유교를 지배논리로 앞세운 조선조에서는 모든 것이 도덕규범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갔던 것으
로 후세사람들은 생각하기도 했다.
삼강오륜을 근본으로 인륜의 도를 이루는 것을 최선의 상태로 삼았을 것 같은 조선조에서 임
금을 중심으로 행해진 반인륜적 사실들이 숨길 수 없이 눈에 뜨이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행동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주고 있기도 하다.
어우동(於于同 : 어을우동 於乙于同)은 과연 요부(妖婦)인가?
문서로 기록되어져 내려오는 사항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어우동은 요부라 하기보다 너무 과도하게 본능에만 충실하려 했던 무지한 한 아낙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연산군과 함께 나라를 피로 물들게 한 장녹수나, 당나라의 최고 권력자였던 현종의 눈을 멀게
해 세상을 흔든 양귀비와는 달리, 어우동은 단지 개인의 성애(性愛)에 집착한 당시 양반사회
풍속에서 특히 유별하지 않아 그 죄가 교형(絞刑)에 처해질 만큼 악독한 것이 아닌 한낱 바람
난 아낙이었을 뿐이었는지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것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해답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행해지던 시기였다.
궁중 궁녀들의 대부분은 임금 한 사람을 위한 소모품이었으며, 기생들은 제아무리 시와 서화
를 능하게 하며 기품 있게 풍류를 즐겼다 하더라도 양반들을 위한 노리개에 불과하기도 했다.
기녀들은 양반들의 희롱을 뿌리칠 여유도 없이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하지 않고 수많은 남
성들을 상대했으니, 어우동이 기녀들과 비교해 특별하게 남다른 행동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이 사대부 중심사회였던 조선조가 설정해 놓은 범주내의 행동 이었는가 아닌가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다 해서 어우동의 행동이 정당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상대를 구분하지 않고 벌여온 난봉은 남녀의 구분과 시대를 떠나 분명 잘못되었던 것
이 틀림없다.
단지 당시 양반사회에서의 풍속 상 임금을 비롯한 관료들에게서도 흔하게 발생하였던 일들이,
주체가 여성이었다는 것에서 그 잘못을 혼자서만 생명과 바꾸었던 극형이 유교사회의 치부를 덮으려했던 희생양이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어우동은 성종조의 승문원 지사(정3품. 승문원 - 조선시대에 외교문서를 담당하던 관청)였던
박윤창의 딸로 태어난 양반가문의 규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밝아 시 짓기와 감상을 즐길 만큼 총명함을 나타냈던 어우동은 왕실 종친
인 태강수(泰江守 - 수는 왕실 종친에게 내리는 작호)) 이동(李仝)에게 시집을 가 외명부 품계
인 정4품 혜인(惠人)에 봉작되고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가 된다.
그 지체로 보아 마땅히 백성들의 귀감이 되어야할 처지였던 것이다.
조선조 9대 성종은 성군의 칭송을 받았으나 풍류를 즐겨 자주 주연을 베풀고 야행을 해, 이를
질투하던 폐비 윤씨가 얼굴에 손톱자국을 남기는 사건을 일으켜 훗날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
으키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또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어울려 유흥을 즐겼다는 내
용이 전해지고 있어 어우동의 죽음과 관련하여 여러 추측을 불러일으키고도 있다.
태강수 이동이 어우동을 딸과 함께 친정으로 내쫓은 것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한데,
이동이 애지중지하는 기생이 있어 억지로 어우동의 허물을 잡아 소박을 놓았다는 것과 집에
은그릇을 만들기 위해 와 있던 은장(銀匠)이를 유혹하여 간통해 내쫓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
다.
친정으로 돌아 온 어우동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며 한탄하는 세월을 보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우동처럼 용모가 빼어난 계집종이 어우동을 위로하며 위안 삼을 사내를 물색해올
것을 제안했다.
어우동은 이에 흔쾌히 승낙하고 그 사내를 맞아 간통을 저질렀다.
행동에 거리낌 없어진 어우동은 아예 길 가에 집을 얻어 놓고 계집종과 함께 지나가는 사내들
을 바라보며 대상자를 물색하는 상태까지 되었다. 어우동은 어우동대로 계집종은 계집종대로
만나게 되는 사내들과 거칠 것 없이 통정을 하곤 했다.
