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훈(家訓) / 윤기(尹愭)
무명자집 문고 제4책
가훈(家訓)
1.
권세가 대단하여 세상을 흔드는 것,
믿는 구석이 있어 교만한 것,
자기 분수에 안주하지 못하는 것,
오로지 남의 허물만 말하는 것,
이 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반드시 망한다.
2.
“덕으로 은덕을 갚고,
곧음으로 원수를 갚아야 한다.〔以德報德 以直報怨〕”는
공자의 말이 있다. 은인과 원수를 대할 때 반드시 이 말을 생각하여
혹시라도 어기지 말지어다.
3.
내가 남에게 빌린 것이 있으면 반드시 기한에 맞추어 갚고,
남이 나에게 빌린 것이 있으면 기한을 어기더라도 독촉하지 말지어다.
4.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속셈을 지니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속셈이 있다는 사실은 모르니, 너무도 어리석다.
5.
세상의 수많은 사단(事端)이 대체로 다 사람들의 모임으로 인해 생기니,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어떤 모임에도 가지 않는 것이 좋다.
소강절(邵康節)은 “모임에는 네 가지 참석하지 않을 것이 있고,
때에는 네 가지 외출하지 않을 시기가 있네.〔會有四不赴 時有四不出〕”라고 하였지만,
내 생각에는 네 가지뿐이 아니다.
6.
외면은 부드럽고 내면은 강하며 말은 겸손하고 행동은 방정한 것,
이는 내가 평소에 지키는 일이다. 기질이 이에 가깝기 때문이리라.
7.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만 이롭기를 바라서 조그만 이익이라도 있으면 스스로 축하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이로움과 해로움은 서로 따르는 것이니,
이는 목전에 이익이 있음만 알고 무궁한 해로움이 자신을 해칠 줄 모르는 것이다.
8.
사람의 병통은 남에게 물건 구하기를 좋아하는 데 있다.
물자를 유통시키는 데는 매매(賣買)만 한 방법이 없으니,
어찌 굳이 남에게 구해야만 얻을 수 있겠는가?
만약 살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물건이라면 남에게 구해도 괜찮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반드시 그 사람을 잘 살펴보고 구하는 것이 좋다.
9.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또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불쌍하다고 말하겠지만 속으로는 천하다고 업신여길 뿐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고을 수령으로 있으면서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수령의 녹봉이 박하고 빚이 많다고 말하는 자들이 세상에 가득하지만,
나는 그런 짓은 차마 못하겠다.
10.
겉으로는 청렴한 척하나
속으로 탐욕을 채우고 남들 앞에서는 청탁을 물리치나
은밀한 곳에서 사정(私情)에 치우쳐 부정을 저지르는 자로 말하면
도둑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11.
나는 전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사람이 아무리 곤궁하고 미천하더라도 해서는 안 될 짓이 세 가지가 있으니,
친지(親知)가 부임한 관아에 찾아가는 것,
처가(妻家)의 고을을 찾아가 거주하는 것,
남의 스승이 되어 제자에게 기대는 것이 그것이다.
12.
아는 사람이 고을 수령이 되었으면 찾아가지 말아야 한다.
만약 교분(交分)이 두터워 축하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라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야 한다.
13.
사람들은 대체로 남과 말하는 법을 모른다.
바른 사람과 말하기를 바르지 않은 사람과 말할 때처럼 하고,
곧은 사람과 말하기를 곧지 않은 사람과 말할 때처럼 하고,
청렴한 사람과 말하기를 청렴하지 않은 사람과 말할 때처럼 하고,
공정한 사람과 말하기를 공정하지 않은 사람과 말할 때처럼 한다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악의(惡意) 없이 범한 실수를 보고 성내는 속 좁은 사람이나 제 것을 뺏길까봐 지레 겁내어 상대방을 경계하는 자들로 말하면, 다른 사람과 말하는 법에 대해 함께 토의할 수 있는 위인이 못 된다.
14
말을 하거나 일을 만났을 때 반드시 의리에 비추어 보고 또 성현의 잣대로 바로잡는다면 큰 허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15
부자ㆍ형제ㆍ부부는 모두 지극히 친숙한 가족이다. 따라서 평소의 언행ㆍ심지(心志)ㆍ호오(好惡)를 모두 아는 것이 당연하고, 또 미진함이 없이 환히 아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서로 알지 못하고 서로 믿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가족끼리도 이러한데 더구나 군신과 붕우 사이는 어떠하겠는가?
소왕(昭王)이 악의(樂毅)를 대한 일과 포숙(鮑叔)이 관중(管仲)을 대한 일로 말하면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16
옛날에는 말하기가 쉬웠는데 오늘날엔 말하기가 어렵다. 옛사람은 뜻 가는 대로 솔직하게 말해도 사람들이 옳은 것은 옳다고 할 뿐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 동상(銅像)의 입을 세 군데나 봉하고백규시(白圭詩)를 날마다 세 번 외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심사숙고하여 말해도 걸핏하면 말 때문에 죄를 얻곤 하니, 이 때문에 늘 말을 조심하지 못했다고 탄식하게 된다. 옛사람이 만약 지금 시대에 산다면 그 얼마나 조심하겠는가?
[주-D001] 가훈(家訓) :
본서의 편차 순서로 보아 이 글은 작자 나이 62세 때인 1802년 황산도 찰방에서 파직되고 나서 관직이 없던 시기의 작품이다. 작자는 이때 바쁜 실무에서 벗어나 1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와 지냈으니, 주요 관심이 자연히 집안을 다스리는 데로 쏠렸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때 자식들에게 당부하기 위해 쓴 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총 16조로 이루어져 있다.
