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스님(덕숭총림 수덕사 수좌)
간화선 중흥을 위한 전국 선원장 초청 대법회 지상중계
주제 : 단박 깨침이란 무엇인가
조계사·현대불교 공동 주최 (5월9일-조계사 대웅전)
이쪽에도 저쪽에도 떨어지지 말라
■ 설정(雪靖) 스님
설정 스님은 1955년 수덕사 원담 스님을 은사로 득도,
61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조계종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하는 등 이판과 사판을 초월해 덕숭 가풍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2000년 미국 텍사스 태광사를 창건하기도 한 스님은
현재 봉암사, 상원사, 청량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참선에 몰두하고 있다.
(주장자 세 번 내리치시고)
산색문수안(山色文殊眼)
수성관음이(水聲觀音耳).
소승이 조금 전 짧은 게송을 하나 읊었습니다.
내용인 즉, 산색은 문수안이라. 산색뿐만 아니라 일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문수의 눈이다.
수성은 관음이라. 물소리는 그대로 관세음보살의 음성이다.
법문을 들을 때 마음을 다 비워 듣는다면 굳이 제 법문이 아니더라도
일체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문수의 모습일겁니다.
또 바람소리 새소리 모두 관세음보살의 음성일 것입니다.
옛 어른들은 법을 간절히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설해주지 않으면,
법을 잃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법문 듣는 사람이 법문 듣는 자세가 돼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법문한다면,
그 또한 법을 잃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사부대중은 어느 위치, 어떤 자세로 법문을 듣는지 스스로 되돌아볼 일입니다.
인간은 모두 행복하게, 편안하게, 영원히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안 됩니다. 그 근본원인은 바로 자신에게 있습니다.
부처님 법은 스스로 자신을 밝히고 자성을 깨우치게 해
무한한 생명을 얻고 무한한 나를 얻게 해 줍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49년 동안 많은 방편문을 열어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수행방법에는 염불도 있고, 주력도 있고, 간경도 있고, 육바라밀도 있습니다.
한용운 선사(韓龍雲ㆍ1879~1944)는 “선이라고 하면 이미 선이 아니다.
선이 아니면서 선이요 선이면서 선이 아닌 것이 선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한국불교는 통불교입니다. 통불교를 지향하지만
수행법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지향합니다.
교리를 다 알았으면 내려놓고 선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망심(妄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선(禪)입니다.
그 자리에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定)입니다.
이것이 선정(禪定)입니다. 돈오(頓悟)는 단박에 깨치는 것입니다.
찰나에 무명을 다 끊어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돈오는 무념을 종(宗)으로, 청정을 체(體)로, 지혜를 용(用) 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무념, 무심은 어떤 때, 어떤 장소에서도 일체 동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무념, 무심, 보리, 열반, 해탈, 견성, 돈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사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중도, 돈오라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또한 중도를 일컫습니다.
특히 선가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합니다. 일체 것을 다 부정합니다.
텅 비어 비어있다는 그 자체마저 없습니다. 그래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반경〉 ‘금강신품’에 ‘이 마음자리는 밝고 밝아서
아는 것도 없고 알지 못할 것도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것은 일대사 인연입니다.
일대사 이 한 가지 일을 이루기 위해 개시오입(開示悟入)한 것입니다.
원래 마음이라는 것은 그냥 한 물건입니다.
광대무변한 우주에 자신을 비춰보면 사람은 티끌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것에 육합(六合)이 다 포함돼 있습니다.
이 한 물건이야 말로 삼재(天地人)의 주인입니다. 만법의 왕입니다.
높고 높아서 비교할 수 없고, 넓고 넓어서 짝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참으로 신비롭고 신령스러운 이 한 물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한 물건은 천지보다 먼저 생겼습니다. 천지보다 끝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설산(雪山)에서 6년 동안 고행하시고 바로 이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달마 대사(達磨ㆍ?~528?)가 서쪽에서 오신 것도
중생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법은 상대법(相對法)이자 생멸법(生滅法)입니다.
이 세계 삼라만상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유위법(有爲法)입니다.
그러나 생멸법으로는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 몸은 영원한 것입니다. 불가의 게송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원각산중생일수(圓覺山中生一樹)
원각산에 자라는 한 그루 나무
개화천지미분전(開花天地未分前)
하늘 땅 있기 전에 꽃이 피었네
비청비백적비묵(非靑非白赤非黑)
푸르지도 희지도 검지도 않아
부재춘풍부재천(不在春風不在天)
봄바람 안 불어도 계절 없이 피어 있네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사람이 죽어 지옥에 갈 때 불성도 따라갑니까.”
“안 따라갑니다.” “왜 안 따라갑니까.”
“마음자리가 상주불멸 생멸법이 아니기 때문에 지옥이나 천당에 가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지옥에 들어갑니다”라고 말합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입니까.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중생업연(衆生業緣)이라.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은 업연으로 고통 받는 겁니다.
업연은 생멸법입니다.
법문은 이론을 갖다 붙여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말에서 떠나 있는 겁니다. 생각으로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법화경〉에서
“이 법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선사들의 말은 많습니다.
당나라 때 유명한 선사였던 마조 스님(馬祖道一ㆍ709~788)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자주 쓰셨습니다. 어느 스님이 마조 스님께 물었습니다.
“스님은 왜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합니까.” “어린아이 우는 것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다.”
그 스님이 또 짓궂게 묻습니다.
