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덕숭총림 수덕사 수좌 설정 스님
<연합뉴스 2006/8/8/화>
수행정진은 사유·분석·체계화를 버리는 것"
"사회갈등은 '진실'이 없는 불신에서 비롯"
(예산=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지혜가 영글지 않으면 중생을 구제하기 어렵습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자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위험합니다. 불제자의 수행정진은 중생을 구할 지혜를 얻기 위한 시간입니다."
충남 예산 덕숭산 자락에 자리잡은 덕숭총림 수덕사는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우리나라 불교계 5대 총림의 하나이다.
백제말 숭제(崇濟) 법사가 창건해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한말(韓末)에 경허(鏡虛) 선사가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키고 그의 제자 만공(滿空) 선사가 중창해 500년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끊어지려 했던 한국 불교의 선맥(禪脈)을 다시 이은 곳이다. 개화기 문필가이자 신여성이었던 김일엽 스님이 이곳 견성암에 머문 것을 계기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만공 스님이 1932년 세운 정혜사 능인선원은 덕숭산 정상 가까운 곳에 위치한 덕숭총림의 대표적 비구 선원이다. 밤낮으로 용맹정진하던 수도승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만행을 위해 선원의 입구로 나서면 멀리 서해 바다와 홍성읍이 내려보인다. 이른 아침 매미의 시원한 울음을 싣고 선원에 선선한 산바람이 불어올 시간, 3개월의 수행을 마친 수행자들은 걸망을 짊어진 채 좁은 오솔길을 따라 하산한다.
8일(음력 7월15일) 하안거(夏安居) 해제일을 맞아 이곳의 수행 가풍을 듣기 위해 3개월간 수행을 이끈 덕숭총림 수좌(首座) 설정(雪靖·66) 큰스님을 찾았다. 세속과 인연을 끊고 수행에 몰두하다 선방에서 막 빠져나온 노스님의 얼굴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하늘처럼 정갈했고,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자태는 엄격하면서도 편안하고 은은한 기운을 내뿜었다.
"정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 온힘을 쏟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공부하는 법은 사유하고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버리는 공부를 합니다. 생각이 다 없어져 버려서 사실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람 한 점 일지 않아 거울처럼 잔잔한 호수에 작은 돌을 던지듯 큰스님에게 "수행의 일과는 어떻게 진행되느냐"고 물었다.
큰스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저녁 9시에 취침하는 일정은 다른 선원과 다를 바 없으나 낮에 일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 덕숭총림의 전통"이라고 설명했다. 수행자들은 정진하는 시간 외에 채소를 길러 자급자족한다거나 도량 주변의 풀베기 등 울력(공동 노동)을 자주 했다고 한다.
"수행자들은 죽비를 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공부할 만큼 이미 수행경력이 많은 분들입니다. 자율적으로 공부하되 3개월간 바깥출입을 할 수 없고 웃거나 떠들어서도 안됩니다. 다른 선원과 달리 자유정진의 시간조차 주지않고 엄격한 규율 속에 공부를 진행했습니다."
올해 하안거가 진행되는 동안 바깥세상은 태풍과 장맛비로 고통이 컸다. 이에 대해 큰스님은 "수행자들은 부모형제를 떠나 불가에 들어섰지만 사회적 역할을 떠나거나 내팽개친 것은 아니다"면서 "사회의 고통을 생각하며 더욱 정진에 몰두해 지혜를 얻어 중생을 제도하기를 간절하게 기원했다"고 말했다.
바깥의 고통을 모른 체 할 수 없지만 우선 수행정진을 통해 먼저 지혜의 문을 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에 빠진 이를 구하려면 먼저 수영하는 법을 알아야 하는 이치와 같다. 큰스님은 수해현장에 찾아가진 못했지만 주머니를 털어 피해민을 돕고자 했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기원했다고 밝혔다.
경허와 만공선사 등 한국 근현대 불교의 선(禪)을 중흥시킨 선지식들이 논밭에서 일하면서 수행했던 것과 다르게 요즘들어 선방에 가만히 앉아 참선하는 것은 죽은 선(禪)이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 큰스님은 "근자에 와서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등 해이해진 측면이 있다"면서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쉽고 편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쉽게 산다는 것은 공부를 안하고 명예나 돈 등에 마음을 기울게 함으로써 수도자 본래 모습을 잃게 만든다"며 "육체를 항상 움직여야 하며, 스스로 힘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수행자로서 바르게 사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의식주가 풍족해지면 편하려는 속성에 빠져 발심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일정한 단계에 이르기까지 좌선(坐禪)을 해야 한다"고 말한 큰스님은 "참선이 동정여일(動靜如一)의 경지에 이르면 잠자면서도 화두를 들게 된다"고 덧붙였다.
큰스님은 조계종에서 선(禪)을 보급하는 간화선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는 것에 대해 "사회가 정신적 갈등을 극심하게 겪는 때에 선의 보급은 승속이나 타종교를 막론하고 정신적 치료법으로서 매우 중요하다"면서 "다만 '간화선 지도자'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숙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치원 선생이나 보모와 같이 선의 기초단계를 보급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큰스님은 "북한 미사일 발사 등으로 빚어진 한반도 긴장 상황, 국내 정치권의 갈등 등에 대해 바깥사람들로부터 간간히 소식을 들었다"면서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면서 "주변 열강이 남북통일을 바라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므로 자주적 통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남북 공히 민족적 각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갈등은 불신에서 오고, 그 불신은 진실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면서 "정치든 뭐든 자기 소임에 충실하고 남을 속이려 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나아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면 너무 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해 여유를 갖지 못함으로써 상대를 존중하지 못하고 적대적 관계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며 "우리 민족 특유의 은근과 끈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고도 말했다.
큰스님은 "불가의 화두는 그동안 살아온 습관, 이해관계, 분별하려는 것, 일체의 못된 정신을 잘라버리는 칼과 같은 것"이라며 "수행자들은 3개월간의 하안거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화광동진(和光同塵·진리의 빛을 세상과 함께한다)의 마음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와 긍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철수개화(鐵樹開花·쇠나무에서 꽃이 피고)와 화중생련(火中生蓮·불 가운데 연꽃이 핀다)이 불법 가운데 있고 그것이 선(禪)이다"라며 세상의 논리와 다르지만 진실을 다하려는 마음에 참선의 길이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
설정 큰스님은 1955년 수덕사에서 혜원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조계종단 개혁회의 법제위원장, 제11대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ckchung@yna.co.kr
<조계종 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