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택 금강경 해설 제33회 <26.법신비상분 27.무단무멸분 28.불수불탐분>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핵심용어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거울 그 바탕이고 법신이고 向心임만 알면 예전과 다르게 금강경이 읽히게 될 것이다. 法身非相分 법신은 상이 없다. 법신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 거울 바탕 그 자체다.
○ 法身非相分 第二十六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 觀如來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是如來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觀如來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32상으로 여래를 관할 수 있느냐? 수보리가 답했다. 그러합니다. 32상으로 여래를 관할 수 있습니다. 수보리야 만약 32상으로 여래를 관한다면 전륜성왕도 즉시 여래이겠구나?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해석해보면 32상으로 여래를 관할 수 없겠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나를 형상으로 보기 원하거나 음성으로 구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잘못된 도를 행하는 것으로 결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수보리 존자가 정신 차린 것이다. 여태까지 쭉 강의 들은 수보리 존자가 헷갈리는 것이 참 이상하다. 32상은 과보로 받은 부처님의 응신과 화신이다. 그런 빛나는 모습을 보고 여래를 알 수 있느냐? 그랬더니 수보리 존자가 네 알 수 있습니다 그런다. 13분 여법수지분에서 32상을 見으로 물었을 때는 수보리 존자가 볼 수 없다고 대답해 놓고 법신비상분에서는 觀하면 볼 수 있느냐 물었더니 볼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거울 속 모습이 전륜성왕이라면 너는 전륜성왕도 觀하면 여래도 관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묻자 아이구! 죄송합니다. 32상으론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하고 고친다. 왜냐하면 여래는 거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여래는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 그러시는 것이다.
32相 – 부처님이 몸에 갖추신 뛰어난 相好
行住坐臥 語默動靜이다. 현각스님 법문에도 여래는 허공과 같은 것이라 말씀하신다. 거울 그 자체가 여래다. 어떻게 여래를 보고 행하느냐는 그 다음에 나온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 형상을 만나 수기를 받았다는 둥 앞으로 미륵보살로 태어날 것이라는 둥 그러면 다 邪道다. 일체의 소리나 형상은 사도로 여래를 보지 못한다고 딱 할을 하신 것이다. 이게 법신비상분이다. 26분과 27분은 서로 관련이 있다. 그러자 무단무별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 無斷無滅分 第二十七 <끊어짐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莫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故 得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汝若作是念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 莫作是念 何以故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法 不說斷滅相
수보리야! 네가 만일 여래는 상을 구족하지 않고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야! 여래는 상을 구족하지 않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수보리야! 네가 만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자는 모든 법을 없애고 난 후의 어떤 相이라고 그렇게 설한다면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어째서 그런가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자는 어떤 법에 의해서도 상을 단멸한다고 설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러니까 아! 여래는 일체 相이 없는 것이구나 다 끊어진 것이구나 거울 그 자체가 여래구나 라고 생각하지 말라 지금 그러시는 것이다. 相이 싸그리 없어져서 여래가 되면 우리 다 죽어야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몸이 있어야 된다는 소리다. 몸이 있어야 여래라는 말이다. 거울 그 자체<주관>를 찾는데는 거울 속 모습<객관>이 있어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객관은 주관으로 인해 객관이고 주관은 객관으로 인해 주관이다. 부처님이 도솔천에 계시다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相을 갖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여래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가 여기서 나온다. 모든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무단무멸이다.
