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불교경전

우승택 금강경 해설 제35회 <마음의 실체>

淸潭 2011. 2. 19. 18:25

 

우승택 금강경 해설 제35회 <마음의 실체>

 

오늘은 법신비상분 할 차례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로 유명한 분이다. 지난 시간 수심결 할 때 거울에 비유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와 실제 우리는 다르다고 말씀드렸다. 법신과 화신을 통해서도 말씀드렸지만 다 같은 내용이다. 거울에 비친 우리가 있다면 거울 본 바탕자리는 法身 거울에 나타난 과보로 받은 몸 서울시 어디 거주하는 몇 년생 누구누구는 化身이다. 정통불교는 법신이 있으므로 화신이 있고 법신이 없다면 화신도 존재할 수 없다 말한다. 그래서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고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다. 반면 법신불 자체를 추구하는 종교도 있다. 원불교다. 원불교는 금강경 반야심경 다 공부하지만 법신 자체를 별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본래 석가모니는 이것들이 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이 있다 가르치신 것인데 우리는 자신이 법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26분 제목이 법신은 相이 없다는 법신비상분이다.

 

반야심경 금강경에 나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뭔지 아나? 무상정등정각 이라구? 그렇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득했나? 그것은 고작 말이요 언어일뿐이다. 금강경 강의 끝난 다음 혼자서 금강경 다시 한 번 읽어 보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거울 그 바탕이다. 거울 바탕자리가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의 向心 거울 그 자체로 향하는 마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거울 그 자체 法身 向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그렇게 생각하고 금강경을 처음부터 쭉 읽어보면 1분부터 25분까지 한 내용과 앞으로 할 26분부터 32분까지 개념을 잡을 수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말이 제일 많이 나오는 분이 17분 구경무아분인데 다시 한 번 돌아가 복습해 보자.

 

법신비상분의 핵심은 若以色見我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다. 꿈에 관세음보살님 봤다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다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했다 그러지만 불교 입장에서 보면 웃기지 말라 이다. 법신은 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 진짜 아냐 네 업의 그림자야 그러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능엄경 50마장<오온에서 일어나는 수행 중 생기는 장애>에 다 나오는 내용이다. 인터넷 들어가 보니 수심결 이해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은 것 보고 깜짝 놀랐다. 사실 나는 점철성금 이 글에 막혀 수심결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수심결 보고 한 방에 깨우치신 분이 계시다. 바로 조계종 초대 종정 하신 한암스님<1876~1951>이시다. 6.25 때 국군이 법당을 불지르려 하자 법당은 내 집이니 나를 먼저 불지르라 하신 분이다. 다행히 문지방만 태운 사진만 갖고 돌아가 한암스님은 계속 계실 수 있었다. 다음은 선사들의 삶과 깨달음 마음을 찾아주는 60가지 이야기란 만화책이다.             

 

수심결<修心訣> –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깨달음과 수행의 방법을 논한 전서

點鐵成金 쇠를 달구어 황금을 만든다는 뜻으로 나쁜 것을 고쳐서 좋은 것을 만듦

 

중국스님 30분 한국스님 30분에 대한 이야기가 잘 정리돼 있다. 한국 불교가 최고라 말하면서 중국스님들 얘기만 하고 맨날 술 드시는 경허 만공스님 얘기만 한다고 서운해 했는데 이 책엔 한국스님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잘 정리돼 있다. 한암스님은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신의 성품을 떠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부처 되기를 바란다면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이는 몸을 태우는 고행을 하거나 팔만대장경을 줄줄이 다 외운다고 해도 아무런 뜻이 없는 짓이다 라는 수심결 이 한 대목에서 깨달으셨다. 수심결 참 중요한 문장인데 예상 외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셨다. 이 수심결에서 자기 마음자리를 알게 된다. 많은 분들이 수심결 알고 계셔서 능엄경 해도 되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능엄경은 인도에서 나온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나온 책이라고 대부분 스님들이 말씀하신다. 한의학에 가야 들을 수 있는 56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56부의 하나인 三焦 심장의 외막인 心包 같은 말이 이 책에 나온다. 중국에서 만들었든 인도 당시에도 있었든 눈 밝은 스님들이 보기에 부처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해서 지금도 많은 스님들이 공부하고 있는 책이다.