누구의 집 앞을 지나다가 눈이 맞아 그대로 음행을 일삼고, 단오 날 그네놀이를 구경하다 생면
부지의 사내와 정을 통했으며, 전의감 생도와는 노비 파는 일로 의논하다 어우동이 유혹해 간
음했다.
또, 어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가 이미 어우동과 통정한 자의 이름을
대며 심부름을 왔다 하니 그 모습에 반해 곧바로 통정했으며, 자신의 통정사실을 협박하는 노
비와는 사실이 발각될 까 두려워 방으로 끌어들여 정을 줬다. 이들 중 특히 마음에 드는 사내
에게는 몸의 일부에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이들의 수가 이십 명이 넘었으며, 그들의 신분도 육촌 시아주버니인 종친에서부터 판서에 이
르는 고관, 그리고 생도, 아전, 노비까지 닥치는 대로였다.
때로는 이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기녀로 가장하기도 했으며 밤이고 낮이고를 가림이 없었다.
이상은 각 문헌에서 어우동의 품행이었음을 밝힌 것들이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이 정도였
다는 어우동의 행실은 음탕함을 지나 음욕에 혼을 빼앗긴 정신 나간 사람의 행동이라고 생각
되어질 경우가 된다.
어우동과 간통을 저질렀다고 언급된 사람들 중에는 방산수 이란과 수산수 이기의 왕실 종친,
병조와 이조 판서, 좌찬성 등을 지낸 어유소, 내금위 구전, 생원 이승언, 생도 박강창, 양인
이근지, 사노 지거비 등 각 신분을 망라하고 있었다.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한
때의 흥미를 주는 것들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일 때는 혼
돈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성종은 어유소 등 고관들은 신문(訊問)도 하지 않은 채 석방하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가벼운 형량에 모두 얼마 되지 않아 풀려났다. 그런데도 유독 어우동만은 풍기를 문란했다는
죄목으로 율에 따라 극형은 면해주자는 신하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성종이 직접 교수형을 명했
으니, ‘여자인 것이 죄’라는 결론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유교사회에서의 칠
거지악에 근거한 남녀 간 성별 차이에 따른 결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왕실의 권위와 체통도
있었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왕권과 관계된 현실적인 정치적 역학관계가 어우동과 관련된 사람
들에 있어 작용하였기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종은 음란 방종함을 중히 다스리지 않으면 후를 경계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그 이유를 삼았는
데, 이 결정은 세종 때 유사한 경우였던 유감동(兪甘同)과도 비교되어 그 배경을 두고 지금까
지 여러 해석이 난무하고 있다.
또, 어우동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록된 사건의 전개들이 너무 고의적인 듯 하는 인상을 풍기고
도 있다. 너무 적나라한 것이 결과를 이미 만들어 놓고 짜 맞춘 듯, 일사천리로 진행된 느낌을
갖게도 된다. 어우동이 무고하지는 않더라도 벌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기록으로 전
해지는 어우동의 행적은 모든 것이 도를 넘는 어우동의 행실에만 집중되고 있었다.
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개가한 것’으로 비추어 교부대시(絞不待時)의 중형으로 마감을 짓게
되었다.
교부대시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교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어우동은 의금부가 교형을 결정한 바로 그날 이 세상을 떠난 몸이 되고 말았다.
변방 관비로 유배된 유감동(兪甘同)
검한성(檢漢城 - 명예 한성판윤) 유귀수의 딸인 유감동은, 무안군수로 부임하는 남편 최중기를
따라갔다가 병을 핑계하여 홀로 서울로 돌아와 방탕한 생활을 하다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게
되었다.
최중기는 평강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어우동과 비교해 보았을 때, 오히려 유감동의 행적이 더욱 저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유감동은 우의정 정탁 그리고 정탁의 조카인 이조 판서 정효문과 동시에 통간했으며, 또 남편
최중기의 매부인 이효랑과도 통정하는 등 어우동을 앞서 상대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지 않고
간음하길 서슴지 않았다.
그녀의 수십 명에 이르는 통간대상에서 노비로 분류되던 사내만 빠져 있을 뿐 신분을 두루 섭
렵하며 줄기차게 간음행진을 계속해 갔다.