“어린아이가 울음을 그쳤을 때는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부처도 마음도 아니다.” 그 스님이 또 물었습니다.
“어린아이 울음도 그쳤고 그 상태가 아닌 사람이 보면 뭐라 할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답할 것이다.”
“그럼 위 세 가지에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오면 어떻게 말씀하실 겁니까.”
“대도(大道)나 닦아라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선방에 가면 대문에 ‘이 속에 들어왔으면 모든 알음알이를 다 놔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념은 보리심, 진여, 정념을 말합니다.
그럼 정념(正念)은 무엇이고 사념(邪念)은 무엇입니까.
유무, 선악, 고락, 취사를 생각하면 사념입니다. 이를 떠나면 정념, 돈오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선을 해야 쉽게 할 수 있을까요.
우선 마음부터 변화시켜야 합니다. 중생은 업과 환경에 끌려 삽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환경이나 상황에 절대 끌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팔풍(八風)에 흔들리지 말라고 주문합니다.
살다보면 고통스러운 것도 괴로운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 조계종 종정이셨던 효봉 스님(曉峰ㆍ1888~1966)도
‘이쪽저쪽에도 떨어지지 마라. 이쪽저쪽에도 발붙일 수 없는 견해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무위진인(無位眞人)을 만날 것이다.
그것이 너의 본래 면목이다’라고 게송을 지으셨습니다.
간화선을 하는 우리들은 화두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선가에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활구하(活句下)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와 더불어 스승이 되지만
사구하(死句下)에 얻은 바가 있다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
부처님의 진면목을 가르친 것이 화두선입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趙州ㆍ778~897)께 물었습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불교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똥 막대기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떤 스님이 또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그 때 무(無)는 유무(有無)의 무가 아닙니다. 이것이 간화선입니다.
선사들이 상대에게 화두를 던져줄 때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도록 합니다.
나옹 스님(懶翁慧勤ㆍ1320 ~ 1376)은 한 찰나 사이에 9백 생멸(生滅)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생멸이 일어나고 꺼지고 할 때 그 순간 화두를 잡아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화두를 들다보면
모든 망상은 끊어지지만 화두가 없어지고 그냥 즐겁고 편안하기만 하는 겁니다.
그것을 무기(無記)이라고 합니다.
번뇌망상이 끊어졌을 때 화두가 분명히 잡혀져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성성적적(惺惺寂寂) 적적성성(寂寂惺惺)하다고 합니다.
화두 들 때 앞뒤가 다 끊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동정일여(動靜一如)해야 합니다.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항상 화두가 가만히 자리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오매일여(寤寐一如)해야 합니다.
잠잘 때도 들어가 있어야 하고 깨어있을 때도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절에 가면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표현을 합니다.
백척이나 되는 까마득한 대나무 끝에서 죽기를 무릅쓰고 한발을 내딛는다는 겁니다.
모든 번뇌망상 다 쉬어버린 것은 아라한과(阿羅漢果)쯤 됩니다.
그것을 멸진정(滅盡定)이라고 합니다. 멸진정에 간 사람을 견성했다고 합니까.
팔풍에 덜 흔들리면서 동처부동주(同處不同住)하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점차로 나아가다 보면 한번에 꿈을 깨는 극적인 상황이 옵니다.
모든 번뇌망상의 먹구름이 없어지고 청정한 자성이 나타나서 영원히 사는 길이 불법에 있습니다.
이것이 불법의 핵심입니다.
수지왕사일륜월(誰知王舍一輪月)
만고광명영불멸(萬古光明永不滅)
누가 알 것인가. 왕사성 위에 높이 떠 밝게 빛나던 달빛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진리의 빛이라.
부처님은 왕사성에서 성도해 모든 중생들에게 진리의 빛을 아낌없이 나눠주셨습니다.
그 빛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일체중생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지혜의 빛을 찾아 다시는 생사에 헤매지 않도록
열심히 정진해 주실 것을 부탁을 드리면서 오늘 법회를 마치겠습니다.
정리=남동우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묻고 답하기’ 현장
▲부처님께서 일체의 모든 것에는 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서 무정물이 될 경우 불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의 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肉身)이고,
두 번째는 업신(業身)이고, 세번째는 법신(法身)입니다.
이 중 법신은 오고가지 않습니다. 또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찾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무위진인입니다. 그래서 불법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끗한 마음이 법신입니까?
-당연합니다. 돈오라는 것은 법신을 증득한 겁니다.
참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만 놔버리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천칠백 공안 중 어떤 화두를 들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달마 대사가 소림굴에 있을 때 혜가 스님(慧可ㆍ487∼593)이 몇 번을 찾아가서 법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달마 대사가 “이 법은 소중하고 소중한데 네가 어떤 마음으로 법을 들으려고 하느냐.
신(信)을 보여라”라고 합니다. 여기에 혜가 스님은 팔을 잘라 내 보였습니다.
정말 간절한 생각이 있을 때 화두를 가져야합니다.
▲추천하고 싶은 책 두세 권만 말씀해 주십시오.
-참선할 때 책은 별로 필요 없습니다. 굳이 필요하다면
선가귀감(禪家龜鑑)〈선문정로(禪門正路)〈선문촬요(禪門撮要)〉등이 참고가 될 겁니다.
그러나 책에 붙잡혀서는 안 됩니다. 육근(六根)이나
육식(六識)으로 들어오는 지식이나 알음알이는 보배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