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불교경전

우승택 금강경 해설 제14회 <12.존중정교분(반야심경)>-2

淸潭 2011. 2. 19. 17:41

 

우승택 금강경 해설 제14회 <12.존중정교분(반야심경)>-2

 

반야에 들어가기 전 재가불자들이 꼭 알아야 될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존중정교분 한 번 더 한다. 첫째 깨달음을 위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처님 법이 도대체 뭐야 그런 분들이 금강경 공부한다. 정말 금강경 나온 대로 최상 제일 희유한 법인가 하며 상근기 분들이 공부한다. 두 번째 복덕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또 금강경 공부한다. 오랫동안 나도 기도 쪽에 Focus를 두었던 사람이다. 세 번째는 초파일 등 달고 부모님 돌아가시면 49재 하고 차에 염주 걸고 다니고 불교음악 나오면 좋아하고 그런 분들이 또 금강경 공부한다. 쌍계사는 법명을 주신 고산스님이 계셔서 갔지만 뵙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산사 저녘 예불시간에 행자 사미스님들이 저렇게 법고 종 운판을 치는 걸 듣고 도대체 저분들은 누가 들으라고 치는 걸까?          

 

심봉사 이야기할 때 말했다. 정말 내가 눈은 있지만 제대로 보고 귀도 있지만 제대로 듣고 입이 있지만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구나 생각했다. 그러니 장님 귀먹어리 벙어리다. 그것을 쌍계사 저녘예불 종소리 듣고 알게 됐다. 장님 귀먹어리 벙어리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을 금강경이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니 쌍계사에서 발심하고 온 셈이다. 스님들은 생활의 목표 자체가 깨달음이고 복덕은 방편으로 내려 앉은 사람들이다. 쌍계사는 소원성취 할 수 있는 데가 2군데 있다. 쌍계사에 혜능스님 육조정상탑이 있다. 육조스님 열반 시 미리 말씀하신다. 나 죽고나면 신라 중이 내 목을 떼 도망갈 것이다. 그래서 열반하시자 바로 목에 철사를 둘렀다는 말도 있다.

 

신라승 김대비가 육조스님의 목을 따서 도망가는 것을 잡았다는 중국 기록이 있다. 육조스님 두골은 금당이란 곳에 모셔져 있다. 금당은 아무나 못들어간다.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 나도 얼떨결에 3배 하고 나왔다. 육조정상탑 보면 탑 뒤에 손을 넣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빌면 한 가지 소원은 이뤄진다 해서 넣어 봤다. 그리고 법당 옆에 마애불 돌부처가 한 분 모셔져 있는데 대단하신 부처님이라 해서 기도도 했다. 기복불교 참선불교 이렇게 나눠 절에 가 기도한다면 Grade를 낮게 본다. 그래서 나는 12분을 더 좋아한다. 기도 성취하려면 자기 힘만으론 안 된다. 안 되는 줄 알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력으로 하겠다고 폼 잡는 모습이 우습단 말이다.

 

존중정교분의 일체 세간 천인 아수라 말했다. 이런 분들 도움없이 우리는 반야를 만날 수 없다고 금강경에 써 있다. 기도는 불교용어가 아니다. 불교는 원을 세운다 발원한다 그렇게 말한다. 언젠가 한 월간지에 이건희 회장 인터뷰가 나왔었다. 이회장은 일주일에 2~3권 정도의 책을 읽는데 한 번만 읽지 두 번은 읽지 않는다는 기사가 있었다. 요즘은 무슨 책을 읽으십니까? 일본 책인데 조그맣고 얇은 타력이란 책을 소개했다. 두 번 읽고 더 읽고 있다 그런다. 아마 삼성이 93년부터 신경영 하기 전일 것이다. 이런 분도 타력 다른 사람의 힘 다른 존재의 도움에 대해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암튼 우리는 일체 세간 천인 아수라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챙피한 것도 아니다. 저런 분들도 자기 힘이 아니라 남의 힘을 필요로 한다. 남은 부하 직원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신일 수도 있고 조상님의 은총일 수도 있다. 他力이란 책을 구하지 못하다 대신 일제강점기 72년 된 책을 구하게 되었다. 이 책의 원 소유주는 한 법사님이다. 독립운동도 하시고 감방에도 가셨던 분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일본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다. 당시 한암스님이 종정을 하시고 이 분은 초대 총무원장을 하셨었다. 대동아전쟁 때 너희도 비행기 한 대 내라 해서 조계종에서 돈을 걷어 기부했던 것 같다. 과거 독립훈장도 받으셨던 분인데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친일파로 분류되신 분이다. 이 분에 대한 연구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강원도 지암정사 주지스님께 他力이란 것이 뭔가요? 옛날 우리 스님이 보시던 책이 있는데 하시며 비단으로 만들어진 책을 한 권 주셨다. 중론과 타력신앙. 불교의 삼장 하면 경율논이다. 부처님 사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파가 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중관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세친과 마명의 유식학파다. 이 책 중론과 타력신앙을 어느 분이든 번역해 여러 사람들이 같이 공부했으면 좋겠다. 他力이 뭐냐? 일체 세간 천인 아수라이고 관세음보살이고 지장보살이고 약사보살이다.  

