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故事成語

태산북두(泰山北斗)

淸潭 2013. 5. 16. 10:10

태산북두(泰山北斗)


당송(唐宋) 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는 당나라에서 성행했던 이른바 병문(騈文), 내용 없이 수식만 일삼던 문장을 타파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때문에 그의 문장은 맹자(孟子)에 버금갈 정도라고 했다. 중국의 고금(古今)을 통해서도 손꼽히는 명문장가로 한유가 육경의 글로써 모든 학자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음에 그의 학문이 성행하여 배우는 자들이 그를 우러러보며 태산북두와 같다고 말했다.(愈가 以六經之文으로 爲諸儒倡하다. 自愈沒에 其學盛行하여 學者仰之하며 如泰山北斗云하다.)」 라고 평했다.

태산(泰山)은 중국 오악(五岳) 중의 하나로 높은 산이며 북두(北斗)는 북두성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별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태산(泰山)은 중국 오악 중의 하나인 산동성 태안현(泰安縣) 북쪽에 있는 산으로서, 중국인들이 신성시 여기는 영산(靈山)이다. 옛날 중국 천자가 천하의 제후와 회동하던 곳이기도 했다.

흔히 큰 것을 비유할 때‘태산만 하다’고 말하므로 무척 높은 산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높이는 1,450m로 백두산 보다 낮다. 북두는 북두성(北斗星)을 이른다. 태두라는 말은 천자의 제사 의식에서 유래된 말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거나 태평성대를 누렸을 때는 그 감사함을 천지신명께 고하는 풍습이 있었다. 제사는 태산의 정상에서 북두칠성을 향해 올렸다. 북두칠성을 뭇 별의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지신을 올리는 제사는 양보산에서 지냈는데, 반드시 태산을 향해 올렸다. 지신(地神)이 깃든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중요한 존재를 일러 태두라 했으며, 훗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으로 그 뜻이 바뀌었다.


중국 제일의 명산, 중국에서는 옛부터 태산을 성산(聖山)으로 추앙해 왔음. 북두(北斗)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가리키는 말. 북두칠성이 모든 별들의 중심적인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는데서 남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에 비유하고 있다.


당나라 때 사대시인(四大詩人)의 한 사람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한유(韓愈)는 768년, 지금의 하남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9대 황제인 덕종(德宗)때 25세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極諫)하다가 조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파직당했다가 재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한유(韓柳)'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고문부흥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 당서 한유전(唐書 韓愈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춘추시대의 6가지 경서)을 가지고 여러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태산북두'를 우러러 보듯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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