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부처님 마음

[천불만다라] 99. 담마딘나의 무소유

淸潭 2010. 2. 6. 14:38

[천불만다라] 99. 담마딘나의 무소유
탐욕에 눈멀면 분명한 대상도 거꾸로 보인다
기사등록일 [2010년 02월 02일 17:07 화요일]
 
앞에도 뒤에도 중간에도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빈손으로 집착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수행자라 부른다.
                            - 『법구경』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조계사 원심회 김장경 회장

위의 게송은 부처님께서 담마딘나(Dhammadinnā, 法施)비구니를 칭찬하신 말씀이다. 담마딘나는 『아라한구덕경』에서는 시법(施法) 비구니로 번역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죽림원에 계실 때 담마딘나는 부호 위사카의 아내였다. 위사카는 신심 있는 재가 신자로서 부처님의 설법을 경청하고 보리심을 발하여 아나함과의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아나함과를 성취하고 성자의 반열에 오른 위사카는 세속적인 욕망이 모두 소멸하게 되었다. 재산에 대한 탐욕도 아내에 대한 애정도 사라지고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열반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밖에서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위사카의 전과 같지 않은 행동을 눈치 챈 담마딘나는 남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남편 재산 마다하고 무소유로 출가

남편 위사카는 자신은 이미 옛날의 위사카가 아니며 열반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로서 자신의 재산을 모두 아내인 담마딘나에게 주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담마딘나는 남편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자신 역시 출가수행의 길에 나아가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편이 준다고 한 재산에 대하여 ‘당신이 뱉어 버린 침(재산)을 나 또한 받아 지니고 싶지 않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 길로 부처님 교단에 출가하여 담마딘나 비구니가 되었다. 남편의 재산까지도 물리쳐 버리고 철저한 무소유로 수행에 임했던 담마딘나 비구니를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으로 칭찬하셨던 것이다.

담마딘나 비구니의 이야기는 『증일아함경』과 『아라한구덕경』 등에 제일비구니의 경문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 담마딘나 비구니는 다른 비구니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수행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성자비구니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깨달음을 완성한 담마딘나 비구니는 옛날에 인연 있던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향 라자가하로 돌아왔다.

위사카는 옛 아내 담마딘나 비구니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찾아갔다. 위사카는 아내가 아닌 비구니로 담마딘나를 공경 예배하고서 부처님 법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고 담마딘나는 잘 해설해 주었다. 그래서 경전에는 ‘진리의 뜻을 잘 분별하고 모든 법의 부분을 널리 설하는 것이 제일인 비구니(分別義趣 廣說分部)’, 또는 ‘능히 묘법을 방편으로 잘 알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能於妙法 善巧敷宣)이 있는 제일의 비구니’라고 찬탄하여 기록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여성들도 거침없이 출가수행자의 길에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각 분야의 제일의 비구니로서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 담마딘나 비구니의 경우는 무소유(無所有)의 수행과 자신이 모든 이치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남에게도 잘 이해시켰던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소유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린 맑은 모습이다.

세상에 욕심이 없으면 눈에 가렸던 혼탁함이 걷히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의 이치를 밝게 비추어 볼 수가 있다. 탐욕에 눈이 어두우면 눈앞에 분명한 것도 거꾸로 보기 쉽기 때문이다. 담마딘나 비구니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일지감치 물질의 소유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상의 이치를 밝게 비추어 보는 진리의 소유자가 되었던 것이다.

수행-성불엔 남녀 차별 없어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부터 진리의 길에는 남녀의 차별도 없었고 빈부의 차별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므로 출가수행자에게 동일하게 요청되었던 것은 무소유의 실천이었다. 소유는 욕망에서 기인하고 있는데,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오욕(五欲)이라고 한다. 오온으로 구성된 자신의 허망한 몸이 끝없이 욕구하는 것이 이 오욕락인 것이다.

다섯 가지의 욕망이란 재물과 색정(色情)과 음식과 명예와 수면(睡眠)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불교는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다. 담마딘나 비구니가 성취했던 것과 같이 오욕의 욕망을 내면으로부터 벗어던지는 일이다. 그리고 우주에 가득한 진리로 자신을 한껏 채우는 일에 몰두하면 되는 것이다. 재물을 던져버린 담마딘나는 무소유의 진리로 자신을 채웠다. 남편과의 색정을 벗어난 담마딘나는 청정함으로 자신을 채웠다. 음식을 탐닉하는 욕망을 벗어난 담마딘나는 거리를 돌며 걸식으로 하루의 허기를 채웠다. 헌신짝처럼 세상의 칭찬과 명예를 던져버린 담마딘나는 오히려 진리의 전당에 그의 이름을 채웠다. 불철주야 정진에 임했던 담마딘나는 오늘 날에도 쉬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시끄럽지 않고 떠들썩하지 않는 종교이다. 연약한 중에 힘이 넘쳐흐르고 고요한 속에 크나큰 웅변이 있다. 산골짜기 계곡을 타고 흐르면서 물길이 끊어졌는가를 의심하면 어느새 폭포에 이르고 멀리 바다로 향하는 포구가 보인다. 바다에 이른 골짜기의 물은 이미 골짜기의 물이 아니라 온통 하나의 바다가 되어 넘실거릴 뿐이다. 중생세계에 뭇 생명이 함께 공생하는 가르침이 곧 불법(佛法)이어야 한다. 담마딘나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차별을 없애고 소유의 탐욕에서 벗어나서 함께 바다에 이르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도록 서원해야 한다. 연약한 몸으로 부처님의 제일 비구니에 이름을 올린 담마딘나에게 경배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1034호 [2010년 02월 02일 1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