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燃燈 ; 蓮燈)과 연등행사의 의미
연등(燃燈)이란 등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등(燈)은 짙은 암흑과 같은 중생의 미혹과 무명(無明)을 걷어내고 밝히는 의미로 흔히 지혜에 비유되어 왔으며, 때문에 부처님 전에 등을 켜 올리는 등공양을 향공양과 함께 중요시하여 왔다.
연등행사에는 대부분 연꽃 모양의 등을 사용한다. 이는 지저분한 진흙의 못에서 자라지만 그 청결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피어나는 연꽃의 모습이, 세속에서 중생과 더불어 살면서도 물들지 않고 오히려 주변을 아름답게 바꾸는 보살의 삶과 같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연등(蓮燈)은 불자(佛子)의 삶의 자세를 상징한다.
불교에서의 등(燈)의 위상은 흔히들 알고 있는 부처님께서 제자 아난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가르침인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는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의 말씀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우경>에 보이는 '비록 보잘 것 없고 작은 등이지만 가난한 여인이 정성껏 부처님께 공양한 등불은 아무리 끄려고 해도 꺼지지 않았다는 가난한 여인의 등불에 관한 이야기(貧者一燈)'는 황금만능주의와 기복신앙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우리로 하여금 참된 보시와 공양의 의미가 물량이 아닌 정성과 청정한 서원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연등을 밝히는 것은 단순히 부처님께 등공양을 올린다는 의미가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널리 전하여 세상을 두루 밝히겠다는 나의 다짐이다.
부처님께 올릴 등을 밝히면서 내 마음의 등도 함께 밝히며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겨 보는 것과 더불어 내 몸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같이 사홍서원 중의 중생의 구제를 위해, 불도를 이루기 위해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보살의 서원을 되새겨 보자.
연등행사의 유래와 변천
연등(燃燈)은 등불을 밝힌다는 말로 부처님께 공양하는 방법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로 가득찬 어두운 세계(無明)를 밝게 비춰주는 부처님의 공덕을 칭송하고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자 등(燈)에 불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연등행사의 유래는 초기경전에 부처님께 꽃을 뿌리고 향을 사르고 밤에는 등불로 공양을 올렸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그 중 <현우경>의 '빈녀 난타(貧者一燈)'의 이야기에서 부처님 당시 사밧띠(舍衛城)의 파세나디왕이 석달동안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옷과 음식과 침구와 약을 공양하던 중 어느 날 밤에 수만 개의 등불을 켜 연등회(燃燈會)를 열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현재의 "부처님 오신 날"(사월 초파일)에 연등하는 풍속의 유래는 고려시대 고종(高宗) 때 최충헌(崔忠獻)의 아들인 최이(崔怡)가 초파일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신일이기에 기존에 행해지던 연등 행사의 날짜를 이 날로 변경했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함께, 유만공의 <세시풍요>나 비슷한 시기에 나온 홍석모의<동국세시기> 등의 자료에 의하면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초파일이 절에서만 지켜지는 명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불법이 전해진 이후에 기록상으로는 신라에서 '간등(看燈)'이란 이름으로 진흥왕(서기 551년)때에 전사한 장병을 위하여 외사(外寺)에서 7일 동안 설행(국가에서 행사를 주관하고, 국왕이 참여함)되었고 선덕여왕 때에는 황룡사에서 열렸다는 것 외에도 다수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이래로 국가차원에서 연등행사를 열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불교전래 이전의 토착의례와의 융화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적인 종교놀이 문화로 발전하였다. '춘연등 동팔관(春燃燈 冬八關)' 이라하여 연등도감(燃燈都監)과 팔관보(八關寶)라는 행사 주관 기구를 두고 국가에서 직접 재원을 조달하고 주관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11월 15일에는 팔관회를, 2월 15일(후일 4월8일)에 풍년을 기원하면서 연등회를 개최하여 온 백성이 잔치를 베풀고 가무를 즐겼다고 하며 고려말기 공민왕 이후에는 많은 종류의 등을 만들어 각종 깃발로 장식한 등대(燈臺)에 등을 달아 온 누리가 연등일색으로 변한 저녁에 온 장안의 남녀노소가 함께 즐겼다고 한다.
억불과 배불로 불교가 핍박받던 조선시대에 이르러 관청중심의 행사는 중지되었으나 민간에서는 민속행사로 남아 세시풍속으로 전승되었다. 연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초파일에 연등 밝히기는 계속되어 왔다고 한다. 당시 야간에 통행금지가 있었으나 초파일 저녁만은 등석(燈夕)이라 하여 통금이 해제됐을 정도로 초파일 연등행사는 민간에 깊이 뿌리박혀 널리 유행되고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계속 행하던 풍습으로 초파일에 앞서 등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이 종이를 잘라 등간(燈竿)에 매달아 기를 만들어 들고 장안을 돌아다니며 쌀이나 돈을 구하여 등 만드는 비용으로 쓰는 호기(呼旗)놀이가 성행하였다. 초파일의 낮에는 절에 가서 공양을 올리고, 저녁에는 집집마다 세운 등대에 자녀수대로 등을 밝혔다. 거리 곳곳에도 형형색색의 등을 달았으며 밤에는 온장안의 남녀들이 등을 들고 나와 불꽃바다를 이루었고, 등으로 거대한 산과같이 장관을 이룬 것을 구경하는 관등(觀燈)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서울시내에 곳곳(광화문통 광장, 조선은행 앞 광장, 장충단 3곳. 후에 경성부, 탑골공원으로 바뀜)에 꽃으로 장식한 탄생불을 모시고 관불(灌佛)을 하였으며 저녁에는 공양올린 등에 불을 켜고, 또한 등을 들고 흰 코끼리를 앞세워 종로-을지로-광화문을 도는 제등행진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조계사-종로4가-을지로-시청앞-안국동-조계사를 도는 제등행진을 하였으며 후에는 동국대-종로-조계사까지 제등행진을 하였다. 1975년부터는 초파일이 국가공휴일로 되었으며 1976년부터는 여의도광장-조계사에 이르는 제등행진을 하였다.
불기 2540(1996)년 부터 연등축제로 이름을 붙이고 동대문 운동장 - 조계사에 이르는 제등행진을 비롯하여 불교문화마당, 어울림마당(연등법회), 대동(회향)한마당 등 행사가 추가되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등 모두가 어우러지는 종합 축제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등의 종류
‘부처님 오신 날’ 사용되는 등은 연꽃 모양의 연등을 비롯하여 수박, 마늘 등의 채과(菜果) 모양 등(燈)과 종, 북, 누각, 화분, 가마, 병, 항아리 등의 기물(器物) 모양의 등(燈), 용, 봉황, 학, 잉어, 거북, 자라 등의 동물(動物) 모양의 등(燈)이 있다. 이 외에도 칠성등, 오행등, 일월등 등의 천문(天文) 모양의 등(燈)과 수복등(壽福燈), 태평등, 만세등(萬歲燈), 남산등(南山燈) 등의 상징적 문자(文字) 의미의 등(燈) 등 다양하다.
이런 등들은 특별한 형식이 따로 없이 대나무 뼈대에 종이나 붉고 푸른 천를 바르고 채색 하여 용이나 봉황과 같은 형체를 만들고 속에 촛불을 켜게 한 것으로 열의 흐름을 이용해 부분적으로 움직이게 한 것도 있다.
한국전통 등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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