 

성철스님께서 능엄신주 하라고 많이 말씀하셨다. 능엄경은 몰라도 능엄신주 아시는 보살님들 많다. 복주머니 보면 작은 금강경과 능엄신주 보통 같이 들어 있다. 옛날 스님들은 전생의 업과 금생의 업을 한꺼번에 소멸할 수 있는 신주가 능엄신주라 평했다. 그래서 능엄신주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이다. 법화경의 보물찾기 청담스님 통장 비밀번호 찾기 답이 능엄경에 있는 것 같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천도하고 우리 스스로 49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과거의 습기와 현재의 습기를 모두 녹여버리자는 것이다. 능엄경에도 그런 가르침이 있다.   

 

아난존자<Ananda> - 부처님 10대 제자. 多聞 제일        

 

아난존자 왕족 출신으로 매우 총명하고 잘 생겼던 분이다. 귀족출신이었든 아난존자와 평민출신이었든 가섭존자 사이엔 모종의 갈등이 있었다고 중국 쪽 기록이 있다. 그래서 가섭존자는 禪을 하고 아난존자는 敎를 한 것이라 말한다. 또한 한자도 어렵고 국민들이 제대로 글도 못 읽고 대부분 스님들도 한문을 잘 모르고 하니 禪이 발전한 것이다. 신해혁명 당시 위안스카이는 하도 가르침이 안 돼 한글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거의 망해서 망한 나라의 글을 쓸 수 없다 해서 결국 안 쓴다. 모택동도 정권을 잡고 난 뒤 한글을 쓰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평민들도 잘 알 수 있게 만든 간자체다. 그런 한자에 대한 고통과 괴로움이 중국엔 있다. 인터넷 해 보면 소리글자가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다. 인터넷 시대에 한자는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중국은 말이 없는 가섭존자쪽을 좋아하고 아난존자쪽은 굉장히 나쁘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위안스카이<원세개 Yuan Shihkai 1859~1916> - 중국의 군사 지도자이며 청말의 개혁파 각료

 

절에 가 보면 아난존자가 발을 하나 들고 있는 벽화 그림이 있다. 중국스님들은 아난은 敎만 알았기 때문에 두 발로 서 있지 못하는 절둑발이라 폄하한다. 그래서 아난존자는 부처님 사후 결집 때 깨달은 자만 결집에 참여할 할 수 있다 해서 칠협굴 밖에서 못 들어온다. 그러나 사실은 7일 동안 의식을 다리에 두고 경행하시는 모습이다. 그러니 억울한 일이다. 이렇게 아난존자를 아주 바보로 만들어 시작하는 경전이 바로 능엄경이다. 부처님 당시 아난존자 탁발 다니지만 너무 잘 생겨 어느 점술사의 딸이 보고 반한다. 주술을 걸어 합방하려는 순간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아신다. 마음은 가고 싶지 않았겠지만 주술이 작동해 계를 범할 뻔 했으니 도대체 너의 마음과 눈은 어디 있는 것인가?  

 

結集<Samgiti> - 불멸후 경전내용을 함께 암송 공인하고 교의적 논란들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모임.

경행<徑行> - 심신을 가다듬기 위해 경문을 외면서 일정한 장소를 조용히 걷는 행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1.몸 속에 있다 - 그런데 왜 네 마음은 차례로 몸 안부터 보지 못하는가? 56.

2.마음은 몸 밖에 있다 - 마음은 등불과 같아 가까운 것을 비추고 먼 것을 옮겨 다니며 비춘다. 마음이 밖에 있다면 마음이 아는 것을 몸이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몸 밖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3.마음이 숨어 있는 한 곳을 알았습니다. 바로 눈 속에 숨어 있습니다. 눈은 유리처럼 맑아 마음이 눈을 통해서 손을 보지만 눈 속에 있기에 56부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리도 볼 수 있느냐? 그러면 산도 보고 강도 보듯이 유리도 볼 수 있겠구나? 그런데 어찌 너는 네 눈을 보지 못하는가?   