급기야는 세종에게까지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세종은 일의 확산을 차단하려는 듯 유감
동을 변방 관비로 유배하는 것으로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세종의 기대와는 달리 유감동은 변방 유배지에 가서까지 능히 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
산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물론 이 사건에서도 간통의 상대 남들은 곤장, 태형, 외방
부처, 파면 등의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이 다였었다.
조선조를 통틀어 후반기에는 그와 같은 기록이 감소하지만 전체적으로 통간의 현상은 그리 드
물지 않았던 것이었음을 여러 기록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유교를 근본으로 했던 사회 이
념처럼 모든 것이 인륜과 천륜을 따랐다면 열녀문의 전시가 필요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연산군의 패륜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듯이 양반인 남성들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행한 아녀
자들에 대한 음행은 관대했던 것이 조선조의 일반적 관행이었다. 반대로 여성의 행동이나 신
분 낮은 남성의 위 신분의 여성에 대한 그것은 매우 엄하게 치죄되어 살아남기가 극히 어려웠
었다.
생사를 초탈했던 어우동과 유감동의 본능심리도 의아하지만, 그와 같은 풍토를 이미 조성했던
조선조 계급사회의 모순은 우리의 역사로써 당연하게 받아들이기가 왠지 망설여지는 마음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은 스스로가 먼저 명심해야할 사항인 듯 싶다.
- 어우동의 행적에 대해 성종실록에서는 당시 다른 경우와는 달리 사항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국사(國事)의 진행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던 형태와는 좀 달라 보이기도 한다. 어우동의 음란한 행실이 한 편의 소설처럼 다가온다. -
= 성종 11년 10월 18일. 조선왕조실록 국역본. '어을우동(於乙宇同)을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어을우동은 바로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 박윤창(朴允昌)의 딸인데, 처음에 ‘태강수(泰江守) 동(仝)에게 시집가서 행실(行實)을 자못 삼가지 못하였다.
동(仝)이 일찍이 은장이[銀匠]을 집에다 맞이하여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女僕]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속으로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 동(仝)이 그것을 알고 곧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서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였는데, 한 계집종[女奴]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傷心)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吳從年)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司憲府)의 도리(都吏)10814) 가 되었고, 용모(容貌)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오며, 족계(族系)도 천(賤)하지 않으니, 배필(配匹)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主人)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마땅히 주인을 위해서 불러 오겠습니다.”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덕이었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맞이하여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 또 일찍이 미복(微服)을 하고 방산수(方山守) 난(瀾)의 집 앞을 지나다가, 난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는데, 정호(情好)가 매우 두터워서 난이 자기의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이름을 새기었다. 또 단옷날[端牛日]에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都城) 서쪽에서 그네 뛰는 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守山守) 기(驥)가 보고 좋아하여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뉘 집의 여자냐?” 하였더니, 계집종이 대답하기를, “내금위(內禁衛)의 첩(妾)입니다.” 하여, 마침내 남양(南陽) 경저(京邸)10816) 로 맞아들여 정(情)을 통했다.
전의감(典醫監)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이 종[奴]을 파는 일로 인해 어을우동의 집에 이르러서 값을 직접 의논하기를 청하니, 어을우동이 박강창을 나와서 보고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기었다.
또 이근지(李謹之)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淫行)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하려고 하여 직접 그의 문(門)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方山守)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나와서 이근지를 보고 문득 붙잡고서 간통을 하였다.
내금위(內禁衛) 구전(具詮)이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그의 집 정원(庭園)에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담을 뛰어넘어 서로 붙들고 익실(翼室)로 들어가서 간통을 하였다. 생원(生員) 이승언(李承彦)이 일찍이 집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걸어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妓生)이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서, 침방(寢房)에 들어가 비파(琵琶)를 보고 가져다가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姓名)을 묻자, 대답하기를 “이 생원(李生員)이라.” 하니, “장안(長安)의 이 생원(李生員)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춘양군(春陽君)의 사위[女壻] 이 생원(李生員)을 누가 모르는가?” 하였는데, 마침내 함께 동숙(同宿)하였다.
