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서예실

御製御筆과 寫字官

淸潭 2010. 1. 17. 15:04

 

 

궁궐은 왕을 나타낸 鳳과 왕비를 뜻하는 凰을 그린 <鳳凰圖>로 장식되었고, 임금님 용상 뒤에는 <日月五嶽圖>가 펼쳐져 해, 달 ,산, 솔, 물의 천계·지계·생물계의 영구한 생명력을 표상하여 왕의 지고한 권위를 드러내었다. 이만큼 임금은 지엄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왕조시대의 왕은 권력의 정점이고 모든 권위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같은 科擧인데도 임금이 있는 자리에서 보는 과거는 御試 또는 殿試라 하여 더욱 영예롭게 여겼고, 임금이 직접 살피거나 읽은 글은 御覽이라 하여 한 수 위의 작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심지어는 后妃가 왕의 잠자리를 모시는 일도 御見이라 하여 임금님을 한번 뵈오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홍패나 백패만이 아니라 告身에 科擧之寶나 施命之寶의 옥쇄가 찍힌 경우에도 이를 존숭하여 붉은 색이나 흰색의 종이나 비단을 붙여 함부로 볼 수도 없게 하였고 손을 씻고 배례를 한 후 들추어 보게 하기도 하였다.

하물며 임금이 손수 짓고 몸소 쓴 어제어필은 그 가치가 또한 절대적이었다.

연전에 부산박물관 수장의 『御前濬川題銘帖』과 동아대박물관 수장의 『耆英閣詩帖』을 조사할 기회를 가졌는데 모두 앞 부분에 어제어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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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2)『御前濬川題銘帖』<水門上親臨觀役圖>·<暎花堂親臨賜膳圖>,1760년, 34.2×22.0cm, 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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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3·4·5)『御前濬川題銘帖』<御製御筆>, 1760년, 34.2×22.0cm, 부산박물관

 

『어전준천제명첩』(영조36년)의 어제어필은 ‘濬川功訖 卿等竭誠 予聞光武 有志意成 面賜濬川 諸堂以示 嘉尙仍命 勿謝’[준천의 공역을 끝마쳤음은 경들이 정성을 다 함이었다. 光武帝가 뜻만 있으면 마침내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준천제당을 마주하여 포상을 내리니 가상함으로 사양하지 말아라]라는 명령으로 黑彩를 한 바탕에 백색안료로 쓴 것이며, 뒤 이어 ‘濬川堂卽試射日聯句 令入侍大臣試官濬堂 承史?韻 「于今濬成 臣民效力 須將此誠 一施軍國」’[준천당에서 試射日에 글을 잇도록 하여 입시한 대신과 시관, 준천당 承史들에게 같은 韻으로 글을 짓게 하라.

「지금에야 준천공사가 완성되니 신하와 백성이 힘을 다 한 결과이다. 부디 이 정성으로 한번 강한 나라를 세워보세」]라는 영조의 御製詩가 백지에 묵서로 실려 있다. 이 시의 力자와 國자를 운으로 4언시를 이어 지었는데 입시관원의 題辭가 부산박물관본은 16명이지만 데라우치본은 27명임으로 보아 적어도 왕이나 궁궐에 들이는 內入帖을 감안 할 때 30본 가까이 제작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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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6·7)『耆英閣詩帖』, 1763년, 45×35cm, 동아대박물관

 