 

내가 보이느냐? 보입니다. 내 뒤 문이 보이느냐? 보입니다. 그 뒤엔 뭐가 보이느냐? 숲이 보입니다. 너는 가까운 데부터 멀리 있는 것까지 차근차근 잘도 보는구나. 그런데 너의 눈이 만약 너의 몸 안에 있다면 왜 너의 눈은 너의 56부를 보지 못하고 너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가? 왜 다른 것은 가까운데부터 보면서 가장 가까운 네 56부는 못 보는가?   

 

그러자 아닌 것 같으니 마음은 몸 밖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답한다. 아난존자를 아주 쥐 잡듯 한다. 참 불쌍하게 됐다. 그래? 마음이 몸 밖에 있다면 여기 등불이 비추는 것 같이 나도 비추고 너도 비추는데 그럼 내 몸이나 네 몸이나 같은 몸이니 내 몸도 네 몸이라 그러겠구나? 마음이 밖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냐? 그러자 아난존자 꼼짝 못한다. 그러자 마음이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눈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은 유리처럼 투명하게 생겨 이 유리를 통해 강도 보고 산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은 눈에만 있기 때문에 56부는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는 산도 보고 강도 보는데 그러면 유리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유리는 보지 못한다. 네가 유리를 통해 유리도 보고 산도 본다는 소리인데 네가 눈을 통해 나를 보면 왜 너의 눈은 너의 눈을 보지 못하는가?     

 

4.56부는 몸 안에 있고 보는 구멍인 눈은 다른 곳에 있으니 밝음을 볼 때는 밖을 본다고 하고 어둠을 볼 때는 안을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답이 안 될까요?

눈을 감고 어둠을 볼 때 어두운 경계가 눈과 마주하였는데 어찌 어둠을 보는 것은 안을 보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또한 밝음을 보는 것이 눈이라고 한다면 왜 밝은 대낮에 너의 눈은 어찌 얼굴을 보지 못하는가? 얼굴을 본다 함은 마음이 허공에 있다는 말인데 허공에 있다면 너의 몸이 아닐 것이니라. 그러면 너의 허공에 있는 마음은 나의 몸까지도 네 몸이라고 해도 되겠구나.

 

어둠을 보는 것은 안을 보는 것이라 했는데 눈을 감으면 당장 어두워진다. 밖에 있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어둠이 안만 본다는 말인가? 밖에도 눈만 닫으면 깜깜해지는데. 밝음을 보는 것이 눈이라고 한다면 밝은 대낮에 너의 눈은 왜 네 얼굴을 보지 못하는가? 네 눈이 얼굴을 보지 못하면 마음이 허공에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등불처럼 내 몸도 네 몸이라 해도 되겠구나?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온 허공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한 곳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자 아난존자 증거를 들이대기 시작한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으로 인해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법이 생김으로 어울리는 곳에 따라 가지가지 마음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그 생각하는 실체 바로 그 놈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놈은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습니다.

네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마음은 본체가 없어 어울릴 곳이 없는 것이거늘 본체가 없는 것이 어울린다면 19계나 7진으로 어울린다는 말인가?

5.강력 반발하며 마음은 아는 것이고 눈은 보는 것이지 마음이 본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가정입니다.

눈이 보는 것이면 죽은 사람의 눈은 왜 보지 못하는가?

 

조건에 의해 뭐가 생기는 것이니 그 조건 지어지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은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고 중간에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정답인 것 같다. 그런데 너무나 잔인한 우리 부처님 한 말씀 또 하신다. 네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마음은 본체가 없어 어울릴 곳이 없는데 본체가 없는 것이 조건 지어졌다고 이렇게 어울리고 저렇게 어울리고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고 한다면 19계나 7진으로 어울린다는 말인가? 18계 밖에 없다. 그런데 너는 그것 말고 뭔가 하나 더 있냐? 6진 밖에 없는데 너는 뭔가 하나 더 있냐? 도대체 어떤 본체가 있어 뭉쳤다는 말인데 그 뭉치게 한 힘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난존자 강력히 반발하면서 마음은 아는 것이고 눈은 보는 것인데 자꾸 마음이 본다 합니까? 마음은 아는 것이고 눈은 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처님 말씀하신다. 눈이 보는 것이라면 시체는 왜 보지 못하는가?

 

18감각기관인 6근과 대상세계인 6경 식별작용인 6 <6: 6>

 

또 마음이 아는 것이라면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실체가 있다는 소리인데 그 실체는 그 몸 하나인가? 여럿인가? 혹은 네 온 몸에 가득한 것인가?

