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책 속의 향기

사랑이 없다면 이 비극을 어떻게 견딜까

淸潭 2007. 1. 20. 11:36
사랑이 없다면 이 비극을 어떻게 견딜까
 
낯선 사람들

김영현 장편소설|실천문학사|304쪽|9800원
▲김영현은“도스토옙스키 풍의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사진=실천문학사 제공
지방 소도시의 마을금고 이사장 출신인 수전노 최문술이 집에서 살해 당한다. 경찰은 최문술의 전처 소생인 큰 아들 동연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아버지의 눈밖에 났던 그가 유산을 미리 떼어 달라고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동연이 진범일까. 소설은 최문술의 둘째 아들이자 카톨릭에 귀의한 예비신부인 성연이 형의 범행을 의심해 사건을 재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 소설은, 1990년대 ‘참여문학 논쟁’의 한 복판에 섰던 작가 김영현이 선보인 추리소설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살인의 현장에서 시작되는 긴박감은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고, 전생의 업보같은 범행의 동기가 드러날 때까지 독자의 눈을 놓아주지 않는다.

대중적인 통속소설에 백기투항한 것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그러나 최문술의 과거 행적이 밝혀지며 인간의 욕망과 원죄,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자리잡은 신성함이 충돌하는 진지한 인간 내면의 드라마로 탈바꿈한다.

소설은 최문술의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주목한다. 그의 시신을 가장 먼저 목격한 최문술의 두번째 부인 성경애는 전처의 자식들에게 남편의 유산이 가는 것을 두려워해 전처의 큰 아들인 동연을 범인으로 몬다. 성경애의 집요한 이간질로 인해 최문술은 이미 동연과 부자의 인연을 끊고 집밖으로 아들을 내쳤다. 동연은 계모에 속아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다. 성경애의 증언으로 살인범의 누명을 썼으면서도 동연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내가 살인범”이라는 거짓 자백을 한다.

동연은 어째서 한사코 스스로 죽으려 하는 것일까. 성연은 범행의 동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밝혀낸다. 동연은 어려서 그 집에 맡겨진 뒤 훗날 식모가 된 강연옥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와 우연히 동침하게 된 날, 동연은 연옥이 이미 자신의 아버지에게 순결을 잃은 것을 알게 된다. 동연은 아버지와 함께 한 여자를 사랑한 것을 알고 번민에 빠진다. 게다가 연옥은 이미 뱃속에 최문술의 아이까지 키우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뱃속에서 아버지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최문술과 성경애는 연옥을 ‘바보 기덕’에게 시집보내는 것으로 최문술의 죄를 지우려한다.

동연을 면회한 성연은 형으로부터 범인에 대한 암시를 받는다. ‘나는 그날 공교롭게도 또 다른 그림자를 봤어. 아니, 우리들의 그림자지. 분노에 젖은 채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그림자. 그래, 우리들의 운명, 우리들의 죄 덩어리, 우리들의 형제, 우리들의 피 말이야.’(93쪽)

소설은 죽은 최문술로 인해 상처받은 인물들의 이야기다. 저마다 최문술을 죽일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려준다. 사랑은 없고 증오만이 남은 가족사를 그린 작가 김영현은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생각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기자 , scoop87@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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