학록(學錄) 홍찬(洪璨)이 처음 과거(科擧)에 올라 유가(遊街)하다가 방산수(方山守)의 집을 지날 적에 어을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에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리어, 홍찬이 마침내 그의 집에 이르러서 간통하였다. 서리(署吏) 감의향(甘義享)이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따라가서 그의 집에 이르러 간통하였는데, 어을우동이 사랑하여 또 등[背]에다 이름을 새기었다.
밀성군(密城君)의 종[奴] 지거비(知巨非)가 이웃에서 살았는데, 틈을 타서 간통(奸通)하려고 하여, 어느 날 새벽에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부인(婦人)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장차 크게 떠들어서 이웃 마을에 모두 알게 하면, 큰 옥사(獄事)가 장차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서 마침내 안으로 불러 들여 간통을 하였다. 이때 방산수(方山守) 난(瀾)이 옥중(獄中)에 있었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감동(甘同)이 많은 간부(奸夫)로 인하여 중죄(重罪)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私通)한 바를 숨김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부(奸夫)를 많이 열거(列擧)하고, 난(瀾)도 어유소(魚有沼)·노공필(盧公弼)·김세적(金世勣)·김칭(金?)·김휘(金暉)·정숙지(鄭叔?) 등을 끌어대었으나, 모두 증거[左驗]가 없어 면(免)하게 되었다. 난(瀾)이 공술(供述)하여 말하기를, “어유소는 일찍이 어울우동의 이웃집에 피접(避接)하여 살았는데,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그 집에 맞아들여 사당(祠堂)에서 간통하고, 뒤에 만날 것을 기약(期約)하여 옥가락지[玉環]를 주어 신표(信標)로 삼았습니다. 김휘는 어을우동을 사직동(社稷洞)에서 만나 길가의 인가(人家)를 빌려서 정(情)을 통하였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이 자못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鄭氏)도 음행(淫行)이 있을 것을 의심하였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惑)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하였다.
=
= 성종 11년 9월 2일. 조선왕조실록 국역본. '어을우동의 죄를 논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이 버린 처(妻) 어을우동(於乙宇同)이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와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내금위(內禁衛) 구전(具詮)·학유(學諭) 홍찬(洪燦)·생원(生員) 이승언(李承彦), 서리(書吏) 오종련(吳從連)·감의형(甘義亨),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양인(良人) 이근지(李謹之)·사노(私奴) 지거비(知巨非)와 간통한 죄는, 율(律)이 결장(決杖) 1백 대에, 유(流) 2천 리(里)에 해당합니다.” 하니,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은 의논하기를, “어을우동은 종친(宗親)의 처(妻)이며 사족(士族)의 딸로서 음욕(淫欲)을 자행한 것이 창기(娼妓)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極刑)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때에 사족(士族)의 부녀(婦女)로서 음행(淫行)이 매우 심한 자는 간혹 극형에 처했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모두 율(律)에 의하여 단죄(斷罪)하였으니, 지금 어을우동 또한 율에 의하여 단죄하소서.” 하고,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어을우동의 죄는 율(律)을 상고하면 사형(死刑)에는 이르지 않으나, 사족의 부녀로서 음행(淫行)이 이와 같은 것은 강상(綱常)에 관계되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여 뒷사람의 감계(鑑戒)가 되게 하소서.” 하고,
김국광(金國光)과 강희맹(姜希孟)은 의논하기를, “어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음욕(淫慾)을 자행하기를 다만 뜻에만 맞게 하여, 친척(親戚)과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즐겨 서로 간통하여서, 이륜(?倫 :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을 손상시킨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마땅히 조종조(祖宗朝)의 권도(權道)의 법에 따라 중전(重典)에 처하여, 규문(閨門) 깊숙한 속의 음탕하고 추잡한 무리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서 경계하고 반성하게 함이 옳겠습니다. 그러나 제왕(帝王)의 용형(用刑)은 흠휼(欽恤)을 제일로 삼아서, 조종조(祖宗朝)에도 윤수(尹脩)와 이귀산(李貴山)의 처(妻)만을 사형에 처하고, 그 뒤로는 사족(士族)의 부녀로서 실행(失行)한 자는 모두 율문(律文)을 사용하여 처단했습니다. 