한 개의 몸체라면 한 군데를 건드려 아프면 다른 곳도 다 알아서 아파야 하고 여러 개의 몸체로 한 마음이 구성되어 있다면 아픈 곳이 따로 없어야 할 것이며 온 몸에 두루하다면 첫 번째 경우처럼 다른 곳도 다 아파야 할 것이니라.

그렇다고 온 몸에 그득한 것이 아니라면 머리를 부딪혔을 때 발은 아무 이상이 없어야 하거늘 머리가 아프다고 발걸음이 힘이 빠지거나 걷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러니 어울리는 곳에 따라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마음이 아는 것이라면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기능이 있다는 소리인데 그 기능이 있는 실체는 하나냐 여럿이냐 그득하냐? 묻는 것이다. 우리 머리를 탁 치면 아프다. 만약 마음의 실체가 하나라면 머리는 아픈데 발은 왜 안 아프냐는 것이다. 또 마음의 실체가 온 몸에 그득한 것이라면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발걸음에 힘이 빠지거나 걷지 못하는 것은 또 뭐냐? 그러니 실체라는 것이 몸 어디 한 부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군데 있는 것도 아니고 허공처럼 온 몸에 두루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자 또 증거를 들이대기 시작한다.

 

과거 부처님께서 문수보살과 말씀 중에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중간에 있습니다 - 중간이 어디 있는 장소인가? 몸 안인가 몸 밖인가? 몸과 밖 사이 어느 지점인가?

장소가 있다면 표시할 장소가 있을 것 아니냐? 동이냐 서냐? 동은 동이 아니고 서는 서가 아닌데 어디라는 말인가? – 제가 말씀드린 중간은 그런 공간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안근과 안경이 만나는 안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안계? 안계는 눈과 물질이 만나는 곳인데 그러면 눈과 물질이 섞여서 눈이 아플 것이고 그럼 그 눈은 안경과 둘로 갈라서려고 하겠구나? 혹은 6근과 6경은 2가지를 겸한다는 것인데 눈도 되고 산도 되는 것이 네 마음이라는 소리겠구나

 

중간이 어디냐? 있는 곳에 따라 동쪽이라는 것도 이렇게 하면 동쪽이 되고 저렇게 하면 서쪽이 된다. 네 말은 6근과 6경이 이리도 되고 저리도 된다는 소리인데 네 마음은 나도 됐다 물도 됐다 맨날 왔다 갔다 한다는 그 소리냐? 그러자 아난존자 다시 근거를 들이댄다.

 

예전에 목건련 수보리 부루나 사리불과 계실 적에 알고 느끼고 분별하고 하는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곳에도 있는 곳이 없어서 일체의 집착함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집착함이 없는 것이 마음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네가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허공 육지 물속에 있는 일체 존재들이 있다는 소리냐 없다는 소리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착함이 없다고 해서 없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니라!

 

집착함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맞는 말 같다. 너무너무 괴로울 때 아! 나의 5온이 쓸데 없는 인연화합으로 인해 스트레스 받고 있구나 그래 시간이 지나가면 다 낫겠지 저것은 나의 참된 모습이 아니야! 그러니 여기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觀하자 그렇게 말하면 상황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觀하니 답이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전에 이것도 2차 무명이요 미혹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니까 아니나 다를까 부처님 또 박살 내신다. 물고기도 있고 하늘도 있고 새도 있는데 물고기 분명 존재하는데 저것 아니야 저 새? 개시허망이야 비행기? 개시허망이야 저 사람 좋은 집에 살아? 개시허망이야 나 이코노미 타는데 저 사람은 일등석 타? 다 개시허망이야 우리 그럴 수 있지만 부처님은 허망이 아니란 말씀이시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집착함이 없다고 해서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 봐라 존재하지 않는냐? 이렇게 또 박살을 내신다. 이 박살이 바로 소승과 대승의 갈림길이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은 여기서 스톱이다. 집착하지 않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소승의 가르침이다.   