○ 不受不貪分 第二十八
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何以故 須菩提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須菩提 白佛言 世尊 云何菩薩 不受福德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說不受福德
만약 어떤 사람이 갠지스 강 모래만큼 많은 양의 칠보로 보시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몸은 있지만 그 몸에 끌려가지 않고 무아를 깨달아 참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한 사람보다 훨씬 복이 많다고 하겠느니라. 왜 그런가 하면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자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었다. 어째서 보살들은 복을 지어놓고도 복을 받지 않습니까? 수보리야! 보살은 복을 지어놓고 나서도 과보를 받겠다는 그런 탐심과 집착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이게 바로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다. 법신은 거울 그 자체다. 거울 그 자체라 해서 과보로 받은 우리 몸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무시하란 말이 아니다. 이 몸으로 공덕을 많이 지어 깨달음을 얻되 그 깨달음의 덕택을 받는 것도 이 몸이고 복을 지어놓고 받는 것도 이 몸이지만 여기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복을 짓든 받든 모두 거울 속에서 일어나는 거울 속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복도 짓고 착한 일도 하고 모든 일 다 하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된 모습이 아니고 단지 몸을 받고 있는 그 순간의 일뿐 모두 허망된 일인 줄만 알라는 말이다. 고정불변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만 알면 그것이 보살이란 말이다. 한 마디로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다. 머무름이 없이 하란 말이다. 이것이 여래의 삶이다. 잠시 금강경 8분 의법출생분으로 돌아가 보자.
○ 依法出生分 第八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是故 如來說福德多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勝彼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須菩提 所謂佛法者卽非佛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한다면 이 사람은 얻은 바 복덕이 많다고 하겠느냐? 그렇습니다.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 보시를 하는 것은 복덕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경이나 이 경에 있는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 4구게를 알아 다른 사람에게 설한다면 그 복이 훨씬 더 많다고 하겠습니다. 모든 제불 부처님의 거울 그 자체의 마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법신에서 모든 경이 나왔느니라. 수보리야! 소위 불법이라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니라.
금강경의 6968자 반야심경의 260자엔 반야가 없다. 단지 글자일 뿐이고 언어일 뿐이다. 이처럼 복덕도 복덕 그 자체로는 복덕이 많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불수불탐분에서 득성어인 無我를 알게 되면 복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말씀하신다. 금강경 18분 일체동관분에서 부처님은 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悉地悉見 다 보고 다 알고 있다 말씀하신다. 집안에 강아지나 난초 키우시는 분들 많다. 말 못하는 개 키울 때도 내 입장 내 이익 내 견해만 갖고 강아지 대하고 맨날 때리고 훈련시키고 못 도망다니게 한다. 그러나 그것 다 내려놓으면 강아지 마음이 읽힌다. 내 욕심과 내 입장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내 입장 내 이익 내 욕심만 내려놓으면 상대방의 마음이 읽혀진다.
실지실견<悉地悉見> – 불법의 진리를 다 알고 다 본다는 뜻
자기 입장만 내려놓으면 다른 사람들 마음을 다 알고 볼 수 있다는 부처님 말씀은 아주 정확한 말씀이다. 내 입장과 유리함과 내 이익과 견해로만 본다면 그것은 1:1이다. 그러나 내 입장 내 이익 내 견해 내려놓고 복을 주게 되면 그것은 무한대다. 무량복덕은 그런 식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도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관세음보살 보문품 보면 무진의보살이 관세음보살에게 공양물을 바치니 하나는 석가여래에게 바치고 하나는 다보여래에게 바친다. 그렇게 석가탑 다보탑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그래야 일체 중생에게 다시 나간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님의 원래 원은 중생구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신비상분 불생불멸분 불수불탐분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핵심은 너의 이익 견해 생각 입장 다 내려놔! 그러면 왕창 들어와! 그것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 위의적정분이 된다.
無盡意보살<Aksayamatir-Bodhisattvah> - 위로는 다함없는 제불공덕을 구하고 아래로는 다함없는 중생을 제도한다.
멀리 있어도 빛나는 것이다. 위엄 있고 폼 나는 것이 부처님처럼 된다. 그런 것을 무량복덕이라 한다. 사실 우리 많이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는 훈련 자꾸하면 된다. 이제 무아도 알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도 알았다. 하지만 제대로 알았는지 보자. 27분 부수불탐분 보면 어떤 사람이 일체 법이 모두 무아임을 알아 자기 욕심 입장 견해가 드러나는 것을 참음으로 이뤄낸다면 이 보살의 복덕은 삼천대천세계만큼의 물질로 보시한 것보다 훨씬 많다 그런다. 구경무아 우리 제대로 아나?
