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古典散文 271

비슷해도 괜찮아

비슷해도 괜찮아 ‘세상엔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받기 쉽다.’ 영화 속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이다. 나는 박지원의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영화 완벽한 타인의 이 대사가 떠올랐다. 박지원은 「녹천관집서」를 통해서 당시 사람들의 ‘글 짓는 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더 나아가 ‘우리의 삶’ 혹은 ‘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박지원은 이 글에서 옛글을 모방하여 글 쓰는 것을 마치 거울에 비친 형체, 물에 비친 형체와 그림자의 형체처럼 모두 ‘진짜와 매우 닮은 것’, ‘진짜에 아주 가까운 것’일 뿐 진짜가 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였다.(倣古爲文 如鏡之照形 可謂似也歟 曰左右相反 惡得而似也 如水之寫形 可謂似也歟 曰本末倒見 惡得而似也 如影之隨形 ..

달은 그저 달일 뿐이지만

달은 그저 달일 뿐이지만 보는 것은 똑같은 달이어도,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 所見同一月 人情自殊視 소견동일월 인정자수시 - 이수광(李睟光, 1563~1628), 『지봉선생집(芝峯先生集)』16권 「견월사(見月詞)」 ………………………………….. 달은 예로부터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인류가 달에 착륙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달이 지구의 둘레를 도는 천체라는 사실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여전히 우리를 신비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계수나무 아래에서 떡방아를 찧는다는 달 토끼는 전래동화에 단골손님으로 자주 등장한다. 불사약을 훔쳐 먹고 달나라로 도망가서 두꺼비가 되었다는 항아(恒娥)의 이야기는 『회남자(淮南子)..

나의 이름은

나의 이름은 요사이 방송가의 가장 큰 화제는 단연 ‘부캐’이다. 본디 온라인 게임 용어로, 주로 가동하는 캐릭터라는 의미의 ‘본캐’ 이외의 보조 캐릭터를 가리키는 말이다.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한 인물을, 프로그램 내에서 진행되는 에피소드에 따라 예닐곱 가지의 ‘부캐’로 설정하여 각각 이름을 달리 주고 그에 맞는 역할을 부여한다. 에피소드에 따라 유명 인물을 패러디하기도 하고 시청자들의 의견을 받아 새로운 이름의 인물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어느 ‘부캐’로 분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분장과 의상처럼, 해당 인물은 캐릭터에 녹아들어 연기하면서 역할을 수행해나가고, 이는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웃음을 준다. 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부캐’ 열풍은 점차 확산되고 있고 당분간 방송가의 유행이 될 듯하다. ‘부캐..

옛사람의 글 지어주는 법

옛사람의 글 지어주는 법 북송(北宋) 때 문장의 대가인 구양수(歐陽脩)는 절친한 벗 윤수(尹洙)가 죽자 「윤사로묘지명(尹師魯墓誌銘)」을 지었다. 그런데 윤수의 가족과 문인들은 구양수의 묘지명이 지나치게 간략하다고 불만을 표시하며 다시 지어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에 구양수는 약간의 내용만 보충한 채 자신이 그렇게 지은 까닭을 따로 저술하여 윤수의 집안에 보냈다. 그 글이 바로 「논윤사로묘지(論尹師魯墓誌)」이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보건대 한퇴지(韓退之)가 맹교(孟郊)에게 준 연구(聯句)는 맹교의 시와 흡사했고, 번종사(樊宗師)의 묘지(墓誌)를 지을 때는 번종사의 문장과 흡사했으니, 한퇴지가 그들을 사모함이 이와 같았다. 내가 윤사로의 묘지를 지을 때 의미를 특히 깊게 하고 말은 간..

모든 순간이 나의 깨달음이 되기를

모든 순간이 나의 깨달음이 되기를 이 세계 속에서 우리는 모든 만물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나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만물에 감응해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어떤 일, 어떤 사람, 혹은 무언가에 의해 내 마음이 즐겁기도 슬프기도 또 화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마음은 만물에 좌우되고 마는 수동적인 존재인 것 같다. 그렇긴 해도 때로는 만물을 고요히 관찰하다 보면 특별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이름 모를 작은 풀이 아스팔트를 뚫고 자라나거나 붉은 매화가 눈보라 속에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고난 극복의 다짐을 상기한 것 등이 그러하다. 얼마나 만물을 잘 관찰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수동적이냐 주체적이냐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만물을 잘 관찰하려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당장 굶어죽..