 

보통 우리 중생들은 거울 속 그림자가 자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가 좀 나아지고 싶으면 자꾸 대상을 바꾸려고 한다. 마누라가 내 말 잘 들어줬으면 좋겠고 애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줬으면 좋겠고 상사가 나를 예쁘게 봐서 승진 좀 시켜줬으면 좋겠고 월급도 좀 많이 줬으면 좋겠고 이렇게 우리 중생들은 전부 대상만 바꾸려고 든다. 그래서 아부도 하고 공부도 하고 뇌물도 주고 성형수술도 하고 좋은 대학 가려고 하는 것이다. 반면 소승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상은 다 허망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경계에 빨려 들지 않고 멀어지려고 한다. 그래서 대승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다. 소승은 나쁘다 대승이 좋다 그런 말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소승에서 대승으로 발전할 때 어떤 일들이 있었나?

 

장자에 나온다. 장자는 세상 물정 다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쌀이 없어 배가 고픈 것이다. 쌀 얻으러 가다 수레바퀴 자국에 파라미 한 마리가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비유다. 장자가 보고 네 신세나 나나 비슷하구나. 내가 뭘 도와줄까? 물이 필요하다. 그래? 그러면 내가 장강에 가서 물을 떠다 줄 테니 행복하게 잘 살아라. 이 정신 나간 노인네야!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한 바지 물뿐이지 장강의 그 많은 물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신세가 물고기와 같다는 것을 깨닫고 도인이고 뭐고 일단 끼니부터 해결해야 되겠다 생각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다. 소승법은 집착함이 없다 해서 대승법이 그냥 지나갈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대승법은 거울 속 나와 대상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거울 본 바탕자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 즉 法身이다. 여기서 보살정신이 나온다. 나와 남을 구별하는 相에서 벗어나게 되면 거울의 그림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거울 속 그림자를 자신의 참 모습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은 백화도량발원문에 나오는 나의 참 성품과 관세음보살님의 참 성품이다. 그 성품 본 바탕은 모두 같다. 본 바탕인 백장식을 바꾸게 되면 자동으로 거울 속 자기와 대상이 모두 다 바뀌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구하는 것이 8정도 6바라밀 계정혜 3학이다. 거울의 본 바탕을 바꾸려면 본 모습을 바꾸는 것이 제일 쉽다. 그러니까 과거 갖고 있던 너의 생각 기억 감정 같은 것은 과거의 잘못된 습기로부터 온 것이니까 버리란 말이다. 새로운 발 보살심인 반야를 알아서 반야로 행동하라는 것이 대승의 가르침이다.      

 

부처님 당시 멀리서 4명의 거사가 부처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 왔다. 그런데 한 사람은 제대로 앉아 열심히 듣는데 어떤 사람은 하늘을 보고 어떤 사람은 나무를 보고 또 어떤 사람은 땅을 파면서 듣자관찰력 좋은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저 거사들은 모두 열심히 듣는 것 같은데 왜 몸의 움직임들이 다들 다른가요? 그런 행동들은 그 사람들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사람이란 금생의 모든 것이 아니라 여러 생의 습기가 남아 있는 존재다. 자꾸 하늘을 보면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전생에 별을 보고 운명을 결정하던 점성술사 땅을 파며 듣는 사람은 과거생에 지렁이 나무가 움직일 때마다 고개가 왔다갔다 하는 사람은 과거생에 원숭이 제대로 앉아 듣는 사람은 전생에 수행자로 살았던 그 습이 남아 그런 것이니라. 무릇 사람이란 그 습기를 없애기가 참 어려우니 항상 깨어 자신의 습기를 잘 관찰해야 하고 올바른 습을 만들어야 하느니라. 그러면서 올바른 습을 가지려면 올바른 정견을 가지고 8정도를 행하고 6바라밀을 행하고 계정혜 3학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그런 습기들 다 있다. 그것이 자기 습기고 거울 속 그림자고 자기 생각이고 기억이고 감정이다. 이런 것 깨달아 알면 좋은데 모르면 내 그렇게 사는 것이다. 거울 속을 바꾸자는 말이다.