○ 究竟無我分 第十七 구경무아란?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거울 그 바탕의 마음을 내려면 어떻게 머무르고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겠습니까? 선남자 선여인이 거울 본 바탕의 마음 진심 자리의 마음 원래 불성의 마음을 내려면 마땅히 이런 마음을 내야 하느니라. 내가 일체 중생을 다 제도했지만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느니라.
진심을 어떻게 내라는 말인가? 법신을 어떻게 내라는 말인가? 내가 일체 중생을 제도했지만 그 중생의 실체는 거울 속 그림자이기 때문에 내가 거울 속 그림자를 제도한 것이지 거울의 진짜 본 마음은 제도할 수 없는 것이니 그렇게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망을 제도한 것이지 진을 제도한 것이 아니다.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於燃燈佛所 有法 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 於燃燈佛所 無有法 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어째서 그러하냐 수보리야! 거울 본 바탕의 마음 진심 자리의 마음은 따로 얻는 방법이 없느니라. 수보리 어이운하 어째서 그러하냐? 내가 지난 생에 연등불 처소에 있을 때 진심의 자리 법신의 자리 불성의 자리를 얻는 어떤 방법이 있었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내가 부처님 말씀을 들어 해석해 보건대 부처님이 연등불에 계실 때는 진심의 자리 거울 그 자체의 자리 법신의 자리를 얻는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 阿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燃燈佛 則 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以 實無有法 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 燃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 釋迦牟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 向心의 마음 법신의 마음 거울 그 자체의 마음 불성의 마음은 따로 얻는 방법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여래가 거울 본 바탕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 있었다면 연등불은 나에게 수기를 내리면서 네가 다음에 석가모니가 될 것이란 수기를 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니라. 이런 거울 본 바탕의 자리 진심의 자리 법신의 자리는 없는 법이 없으므로 그래서 연등불이 나에게 수기를 내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다음 생에 석가모니가 될 것이다 그러신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거울 그 자체의 마음 법신의 마음 본성의 마음은 어떻게 얻는 것인가 하면 거울 속 그림자에 끌려가지 않음으로써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지 거울 그 자체를 부여잡는 방법은 없는 것임을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등불 당시에 이미 아셨던 것이다. 그것을 금생에 고타마 붓다로 태어나셔서 6년 수행하고 다시 알게 되신 것을 수보리 존자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바로 그것이다.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若有人 言 如來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如來所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 一切法 皆是佛法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왜 그런가 하면 여래란 세상이나 시대의 흐름에 거슬리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如義란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면 물결 치는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하는 것이다. 즐겁다고 해도 웃지 않는다 거나 힘들다 해도 힘들지 않다 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기간이 있고 깊이가 있기 때문에 다 지나가는 것임을 안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 감정이나 생각의 폭을 길게 잡거나 깊게 잡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이 卽諸法如義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거울 그 바탕 법신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야 법신자리 거울 그 바탕자리를 쥐는 방법은 없느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함은 우리가 분별로 생각하는 실함도 허망함도 없는 여여를 이른 것이다. 그래서 여래는 일체법이 모두 제불보살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법이란 것이다. 일체법이라 말하니 우리 중생은 일체법이 뭐 또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알고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찾던 통일장 이론인가? 그것만 알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다 되나 보다 이런 쓸 데 없는 망상을 둘까 봐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하는 것은 일체법이 아니고 다만 이름이 일체법이니라 그러시는 것이다.
수보리야! 몸이 아주 큰 사람에 비유해 보자. 세존이시여 몸이 굉장히 크고 장대한 사람도 사실은 크고 장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이름이 장대할 뿐입니다. 거울 속 그림자가 크다 작다가 있나? 거울 속 그림자가 귀하다 천하다가 있나? 거울 속 그림자가 부자다 가난하다가 있나? 거울 속 그림자가 잘 생겼다 못 생겼다가 있나? 단지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란 말이다.