구더기는 똥을 좋아한다

구더기는 똥을 좋아한다 올해 팔순인 모친께서는 두 가지 취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불경(佛經) 읽기와 베껴 쓰기이다. 왕복 다섯 시간 거리에 있는 절에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때마다 다녀올 만큼 독실한 불자이니, 어쩌면 이는 당연한 취미인 것도 같다. 그런데 이 독실한 신앙도 제쳐놓을 만큼 중요한 취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WWE라고 불리는 미국 프로레슬링 프로그램 시청이다. TV에서 이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읽고 있던 불경과 베껴 쓰던 사경(寫經) 노트도 거실 한 구석으로 슬며시 치워두고 레슬링 시청에 몰두한다. 모친에게 레슬링 시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금만 더 설명하도록 하자. 우선 등장인물이다. 선수 이름을 본인 방식으로 바꿔 부른다는 단점(예를 들면 ‘존 시나(John Cena)’라는 선수를 ..

당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한 송이 꽃이 되기를

당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한 송이 꽃이 되기를 “It's me 나예요 다를 거 없이 / 요즘엔 뭔가요 내 가십 / 탐색하는 불빛 / 오늘은 몇 점인가요? / 쟤는 대체 왜 저런 옷을 좋아한담? / 기분을 알 수 없는 저 표정은 뭐람? / 태가 달라진 건 아마 스트레스 때문인가? / 걱정이야 쟤도 참” 2018년에 온 국민이 아는 유명 가수가 직접 작사하고 부른 노래 가사 중 일부이다. 처음에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노래 가사보다 후렴구 멜로디가 좋아서 즐겨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2019년 10월 이 가수와 친하기로 소문난 연예인이 악플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가 온종일 매스컴을 뒤덮었다. 기사를 보고 다시 이 노래를 찾아 들었을 때 노래의 멜로디가 아니라 가사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가사들이 주..

평구리 음사사건과 가짜뉴스

평구리 음사사건과 가짜뉴스 인간은 누구나 인지와 감정에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 천하 부귀도 사양할 수 있고, 서슬 푸른 폭압에도 맞설 수 있지만 중용(中庸)은 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은 인간의 편향성에 대한 성찰을 환기시킨 경구(驚句)이다. 인지와 감정의 편향성은 상황 해석과 기억의 왜곡으로 귀착된다. 그런데 인간은 정작 스스로 편향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기억을 참으로 여긴다. 때문에 편향성이 집단적으로 작동하면 그 어떤 거짓과 조작도 정당화된다. 역성혁명의 승자가 역사를 조작하고 신념에 찬 학자들이 경전을 위조하는 것도 요즘 사회 일반에 자주 회자되는 가짜뉴스 생성의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다. 몇 해 전 옥스포드사전은 세계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한 적이 있거니와 가짜뉴스..

나 같은 사람도 괜찮겠지

나 같은 사람도 괜찮겠지 정란은 산에 미친 사람이었다.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덕유산, 속리산, 태백산, 소백산, 이밖에 전국의 명산을 두루 등반했다. 백두산은 정상까지 올랐고, 금강산은 네 차례나 올랐다. 정란의 생애는 안대회 교수의 『벽광나치오』(휴머니스트, 2011)에 자세하다. 정란은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여행을 자랑하며 글과 그림을 받았다. 채제공(蔡濟恭), 이용휴(李用休), 강세황(姜世晃), 최북(崔北), 김홍도(金弘道), 이들의 글과 그림 덕택에 정란의 존재는 잊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정란의 글은 전하는 것이 별로 없다. 『유산기(遊山記)』라는 여행기를 남겼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김홍도의 자택을 그린 에 적어 넣은 짧은 시 2편이 남아 있지만, 여행과는 관련이 ..

바름을 해치는 자

바름을 해치는 자 이 글은 조선 말기의 문인인 혜강(惠岡) 최한기의 『인정』 「측인문」에 실린 문장이다. 『인정』은 일종의 정치 에세이로, 정치에 있어서 사람을 감별하고 선발하는 원칙을 제시한 책이다. 당대의 위정자(爲政者)를 염두에 두고 기술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과 인간 사회의 본질에 관한 통찰이 두루 담겨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 비추어 볼만 한 점이 적지 않다. 이 문장도 그렇다. 오늘날의 숱한 비리와 범죄, 차별과 혐오, 재난과 참사 앞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악인(惡人)으로 몰아 희생양을 삼고, 자신은 바르다고 자처함으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며, 나아가 합심해서 그것이 공론(公論)인 양 여론을 조성한다. 그러나 비리는 과연 권력자의 전유물인가. 범죄는 과연 범죄자의 일탈에서만 기인하는가.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