 

운명을 바꾸는 법<불광출판사. 저자 원요범>

거울 속 그림자는 운명이다. 상수의 세계다. 인생은 절대 상수나 정수나 소수의 세계가 아니다. Z=A+Bi 인생은 복소수의 세계다. Imaginary number i자승을 하면 -1이 되는 가공의 수가 있다. 절대 A B Z같은 상수가 아니라 Imaginary number가 들어간다. 보통 일반적인 우리 삶의 99.99%는 운명의 지배를 받지만 결정적인 한 수는 Imaginary number에 들어 있다. Imaginary number가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마음이고 向心이고 법신이고 관세음보살의 마음이고 거울 본 바탕자리이다. 이 책 보면 거울 속 그림자 바꾸는 법이 잘 설명돼 있다. 이 책에 굉장한 도인 2분이 등장한다.

 

원요범<1533~1606> - 중국 명대의 관료이자 학자       

복소수<Complex number> - 하나의 실수와 하나의 음수의 제곱근과의 합

 

주역에 굉장히 밝은 도인을 만나 자신의 인생사를 듣는다. 몇 년후 과거시험에서 몇 등으로 붙고 녹봉은 쌀 얼마에 너무나 정확히 맞히니 아! 인생은 모든 것이 정해져 있구나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 욕심 없이 산다. 어느날 스님과 같이 참선하는데 하나도 미동이 없으니 스님이 깜짝 놀라 묻는다. 선생은 무슨 공부를 하셨기에 아무 번뇌가 없이 그렇게 편안하십니까? 난 아무 것도 공부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 욕심이 없습니다. 왜 욕심이 없나요? 인생이란 것이 다 정해져 있는데 욕심 내서 뭐하겠습니까? 그러자 도인인 줄 알았더니 잡놈이구만! 운명이란 것이 그렇게 상수로 정해졌단 말이요? 우리 세존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소. 당신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면 모든 것이 다 바뀌는 것이요. 그러면서 가르쳐준다. 원래 요범선생은 천수경 진언만 계속 하신 분이다. 육자대명왕 진언을 해서 관세음보살님 가피를 받아 자신이 준제보살로 행하는 것이 천수경 가르침이다.      

 

六字大明王眞言 관세음보살님의 미묘한 본심을 나타내는 6자 진언 옴 마니 반메 흠  

준제보살<准提菩薩> – 모든 보살의 어머니 역할을 담당하는 보살

준제진언<准提眞言> – 몸과 마음을 완전히 맑게 하고 번뇌의 때를 벗겨 내는 진언

 

준제진언을 계속 하면 관세음보살 옴마니반메흠의 도움을 받아 거울 속 자신이 바뀌어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도교적 가르침도 조금 있지만 기본적으로 준제진언으로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왜 바뀌는가? 운명이란 항상 정해진 常數가 아니기 때문이다. 변수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 운명엔 상수와 변수가 같이 있다. 능엄경 가르침대로 집착하지 않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집착하지 않고 여여하게 평상심 부동심을 갖고 아! 모든 일은 단지 상황일 뿐이고 나는 거기 끌려가지 않는다고 말은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여러분이나 저나 조금 더 공부하면 得成於忍해서 그렇게 하겠지만 업의 그물은 벗어나지 못한다. 설사 우리가 알더라도 인연으로 받은 이 몸은 과보를 받게 돼 있다. 인연으로 받은 이 몸이 과보를 안 받는 유일한 방법은 확 깨닫는 것이다. 확 깨달으면 과보가 없다. 그래서 3살에 죽을 스님이 90도 산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이나 깨달음의 이치만 알지 깨달은 사람들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히 과보를 받는다. 어떻게 받나? 하늘에서 비바람 돌바람이 내리는데 우산 쓰라는 것이다. 우산 쓰면 머리 맞을 것 발 맞고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3천 배나 능엄신주 하라고 그런 방법 가르쳐주신 분이 성철스님이다. 그런데 이런 History 없이 무조건 3천 배 해! 능엄신주 해! 그러니 미신 같다. 그래서 스님들이 능엄경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전생의 업장을 소멸해야 깨달음도 빨리 오기 때문이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착함이 없다고? 부처님은 옆에 고통이 있는데 강 건너 불 보듯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이런 말 강력 부인하신 것이다. 마누라 애들 뭐라 하는데 나 도 닦는다고 가만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러면 소크라테스 부인처럼 바로 찬물 날아온다. 네 가족의 괴로움을 푸는 지혜를 가지라 그랬지 언제 집착 말고 가만히 있으라 그랬나

35. 우승택 금강경 마음의 실체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