더구나 율(律)에 설정(設定)된 법(法)은 임의(任意)로 올리고 내릴 수 없는 것이니, 만약에 일의 자취가 가증(可憎)스럽다고 하여 율(律) 밖의 형벌을 쓰게 되면, 마음대로 율(律)을 변경하는 단서(端緖)가 이로부터 일어나게 되어, 성상(聖上)의 호생지인(好生之仁 : 살상을 싫어하는 어진 마음)에 해됨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중국 조정의 예(例)에 의하여 저자[市]에 세워 도읍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서 징계(懲戒)가 되게 한 연후에, 율(律)에 따라 멀리 유배(流配)하소서.”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어을우동(於乙宇同)은 강상(綱常)을 무너뜨리고 성화(聖化)에 누(累)를 끼쳤는데, 이런데도 죽이지 않으면 음풍(淫風)이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男女)의 정(情)은 사람들이 크게 탐(貪)하는 것이므로, 법(法)이 엄격(嚴格)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欲情)을 자행하여 <춘추 시대(春秋時代)> 정(鄭)나라·위(衛)나라의 풍속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청컨대 이 여자를 중전(重典)에 처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소서.” 하고,
홍응(洪應)·한계희(韓繼禧)는 의논하기를, “국가에서 죄를 의정(議定)할 적에는 한결 같이 율문(律文)에 따르고, 임의로 경(輕)하게 하거나 중(重)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성상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무릇 형장(刑杖)을 강등(降等)하여 관대(寬大)한 법전(法典)에 따르시고, 법외(法外)로 논단(論斷)한 것이 없으셨습니다. 어을우동의 추악(醜惡)한 것은 진실로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되나, 인주(人主)의 인덕(仁德)은 마땅히 사중(死中)에서도 살릴 길을 구(求)해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본래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자가 아닌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율(律)에 의하여 논단(論斷)하소서.”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태종조(太宗朝)에 승지(承旨) 윤수(尹脩)의 처(妻)가 맹인(盲人) 하천경(河千慶)과 간통을 하고, 세종조(世宗朝)에 관찰사(觀察使) 이귀산(李貴山)의 처가 승지(承旨) 조서로(趙瑞老)와 간통을 하여, 모두 사형에 처하였으나, 그 후 판관(判官) 최중기(崔仲基)의 처 감동(甘同)이 창기(娼妓)라 칭하면서 횡행(橫行)하며 음행(淫行)을 자행하였는데, 사형(死刑)을 감(減)하여 논단(論斷)하였습니다. 지금 어을우동은 종실(宗室)의 처로서 음욕(淫欲)을 자행하기를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비록 극형에 처하더라도 가하나, 율(律)이 사형에는 이르지 않으니, 청컨대 사형을 감(減)하여 원방(遠方)에 유배(流配)하소서.” 하고,
현석규(玄碩圭)는 의논하기를, “어을우동은 사족(士族)의 딸이며 종실(宗室)의 아내로서 음란하고 추잡함을 자행하여 성화(聖化)를 더럽혔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온 나라의 이목(耳目)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이르기를, “경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니, 도승지(都承旨) 김계창(金季昌)은 대답하기를, “어을우동은 귀천(貴賤)과 친척(親戚)을 논(論)하지 않고 모두 간통을 하였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나머지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고,
좌승지(左承旨) 채수(蔡壽)와 좌부승지(左副承旨) 성현(成俔) 등은 아뢰기를, “어을우동의 죄는 비록 중(重)하지만, 율(律)을 헤아려보면 사형에는 이르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법(法)을 지키기를 금석(金石)과 같이 굳게 하고 사시(四時)와 같이 믿음이 있게 하라.’고 하였으니, 지금 만약 극형에 처한다면 법이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을우동은 음탕하게 방종하기를 꺼림이 없게 하였는데, 이런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이 어떻게 징계되겠느냐?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사율(死律)을 적용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글,문학 > 舍廊房' 카테고리의 다른 글
人人人不人 (0) | 2014.11.25 |
---|---|
위인들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0) | 2014.11.19 |
[스크랩] 나라가 기울고 있다 (0) | 2014.11.12 |
명당 3 (0) | 2014.11.10 |
명당 2 (0) | 2014.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