 

중론 - 용수<Nagarjuna 중관학파 Madhyamika의 창시자>가 지은 대승불교의 중심이 되는 논서

유식 세친<Vasuvandhu> 아비달마구사론. 마명<Ashvaghosa> 불소행찬의 저자

 

그러면 불교는 어떻게 타력의 도움을 받나?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을 지나 대웅전에서 부처님을 만나면 반야의 상태에서 소원도 얘기하고 깨달음도 얘기하고 비로소 부처님과 제불 보살님들과 대화가 가능해진다. 소원성취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계사라든지 도심에 있는 사찰을 보면 일주문이나 천왕문 같은 것이 없다. 그냥 들어가면 법당에 보살이 있고 왼쪽에 보통 신중단이 있다. 원래 사천왕 신장님들은 불이문을 통과 못해서 신장이다. 그러니 불이문 밖에 일체 세간 천인 아수라가 계신 것이다. 신중단 보면 칼 들고 계신 신장님이 계신다. 그분이 원각경에 나오는 보안보살이다. 눈 밝은 보살님이시다.

 

普眼보살 원각경에 부처님의 對告衆의 대표로 등장하는 보살   

 

보안보살님이 신중님들을 모시고 와 법당의 제불 보살님들과 불법을 공부하는 불제자들을 수호해 주는 것이다. 다음 대승불교의 정수 반야심경을 독송하겠습니다 하고 우리는 신중단에 절하지만 스님들은 안 하신다. 사실 기도를 성취하고 원을 이루게 해주시는 분은 부처님이 아니다. 부처님은 그런 데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다. 인과 사이에 연을 맺어주는 분이 바로 일체 세간 천인 아수라이신 신장님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장님 앞에 만원짜리 과일 놓는다고 해주나? 아니다. 신장님들은 불이문을 통과하지 못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우리가 공사상을 가르쳐주면 그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3법인 4성제 한 마디로 공사상이 담긴 반야심경을 읽어드리면 Give&Take로 그분들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법당 가면 부처님 만나 당장 무슨 결론 보려 하지 말고 신중님에게 먼저 인사하고 그 다음 부처님에게 하라. 신중님이 바로 他力이다.

 

그래서 발심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불자들 기도해서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불자들 그 다음 종교란에 불교라 적지만 일요일 산에도 가고 또 간혹 마음이 생기면 초파일 우란분재 때 등도 달고 하지만 불교는 너무 어렵고 무섭다 생각하시는 분들이 보통 불교음악 같은 걸 하신다. 나는 금생에 금강경을 널리 펼치고 싶은 것이 소원이다. 불교는 사랑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불교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는 분들에게 금강경이나 기도의 요령을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다. 방송이라 자세히 말씀은 못 드리지만 이런 타력을 얻어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금생에 성취하는 것이다. 기도는 어떻게 하나요?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옛날 스님들이 기도를 하실 때 발원을 세우신 다음 기도를 하시는 곳이 있다. 서울에 있지만 아무도 모르고 그냥 방치돼 있다. 그러나 옛날 스님들은 다 거기 가서 입재를 하셨다.

 

지난 시간 삶의 목표가 깨달음 즉 발심인 분들이 있고 그 다음 방편으로 돈이나 복덕인 분들이 계시다고 말씀드렸다. 기도처가 뭐 그리 중요하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옛날 눈 밝은 스님들이 그래도 업식의 기운보다 그래도 반야의 기운이 좋은 곳에 가서 뭘 해도 하셨다. 우리도 주변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전반적인 분위기가 달라진다. 도인 스님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들인가? 부모 자식도 버리고 금생에 내가 모두 이루겠다는 분들 아닌가? 그런 분들이 자리 안 따졌을까? 엄청나게 따졌다. 기도 성취되는 자리 다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분들이 다 찾아 놓으셨다. 18분 정도 하면 가르쳐 주겠다. 그러면 정말로 금생에 부처 되겠다는 소원만은 제외하고 왠만한 소원은 다 이뤄진다.

 

쌍계사 밑 녹차집에서 고명석 보살님을 뵙게 되었다. 불교음악 하시는 분이다. 귀향 산사의 노래 이런 노래들이 있다. 멀리 구례에서 불교음악 2곡 부르러 오셨다. 다 같이 박수!