『기영각시첩』(영조40년)은 영조의 어제어필로 ‘「耆英閣前 七旬君臣」’[기영각 앞의 7순의 임금과 신하]란 어제시를 연구하여 耆老臣 11인이 4언시를 각기 지어 이은 것으로 참석한 기로신이 11인임에 비추어 화첩은 십 수본 제작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많은 어제어필을 바쁘신 임금이 팔 아프게 낱낱이 다 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붓으로 쓴 글씨가 모두 인쇄된 듯이 똑 같은 글씨로 되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체로 어제어필이 현판이나 주련으로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면 종이나 천에 쓰인 경우는 앞서와 같이 흑지나 감지에 백색안료로 쓰는 경우와 종이에 바로 묵서된 것이 대부분이다. 백색안료는 대체로 胡粉이라 통칭되는데 실상은 鉛粉과 蛤粉(貝殼胡粉) 외에도 白堊, 高嶺土, 水晶末, 方解末 등이 사용되었으며 이밖에도 雲母, 烏賊骨 등이 대용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鉛粉을 즐겨 쓰다가 15-16세기를 전후하여 蛤粉을 널리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로는 혼합하여 사용한 예도 있었는데『어전준천제명첩』의 어필은 다소의 반연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연분이 혼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호분은 접착력이 없어 바로 칠해지지 못하여 소가죽을 끓여 만든 갖풀[阿膠]나 민어 부레를 고아 만든 부래풀[魚膠]에 개어서 칠해야 하기에 먹물로 종이에 하는 붓질과는 그 마찰력이 비교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호분은 획을 그어 글자가 완성되기 보다는 여러 번 가칠을 하여 필체를 만들어야 하기에 숙련을 필요로 하는 이 작업을 왕께서 직접 하시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 『기영각시첩』의 어제어필은 비록 묵서이기는 하나 이마저도 필체의 윤곽을 먼저 그린 후 그 안에 여러 번 가칠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러 벌을 제작해야 하는 어제어필에 있어 내입첩인 왕의 손수 글씨를 모본으로 하여 오늘날 복사본과 같이 모두 書寫官 또는 寫字官이 대필하여 임금님 글씨를 그대로 베껴 제작한 것이다.

조선시대 사자관은 승문원·규장각에 소속되어 事大交隣文書와 咨文, 御牒, 御製, 御覽 등의 문서를 正書하고 淨書하던 관원이었다. 이들은 국가주요문서를 남기는 일을 담당하였기에 반드시 善寫者여야 하였으므로 당상관이나 문신이 아니더라도 寫字에 특이한 재능이 있는 자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

이렇듯 서사관의 임무는 막중하여 수령을 거치지 않더라도 4품 이상의 관계로 승천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으며 문신으로서 글씨를 잘 쓰는 자에게도 군직을 주고 매일 근무하게 하였는데 당대의 명필이었던 石峯 韓濩도 대표적인 문인출신의 사자관이었다 한다.

특히 문관으로 사자관을 맡는 경우를 서사관이라 하는데 寶篆書寫官, 敎書書寫官, 御製序文書寫官, 玉冊書寫官 등으로 각기 맡은 일이 세분되기도 하였다.

『어전준천제명첩』과 『기영각시첩』은 영조 후반기에 제작되었는데 이때의 실록에 사자관에게 米布를 題給한 기사나, 상을 내리는 기사가 빈번하게 있는 것으로 보아 왕께서도 이들의 노고와 실력의 우수함을 인정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조 29년에 서사관인 洛豊君 李楙와 洪啓禧에게 熟馬 한 필씩을 面給한 것으로 볼 때나 『어전준천제명첩』에 홍계희가 준천 당상으로 참여한 것으로 미루어 그의 노고가 곁들어진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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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8) <御製御筆> 1593년(선조26), 55.5×75cm, 부산박물관
 

이 밖에 부산박물관 전시물로 선조의 어제어필로 삼남순무사 박경신에게 칼 한 자루와 군복 한 벌을 하사하는 고문서가 있다. 임진왜란이란 전쟁중에 왕이 피난처에서 소소한 정령이나 하사물을 보내는 글을 직접 짓고 큰 글씨로 150자에 가까운 글자를 틀리지 않고 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왕에게는 知製敎라는 벼슬아치를 두어 왕의 이름으로 내려지는 敎書나 諭書를 지어 바치는 일을 담당케 하였다. 知製敎는 국초에는 승정원이나 사간원의 관원이 겸임하다가 집현전이 설치되고는 집현전 학사가 맡기도 하였으며 집현전이 혁파된 뒤에는 대개 홍문관의 부제학이하 부수찬까지가 겸임하였다.

일반적으로 왕의 뜻을 받들어 이들이 지은 글을 보정하여 어제가 되었던 것이다. 난리 가운데 변방의 최일선의 장수에게 왕의 도타운 은혜를 표하기 위해 어제어필로 하였으나 실상은 완전한 임금의 문장과 글씨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 같은 어제어필은 친필본에 비해 대필의 手製 복사본이 다수 전해지고 있으나 임금의 뜻을 전하는 경중에 차이는 없다고 할 것이다. 조선시대 권력의 정점이었던 임금의 어필을 베끼는 무례하고도 영광스러운 일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사람은 아마 사자관뿐이었을 것이다.


 

▲ 문화재청 부산국제여객부두 문화재감정관실 이현주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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