구경무아 – 향심이 향 거울심이다.
須菩提 菩薩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 無量衆生 則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實無有法 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 說名 眞是菩薩
수보리야! 여래뿐만 아니라 보살 또한 그러하니라. 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무량 중생을 다 제도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보살이라 이름 부를 수 없느니라. 왜 그런가 수보리야! 보살이란 것도 실체는 어떤 법이 없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법이란 내가 너를 구제한다는 말에서 나란 것도 거울 속 그림자요 너도 거울 속 그림자요 구제한다는 것도 거울 속 그림자이기 때문에 주어 동사 목적어가 있는 것은 단지 말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고 거울 속 그림자의 장난일 뿐이고 번갯불 같고 이슬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 같다 말씀하시는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내가 불국토를 장엄하게 하겠노라 라고 말한다면 그는 보살이라 불릴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는 거울 속 그림자에다 절을 만 채 짓고 탑을 100만 채 지어봐야 거울 속 그림자일 뿐이고 단지 그 이름이 장엄하게 했다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마대사와 양무제 대화 중에 내가 절을 얼마나 짓고 탑을 몇 개 지었는데 내 공덕이 얼마나 되겠냐 물으니 無로 대답하는 것이다. 거울 속 그림자는 실제하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이 무아법에 통달하게 된다면 여래는 이를 일러 진실된 보살이라 하느니라. 보살은 다음과 같이 크게 3단계로 나눈다. 보살의 행을 배우기 이전의 경지에 있는 보살이 지전보살이다.
지전보살<地前菩薩> – 아직 10지에 이르지 못한 보살
지전보살은 여러분이나 저 같은 사람이다. 어느 정도 경지가 돼 지전보살이 되면 여러 중생을 많이 구제한다. 직원이 10만 20만이 되는 대 기업가들 다 보살들이다. 모든 직원들 마음 다 꿰 차고 있고 소비자들 마음 꿰 차고 있으니 보살이다. 돈이란 마음을 뜻대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서로 간에 단지 매개체만 월급이란 것이지 본질은 주고 받는 마음 아닌가? 또한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내것이란 생각 안 하고 보시하고 양보하는 테레사 수녀님이나 열반하시면서 몸을 기부하시는 법장스님 나라는 몸 이익 견해 입장에 집착하지 않는 그런 분들이 지상보살이다. 지상보살이 더 나가면 권연보살이라 해서 권세를 실제 나타나게 하는 보살로 약사여래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님이 그런 분들이시다. 보통 우리는 권현보살님께 기도해서 가피를 받는다.
지상보살<地上菩薩> – 보살수행 52단계 가운데 초지 이상의 자리에 있는 보살
권현보살<權現菩薩> -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신으로 화해 나타난 보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법에 통달하게 된다면 그런 이가 진짜 보살이니라. 이제 구경무아분 이해되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해되나? 단지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지 못할 뿐이지 행동은 어떻게 하라는 지침서는 이제 받은 셈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린 어떤 행위를 하면서도 옳다 그르다 잘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옳고 그른 것을 알고 하면 죄송합니다 옴살바 못다모시 사바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알고 한다는 것이다. 알고 하면 참회할 마음이 생기고 당장 보답 못해도 다음 기회에 그 사람에게 갚을 수 있다. 그러니까 쓸 데 없이 마음의 빚을 안 지고 살게 된다. 이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마음도 알게 됐다. 그러니 앞으로 잘 극복하고 살아야 된다.
