城下之盟(성하지맹)
초(楚)의 환공(桓公) 12년(BC 700), 초나라가 교(絞)나라를 쳤다. 楚는 대군을 성의 남문에 집결시키고 여러 번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絞는 성문을 굳게 닫고 나와 싸우지 않았다. 그리고 성벽 위에서 화살을 쏟아 부었다.
막오(莫敖)라는 벼슬에 있는 굴하(屈瑕)가 환공(桓公)에게 말했다.
"교(絞)의 사람들은 편협하고 경솔합니다. 경솔하면 도모함이 적은 법이니, 청컨대 땔나무를 취하는 인부를 호위를 붙여 내놓아, 이로써 그들을 유인하면 어떨까요?"
이리하여 그 계교대로 하자, 교(絞)의 군사들은 첫날 초(楚)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다음날 교(絞)의 군사들은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매복하였으므로, 크게 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
즉, 많은 초나라 병사들을 나무꾼으로 변장시켜 성 근처에서 나무를 하게 했다. 그것을 내려다본 교의 장군은 화가 나 병사를 보내 그들을 잡아 오도록 명령했다. 병사들은 쉽게 그들을 붙잡아 들였다. 교나라 장군은 기뻐하며 병사들에게 상을 내렸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초나라 병사들이 나무꾼으로 변장해 나무를 하는 것이 보였다. 교의 병사들은 그들을 체포하면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서로 앞다투어 성밖으로 뛰어나가 나무꾼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 때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초의 병사들이 성으로 쳐들어갔다.
성은 점령되었고, 교나라는 성 아래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었다.
기록 상 나타난 최초의 성곽은 춘추시대(BC 770∼476)다. 『만국사물기원역사 』에 따르면, “오월춘추(吳越春秋)에 城을 쌓아 군을 지키고 郭을 만들어 백성을 지켰으니, 이것이 성곽의 효시다.”
중국의 성문은 기본적으로 한 면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삼문(三門)으로 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성문 전면에 옹성이라는 소곽 (小郭)을 설치했다. 이 옹성의 상징성은 매우 강해서 농성(籠城)이란 말을 낳았다.
즉 정예 병사들이 지키던 옹성이 무너지면 성 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철저하게 성을 지켰는데 이를 농성이라 했다. 이에 유래하여 오늘날 농성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을 뜻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장군이 있는 성의 한가운데에 호화스런 깃발을 세우고 장군의 위세를 과시했다. 이 깃발은 깃대의 끝을 황백색의 상아로 장식하고 거기다 교묘한 조각을 하는 등 볼품있었다.
이 깃발을 아기(牙旗)라 불렀고, 대장군이 있는 성을 아성(牙城)이라고 했다. 오늘날 아성은 아주 중요한 근거지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은 외적으로는 어떤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그 주위를 둘러막은 성곽의 개념이 강했다. 수도의 보위를 위해서 도성, 왕궁의 보위를 위해서 궁성(宮城), 각 지방의 행정 소재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읍성(邑城) 등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처에 미리 쌓아놓은 성들도 적지않다. 그런 성의 하나로 우리 편의 근거지를 삼기 위하여 산 위에 쌓은 것을 산성 (山城)이라 하고 요지를 따라 한 줄로 쌓아 적을 방어하는 것을 행성(行城)이라 한다.
* 남한산성은 한 맺힌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이곳에 피신하였으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 수항단으로 나가 항복하는 굴욕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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