 

108번뇌<최현군 작사 작곡>

염주 한 알 생의 번뇌 염주 두 알 사의 번뇌. 백팔염주 마디마다 님의 모습 담겼으니. 낭랑한 목탁소리 님에게 드리올 제. 풍경소리 허공에 울려 퍼지네. 산사에 홀로 앉아 백팔번뇌 잊으려고. 두 손 모아 합장하고 두 눈을 꼭 감아도. 속세에 묻힌 정을 어디에서 풀겠는가 달빛만이 서럽게 나를 감싸네. 구름 가듯 세월 가듯 천년 겁이 흘러 가면 나도 가고 너도 가련만. 님의 뜻을 알 길 없어 이리저리 헤매이다 이 밤도 지새는구나.                

 

애고 도솔천아 <정태춘 작사 작곡>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선말 고개 넘어 간다. 자갈길에 비틀대며 간다. 도두리 벌 뿌리치고 먼데 찾아 나는 간다. 정든 고향 다시 또 보랴. 기차나 탈거나 걸어나 갈거나. 누가 이깟 행차에 흥 난다고 봇짐 든든히 쌌것는가. 시름 짐만 한 보따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길을 막는 새벽 안개 동구 아래 두고 떠나간다. 선말산의 소나무들 나팔소리에 깨기 전에 아리랑 고개만 넘어 가자.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도랑물에 풀잎처럼. 인생행로 홀로 떠돌아 간다. 졸린 눈은 부벼 뜨고 지친 걸음 재촉하니 도솔천은 그 어디메냐. 기차나 탈거나 걸어나 갈거나 누가 등 떠미는 언덕 너머 소매 끄는 비탈 아래 시름짐만 또 한 보따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풍우설운 등에 지고 산천 대로 소로 저자 길로. 만난 사람 헤어지고 헤진 사람 또 만나고 애고 도솔천아. 기차나 탈거나 걸어나 갈거나. 누가 노을 비끼는 강변에서 잠든 몸을 깨우나니 시름짐은 어딜 가고.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빈 허리에 뒷짐 지고. 나나나 나나 선말 고개 넘어서며 오월 산의 뻐꾸기야. 애고 도솔천아 도두리 벌 바라보며 보리원의 들바람아. 애고 도솔천아. 애고 도솔천아.    

 

왜 이 노래를 같이 듣고 싶었냐 하면 일체 세간 천인 아수라들이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준다 그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체 세산 천인 아수라와 건달바가 보호해주는 경전이 있다. 그게 반야심경이다. 건달바는 음악의 신이다. 1977년 대학가요제 입상곡이 108번뇌 정태춘의 어허 도솔천아다. 지금 일체 세간 천인 아수라 건달바께 노래공양 하나 하고 그리고 우리는 타력으로 원하는 것을 받는다. 남은 시간 우리가 일체 세간 천인 아수라의 도움과 타력을 받기 위해선 그분들에게 뭔가 드려야 하는데 그것이 반야심경이다. 그러니 반야심경을 알고 드려야 한다. 다음은 달라이 라마께서 하신 반야심경 법문 내용이다.  

 

건달바<Gandharva> - 긴나라와 함께 제석천을 모시면서 음악을 담당하는 천신

 

반야심경

언젠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 부처님이 라자그리하의 영축산에서 많은 비구들과 보살들과 함께 앉아 계셨다. 그때 부처님은 심오함의 표현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현상삼매에 들어 계셨다. 그때 위대한 성자 관자재보살은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수행을 철저히 관찰하고 오온조차도 자체적으로 내재하는 실재를 갖고 있지 않음을 명확히 보았다. 부처님에게서 영감을 받은 사리자 스님은 위대한 성자 관자재보살에게 물었다.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고 싶은 고귀한 가문의 아들과 딸들은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이 말을 들은 위대한 성자 관자재보살은 사리자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리자여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는 닦는 수행을 하고 싶은 고귀한 가문의 아들과 딸들은 다음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오온조차도 내재하는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형상은 공성이고 공성은 형상이다. 공성은 형상과 다르지 않으며 형상도 공성과 다르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감정과 지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모두 공성이다. 그러므로 사리자여 모든 현상이 공성이다. 그것들은 규정된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그것들은 감소하지도 않고 증가하지도 않는다.

  

사리자여 위대한 존재인 보살들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야 한다. 그러자 부처님이 삼매에서 깨어나서 위대한 성자 관자재보살의 대답을 훌륭하다고 말하며 칭찬했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고귀한 불자여 그와 같다. 그처럼 해야 한다. 수행자는 방금 그대가 말한 대로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야 한다. 그리하면 여래들도 함께 기뻐할 것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했을 때 사리자 스님과 위대한 성자 관자재보살과 천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건달바 등을 포함해서 모든 청중이 부처님의 말씀에 함께 기뻐하고 환호하였다.