發心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다.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발심이다. 그러니까 거울 속 그림자에 끌려다니는 그런 업의 마음이 아니라 불성의 마음을 한 번 내자 그것이 발심이다. 발심이 됐는지 안 됐는지에 따라 경계에 부딪쳤을 때 벌써 마음 씀씀이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게 발심하고 나면 목표가 있어야 한다. 발심은 불교신도들의 Mission이다. 공자님의 천명 같은 말이다. 이번 생에 사람 몸도 받고 부처님 법도 알았으니 발심해야 한다. 부처님 최고 가르침을 배웠으면서도 써먹지 못한다면 안 배운 것만 못한 일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런 용어 안다고 집 사람에게 잘못 쓰면 비웃음을 받을 수 있고 애들한테 쓰면 뭔 되도 않는 소리한다 할지 모른다. 세상 사는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말이 뭔 필요가 있나? 거울 그 자체의 마음 법신의 마음 그게 뭐 그리 필요한가? 그러니 바뀌어야 한다.
목표 Vision.
그 다음 목표가 있어야 한다. 불자들은 목표 세우기 참 좋다. 이 목표엔 시간이 개입된다. 아뢰야식 종자식 설명하면서 좋은 생각하십시요 좋은 말만 하십시요 나쁜 말 하지 말라 그랬다. 종자식은 기세간과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화를 내면 금방 몸이 영향을 받는다고 말씀드렸다. 기세간은 화엄성중 자연세계다. 기세간은 한자로 시간과 공간을 받는 그릇이다. 바로 산이고 강이고 물이고 마이크고 분필이고 지우개고 칠판이다. 아! 내가 전화기를 하나 만들어야지 라는 에디슨의 생각 내가 전구를 하나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기세간의 물질들을 조합시켜 발명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아 내가 터널을 뚫어 서울에서 춘천까지 30분만에 가게 해야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받는 그릇을 변형시킨 것이 터널이고 고속도로다. 그렇게 종자식이 다 작용한다.
기세간<器世間> – 중생을 受容하는 세간이란 뜻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산하 대지 등의 세계
3일 기도 49일 기도 100일 기도할 때 우리 아이 대학 합격 또는 몸 아픈 누구의 쾌차 그런 기도는 별도로 하고 불법을 공부한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면 비젼 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 비젼은 Visual 본다로 안목에 해당하는 말로 해석하고 싶다. 발성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에서 설정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안목이라야 한다. 가령 아이들이 대학 가야 하기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가야 하겠다 18평짜리 집 살다 35평짜리로 옮겨 어머니 관절염도 안 좋은데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게 해야 하겠다 그런 것이 다 비젼이다. 이것을 이루려면 일단 눈에 보여야 한다. 자기 스스로 그런 이미지 거울 속 그림자를 그려 넣을 수 있어야 한다. 관법수행처럼 굉장히 명확히 그려 넣을 수 있어야 한다.
관법수행 – 존재의 3 特上인 무상 고 무아를 직접적 통찰로써 깨닫는 것
눈을 감고도 자기 다니는 절의 관세음보살 모습이 딱 나올 때까지 염불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눈을 감아도 눈 앞에 현현하듯 그렇게 거울 속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서양의 재테크 책들 보면 눈을 감고도 다 보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자기가 원하는 돈 직위 집 자기가 가고 싶은 장소가 항상 현현해야 한다. 그래서 Concentration 삼매 집중훈련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절에 가 기도하면 애들 사진과 합격이 염염상속 될 수 있도록 Visual이 강한 상태가 돼야 이뤄진다. 눈으로 항상 볼 수 있을 정도로 하루 한 시간씩 100일만 하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비젼을 달성하는 데는 2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Who am I 내가 누구냐? 에 대한 분석이고 또 하나는 환경=기세간을 분석하는 방법이. 