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세상사는 이야기

"그냥 좀 먹자!" 그녀가 美食家 남편에게 소리친 이유

淸潭 2014. 7. 18. 10:26

"그냥 좀 먹자!" 그녀가 美食家 남편에게 소리친 이유

송혜진의 쇼핑의 실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여긴 만두를 사오나요, 직접 만드나요? 사온다고요? 그럼 됐어요. 짜장면 두 개."

회사원 정은경(31)씨는 임신 5개월 차였던 작년 여름에 남편 앞에서 질질 운 적이 있다. 다른 것도 아닌 군만두 때문이었다.

남편은 까다로운 입맛을 자랑하는 자칭 타칭 미식가(美食家)였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눈앞의 식당을 그냥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30~40분 줄을 서서라도 맛집을 고수했다. 어쩌다 평범한 식당에 가게 되면 메뉴판을 일일이 따져가며 까탈을 부렸다. "이거 중국산 아니에요? 여기서 볶아요? 볶은 걸 가져온 거 아니에요?"라고 묻는 식이었다. 뭐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임신 중인 정씨가 "오늘은 꼭 군만두가 먹고 싶다"며 남편 손을 잡고 집 앞 중국집을 오기 전까진. 남편은 그곳 음식이 마뜩잖다며 내내 트집을 잡더니 끝끝내 군만두를 시켜주질 않았다. "여긴 만두가 맛없는 데야. 짜장면만 먹어."

정씨는 짜장면 앞에서 눈물을 삼단으로 쏟았다. "당신 실컷 먹어! 난 분식집 가서 혼자 군만두 먹고 갈 거야!" 정씨의 남편은 나중에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홈쇼핑에서 주문한 인스턴트 군만두 50상자가 든 커다란 박스를 안고 현관 앞에서 정씨의 화가 풀릴 때까지 서 있어야 했다.

타인(他人)의 입맛. 세상엔 두 종류의 미식가가 있다. 자기 혼자만 스스로 미식가라고 믿는 사람, 남들이 봐도 미식가인 사람. 양쪽 모두 함께 밥 먹기 쉽지 않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가끔은 세상과 타협하면 좋으련만, 독립운동 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 고집을 끝끝내 꺾지 않아 기껏 돈 쓰고도 외식의 즐거움을 망칠 때가 있다.

회사원 반형우(33)씨는 같은 부서 부장님과 밥 먹을 때 가장 힘들다고 했다. 부장님은 남들이 인정하건 안 하건 스스로 미식가라고 철석같이 믿고 계시는 분이었다. 부원 10여명을 끌고 신사동 가로수길로 간 날엔 "그냥 대충 중국집이나 고깃집 가자"는 부원들의 청을 듣지 않고, "이런 곳까지 와서 누가 중식이나 한식을 먹느냐"며 식당을 12곳도 넘게 들락날락하다가 자리를 찾지 못하고 결국 통닭에 맥주를 먹었다. 언젠가 야근하면서 부원들의 저녁을 피자로 때워야 했던 날엔 피자를 치즈 크러스트로 시키지 않았다고 부장에게 5분 동안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먹다가 화나서 목이 다 메더라." 반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투덜거렸다.
공무원 정혜윤(35)씨는 '진짜 미식가'에게 데인 경우다. 같은 부서 선배와 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맘이 편치 않았다. 딱 1시간밖에 안 되는 점심시간. 일하기 바쁘고 때론 귀찮으니 매번 맛집에 갈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선배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에 갈 때면 "음식과 서비스가 끔찍하게 엉망이라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싶다"고 했고 칼국숫집에서 시킨 칼국수가 불어서 나오면 젓가락을 내려놓고 분연히 일어섰으며, 고깃집 아줌마가 불판에 얹은 고기를 빨리 뒤집으면 "지금 굽는 게 아니라 삶는 거냐"고 쏘아주곤 했다. 정씨는 한숨을 쉬었다. "가끔 속으로 생각해. '그냥 좀 먹자!'라고."

결국 음식은 맛도 맛이지만 함께 먹는 사람과의 분위기와 상황으로 먹는 게 아닐까. 박완서 소설 '목마른 계절'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소복하게 담은 윤이 흐르는 흰밥과 갓 썰어 놓은 통김치와의 단조로우면서도 빈틈없는 조화는 오랜 악식에 시달린 진이네 식구들에겐 식욕을 유발하기에 앞서 눈부시기조차 한 것이었다.' 흰밥에 통김치만 있어도 맘 편히 즐겁게 먹을 수 있다면, 결국 그게 진짜 미식(美食)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