 

금강경은 일체 세간 천인 아수라뿐이지만 반야심경은 건달바 등이 포함된다. 이들이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범패도 하고 불교음악도 하는 것이다. 다 이유가 있다. 경전에 근거를 두고 하는 것이다. 암튼 우린 타력이 필요하니 신장님들께 반야심경 공양을 해야 한다. 관자재보살 관이 자재한 보살은 반야로 업식을 자재하게 들여다 본다. 금강경을 공부해 우리가 얻는 해탈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잘못된 감정으로부터의 자유인 심해탈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견해로부터의 자유인 혜해탈이다. 그래서 심해탈에서 탐과 진을 극복하고 혜해탈에서 치를 극복하는 것이다. 심해탈에서 복덕을 얻고 혜해탈에서 반야를 얻는 것이다.

 

心해탈 고요한 마음<>을 닦음으로써 얻게 되는 해탈. 탐진으로부터의 자유 복덕.     

慧해탈 통찰지<>를 닦음으로써 얻게 되는 해탈. 치로부터의 자유 반야.

 

이렇게 해탈하는데 관자재보살이 뭐가 자재하냐? 자기 마음 속에 또 하나의 나가 자기 마음의 업식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끌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보는 그 놈을 듣는 그 놈을 말하는 그 놈을 보라는 것이다. 아직 반야는 안 나왔다. 하지만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 반야의 상태에서 몸과 업식을 조견하니 다 비었더라 그래서 모든 업식을 다 넘어간다. 사리자야! 몸은 공과 다름이 없고 공 또한 몸과 다르지 않다. 몸이 즉 공이요 공이 즉 몸이라. 여기서 불교의 공은 연기이며 조건이 맞으면 생겨나고 조건이 없어지면 흩어지는 것이다. 천태종에선 공가중이라 말한다. 공이다 그러면 없다 가짜로 있다 그러면 있다 그래서 중도가 생기는 것이다.  

 

공가중 만물의 실상은 3가지 면. 공의 원리<공제> 가상의 원리<가제> 양쪽무차별의 원리<중제>

 

몸도 그렇지만 수상행식도 그렇다. 수상행식이 바로 업식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할 때의 색은 몸이고 수상행식은 업식이다. 그런데 몸도 공이고 수상행식<업식>도 공이다. 그리고 법이란 것도 모두 일시적으로 인연 따라 채워져 있는 것으로 공이다. 달마대사가 관심론에서 말했다. 법이 무엇인가요? 중생들 마음이니라. 떡 하나에 12개의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각자 자기 업식의 그림자대로 막 만들어 놓는다. 모든 물질이 다 그렇다. 이런 공한 상들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반야에서 보면 모두 업놀음이다. 간혹 큰 스님들 야! 업놀음 그만 해 그러신다. 우리는 거기에 안절부절 하지만 다 업놀음이란 것이다.

 

그러니 공중무색 다 공한 상태다. 연기로 일시적으로 있는 것이다. 무수상행식 몸도 없고 업식도 없는 것이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쌍계사에서 저녘 예불 듣다 아! 내가 벙어리 구나 내가 보지도 못하는 구나 내가 듣지도 못하는 구나 생각했다. 기껏해야 내 귀엔 땡땡 소리밖엔 안 들린다. 보는 것도 스님들 하는 것밖에 못 본다. 그러나 그 스님들은 우주법계의 보이지 않는 존재들께 공양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소리를 못 들으니 난 귀먹어리요 봐도 제대로 못 보는 장님이다. 그러면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12연기 다 부정했다. 그리고 무고집멸도 신장님들께 반야심경을 공양 올린다.

 

불교는 계정혜 3 3법인 4성제 중요하다. 고집멸도 부처님이 정확히 말씀하신다. 나는 고를 알았노라. 나도 벙어리인 줄 귀머거리인 줄 장님인 줄 잘 안다. 그러나 주식시장에서 남 돈 가지고 잘 못한다. 집 나는 집을 끊었노라. 멸 나는 멸을 얻었노라. 나는 도를 행했노라. 그런데 사실 이 말도 업놀음 상태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반야의 상태는 아니란 것이다. 나중에 13분 가면 반야도 부정된다. 그러니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죄도 없고 얻음도 없다. 보리살타는 업식이나 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관자재보살은 바로 반야에 의지하니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궁극적으로 구경열반이다. 일단 반야가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관자재보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3세 제불도 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우리 목표는 깨달음이다. 복덕은 방편이다. 고지 반야바라밀다 그러니까 반야를 알라.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그래야 벙어리 면하고 귀머거리 장님 면하고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주문은 진실불허 진실하고 헛되지 않다. 그래서 고설반야바라밀다 즉설주왈 반야바라밀다 주를 설하니 그 주문이 바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다. 매일 아제아제만 외우고 다니다 큰 가피 받은 적도 있다. 반야의 힘을 증장시켜 주는 주문이다.               

14. 우승택 금강경<존중정교분2 반야심경>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