나도 알고 적도 알아야 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내가 +알파를 보태야 하는 것이 뭐냐? 또는 내가 버려야 할 나쁜 습관과 생각과 기억은 뭐냐? 경봉스님 서산 박첨지 놀이 인형극 할 때 어차피 몸도 생각도 다 우리가 아니다 야! 고정불변 된 너는 없으니 이 사바세계를 무대 삼아 열심히 한 번 놀아봐! 소심한 너 무식한 너 어리석은 너? 사실은 그런 것 없어. 남한테 아부도 나서지도 못하고 부끄럼도 많이 타고 배운 것도 없어요. 그런 것 없거든? 무아란 것 알고 연극하라니까? 그것이 서산 박첨지 놀이다. 그래서 자기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 저는 업장이 두터워서요. 누가 업장이 두텁다고 했나? 자기가 그러는 것이다. 업장도 거울 속 그림자다. 저는 배운 게 없어서. 그럼 배운 놈은 다 잘 사냐? 그러면 못 배운 놈은 다 못 살고 배운 놈은 다 잘 살아야 되냐? 네가 보기에 세상이 그렇든가? 고정불변된 너는 없어 그것이 나에 대한 분석이다. 하지만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기에 부품도 좀 갈아 끼우고 화장도 좀 고치고 멤버도 체인지 하고 내 마음 자세도 좀 바꾸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만 바뀐다고 다 되나? 겨울엔 눈이 오고 여름엔 비가 오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금리가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는 것이 금융시장의 섭리다. 그런데 나 하나 된다고 다 되냐 이 말이다. 그래서 나도 보고 환경도 보고 기세간도 봐야 한다. 그래서 세상 공부도 해야 하고 나보다 똑똑한 사람 나보다 많이 배운 사람도 만나야 하고 선지식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이다.
선재동자<善財童子> –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불교신앙의 모범적인 구도자
비젼이 크면 많이 바꿔야 하고 비젼이 작으면 몇 개 가지고도 할 수 있다. 내가 뭔가? 안이비설신의 6근이다. 환경이 뭔가? 색성향미촉법 6경이다. 6근과 6경을 잘 분석해 이 18계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지금이냐 다음이냐 안이냐 밖이냐 하며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불교신자들은 자기 분석만 하면 관세음보살이 나와서 도와주는 줄 안다. 분명히 도와준다. 그러나 고무줄을 확 당겼을을 때 도와주는 데 도와줬을 때의 모습을 자기 실제 모습이라든지 자기 복그릇이라든지 자기가 전생에 지은 공덕으로 받았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재산 다 말아 먹든지 몸이 아프든지 자식이 다치든지 하는 것이 사바세계의 정확한 섭리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주 정확히 작동한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얻어 고무줄이 팍 늘어나면 복을 엄청나게 지어야 한다. 트럭으로 방생할 정도로 복을 엄청나게 지어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다 갖다 버려야 할지 모른다. 실제 눈 밝은 사람들 실제 그런 일 생기면 집에 있는 책 다 교도소 갖다 주고 집에 있는 이불 다 갖다 양노원 나눠주고 한다. 그런 이들은 세상 이치 아는 사람들이다. 의사결정할 때 관세음보살님이 꿈에서 코치해 주시는 분들도 많다. 낮꿈이나 밤꿈이나 부처님은 같으니 꿈에 나타난다 해도 별 것 아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을 하고 나면 이젠 Action 행동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하면 다시 비젼으로 돌아가 아 내가 꿈을 너무 크게 잡았구나 하고 줄이고 늘리고 해서 나도 분석하고 환경도 분석하고 의사결정도 조금 눈 밝게 잘하고 행동해서 자꾸 바꾸고 바꾸고 하는 것이다.
무조건 너무 크게 하면 인생이 피곤하니 이번 생에 나의 건강과 나의 체력과 나의 시간과 기본적인 자산에 맞게 할 필요가 있다. 옛날엔 무엇을 하려면 토지 노동 자본이 필요했다. 이젠 다 필요 없어졌다. 인터넷 보면 이미 토지 노동 자본 필요 없이 다 된다. 인간 관계 밝은 마음 Network만 있으면 가상의 세계에서 다 된다. 그런 세상이 이미 왔는데 우리 스님들 하고 불자들만 여전히 모르고 있다.
33회. 우승택 금강경<법신비상분 무단무멸분 불수불탐분>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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