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1786-1856)의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등을 사용하였다.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고 특히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書體)를 창안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다. 또 금석학(金石學)과 실학(實學)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24세에 중국에 가서 중국의 옹방강(翁方綱) 등 유명한 석학들과 교유하며 학문과 서법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또 그림과 글씨에서 문기(文氣)를 중시하여 격조 있는 문인화(文人畵)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그의 그림은 많지 않으나, 필치가 호방하면서도 문기가 배어있다. 또 불교에서 말하는 선미(禪美)가 어울어져 동양 문인화의 정신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그림의 윗편에는 '당인(唐人)의 시의(詩意)를 빌려 등불 아래서 그렸다'는 제(題)가 적혀 있다. 당인의 시의를 그렸다면 시정적인 분위기와 낭만적 기풍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 그릴 때 표현하고자 한 화의(畵意)가 화제(畵題)를 잘 따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즉 화면에 나타난 결과는 그와 반대로 약간 거칠고 메마른 느낌을 주어 눈길을 끈다. 이러한 효과는 갈필(曷筆)에서 연유한 듯하다.
아래 그림 세한도는 서예의 대가인 소전 손재형께서 일본이 우리 나라를 빼앗아 점령하고 모든 공사의 귀중한 서적과 보물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탈취할 때, 〈세한도〉도 당시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후지쓰카(藤塚)를 따라 동경으로 가게 되었다. 일본에 건너간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기 위해 소장자인 후지스카교수에게 3개월동안 새벽문안 인사를 다녔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 정성에 감복해 추사 글씨 10여점과 함께 세한도를 내주었다 한다. 이 세한도는 후에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