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漢詩

칠석(七夕) /옥봉(玉峰) 이숙원(李淑媛)|-28

淸潭 2010. 8. 17. 09:56

출처;음악정원

글쓴이;사맛디

 

한시의 산책







      - 칠석(七夕)
      - 옥봉(玉峰) 이숙원(李淑媛) 無窮會合豈愁思 不比浮世有別離 무궁회합기수사 불비부세유별리 天下却成朝暮會 人間謾作一年期 천하각성조모회 인간만작일년기 끝 없는 만남이니 무슨 시름 있겠는가 인간 세상의 이별과는 비할 수 없다네 하늘에선 아침 저녁으로 만날 수 있건만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 만난다 잘못 안다네 은하수는 일 년 내내 볼 수 있지만 특히 여름밤 은하수는 밝은 별이 모인 은하계의 중심에 있어서 더 빛나 보인다. 은하수 동쪽 기슭에 사는 천제(天帝)의 딸, 직녀(織女)는 베 짜는 일에 몰두한다. 천제는 그런 딸을 가엾이 여겨 은하수 서쪽 기슭에 사는 소치는 젊은이 견우(牽牛)와 혼인시킨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이가 너무 좋은 나머지 일을 게을리하게 된다. 화가 난 천제는 두 사람을 다시 은하수 양쪽 기슭으로 갈라놓고 1년에 한 번, 7월 초이렛날 밤에만 오작교를 놓아 둘의 만남을 허락한다. 1년에 오직 한 번밖에 만날 수 없는 연인,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켜 사랑을 받는다. 푸른 밤하늘에 마치 함박눈 같은 크고 작은 별이 흩어져 있다. 별 하나, 별 둘.. 별을 헤다 보면 김광섭의 시가 거기에 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견우와 직녀 해후의 기쁨이 눈물이 비가 되어 칠석날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 옥봉(玉峰) 이숙원(李淑媛):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옥봉. 군수를 지낸 이봉지(李逢之)의 서녀이다. 신분이 미천한 때문에 조원(趙瑗)의 소실이 되었다. 15세에 출가하여 40세 전에 임진왜란을 만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옛 관습으로 보면 급제하기 전에 부실(副室)을 두는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조원도 급제 후에 옥봉을 맞아들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계년(笄年)이 15세이므로 죽은 나이는 대략, 35세 안팎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원이 문과에 급제한 것이 1572년(선조 5)이고, 임진왜란은 이보다 20년 후인 1592년에 일어났다. 옥봉이 남긴 시는 모두 32편으로, 1704년(숙종 30)에 조원의 현손인 정만(正萬)의 손에 의하여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끝에 부록으로 편입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게 되었다. 옥봉의 시는 거의 대부분 이별을 주제로 읊은 시들이다. 이 가운데 〈규정 閨情〉, 남편에게 보낸 〈증운강 贈雲江〉 등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재치와 기교가 섬광처럼 교직(交織)되어 있다. 허균(許筠)은 《학산초담 鶴山樵談》에서, 그녀의 시가 매우 밝고 강건하여 자못 부인의 화장기 나는 말이 아니라 하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에서도 그녀의 시는 맑고 건장하여 화장기가 없다고 하여 시경이 여성답지 않고 높음을 극구 칭찬하였다. 또, 신흠(申欽)은 “근래 규수의 작품 중 승지 조원의 첩 이씨가 제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홍만종(洪萬宗)도 《시평보유 詩評補遺》에서, 〈춘일즉사시 春日卽事詩〉가 만당의 조격(調格)이 있다고 칭찬하였고, 《소화시평 小華詩評》에서는 “(사람들이)조원의 첩 옥봉이씨를 조선제일의 여류시인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으로 이미 당대에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너무 지루할 것 같아 차차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