① 권세와 교만을 부리는 일, 분수에 만족하지 못하는 일, 비방을 일삼는 일에 대한 경계,
② 은인과 원수에 대한 태도,
③ 빌린 물건과 빌려준 물건에 대한 태도,
④ 남에게도 속셈이 있음을 명심하기,
⑤ 모임에 참가하지 않기,
⑥ 외유내강(外柔內剛),
⑦ 이익이 있으면 해로움이 따름을 유념하기,
⑧ 남에게 함부로 물건을 구하지 않기,
⑨ 남에게 자신이 가난하다고 떠벌이지 않기,
⑩ 겉으로만 청렴한 척하는 사람은 도둑과 같음,
⑪ 친지(親知)가 부임한 관아에 가지 않기, 처가(妻家)의 고을에 살지 않기, 제자에게 기대지 않기,
⑫ 아는 사람이 지방관으로 있는 고을에 찾아가지 않기,
⑬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과 말하는 법,
⑭ 일에 대처하는 기준,
⑮ 군신 간ㆍ붕우 간의 신뢰의 어려움,
⑯ 말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시대.
[주-D002] 덕으로 …… 한다 :
《논어》 〈헌문(憲問)〉에 보인다.
[주-D003] 속셈 :
원문은 ‘肺腸’이다. 이는 자신의 이욕(利慾)을 채우기 위해 속으로 계산하고 도모함을 이르는 말로, 본서 문고(文稿) 제12책 〈정상한화(井上閒話)〉 ‘옛사람의 소차〔古人疏箚〕’ 조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작자가 사용한 ‘肺腸’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참고가 된다. “당론(黨論)이 한번 갈리고부터 세상에는 공의(公議)가 없어지고 사람들은 속셈〔肺腸〕을 지녀서 오로지 이욕만을 생각하고 의리를 알지 못한다.〔一自黨論岐貳之後 世無公議 人有肺腸 只懷利慾 不識義理〕”
[주-D004] 모임에는 …… 있네 :
송(宋)나라 소옹(邵雍, 1011~1077)의 시 〈사사음(四事吟)〉에 보인다. 강절(康節)은 소옹의 시호이다. ‘네 가지 참석하지 않는 모임’이란 공회(公會 공적인 일로 인한 대중 집회)ㆍ장회(葬會 장사를 지내면서 베푸는 잔치)ㆍ생회(生會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ㆍ갹회(醵會 추렴하여 술 마시는 모임)를 이르며,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네 가지 때’란 몹시 추울 때〔大寒〕, 몹시 더울 때〔大暑〕, 큰바람이 불 때〔大風〕, 큰비가 올 때〔大雨〕 등을 이른다. 《邵氏聞見錄 卷20》 《事文類聚 續集 卷14》
[주-D005] 고을 수령 :
원문은 ‘官’이나, 조선 시대에 축재(蓄財)의 수단으로 활용된 것은 특히 고을 수령 자리였으므로 ‘고을 수령’으로 한정하여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참고로, 작자가 이러한 폐단을 지적한 글이 본서 문고(文稿) 제11책 〈잡기 여덟 가지〔雜記 八〕〉에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근세에 또 한 가지 가증스러운 일이 있으니, 고을 수령으로 나간 자들이 모두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이 가난하다고 말하여, 말하는 순간에 느닷없이 곤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규모가 크고 물산이 풍부한 고을이라 하더라도 관아의 형편이 쪼들린다고 자탄하며……고달프고 가련하다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한 푼이라도 꺼내 부조하고 싶게 만든다.〔近世又有一種可惡之態 出宰者皆逢人說貧 出語成竆 雖甚雄腴 自歎官況之凉薄……艱苦可憐之語不絶於口 令人欲出一文以顧助〕” 작자의 의도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 있다.
[주-D006] 처가(妻家)의 …… 것 :
원문은 ‘隨妻鄕而卜居也’로, 이에 대한 언급이 본서 문고(文稿) 제12책 〈협리한화(峽裏閒話)〉의 ‘처의 고장에 산다는 것〔妻鄕不可居〕’에도 보인다. 곧, 작자가 75세인 1815년에 처가의 고을인 양근(楊根)으로 이사했을 때 어떤 사람이 전에 한 말과 다르다고 의문을 제기하였는데, 작자는 전에 자기가 한 말은 ‘처가를 찾아가 의지하는 것〔隨妻家而依賴之〕’을 뜻하는데, 자신이 이때 양근으로 이사한 것은 ‘처가를 찾아가 의지하기〔隨而依賴之〕’ 위한 것이 아니므로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D007] 악의(惡意) …… 성내는 :
원문은 ‘怒虛舟’이다. 이는 본디 빈 배가 물결 따라 출렁이다 우연히 부딪치는 것을 보고 성낸다는 말로, 《장자》 〈산목(山木)〉의 “두 척의 배를 나란히 띄워 하수를 건너갈 때 빈 배가 와서 부딪치면 비록 속 좁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노여워하지 않는다.〔方舟而濟於河 有虛船來觸舟 雖有惼心之人 不怒〕”라는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주-D008] 제 것을 …… 경계하는 :
원문은 ‘嚇鵷雛’이다. 이는 본디 썩은 쥐를 먹으려던 솔개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원추(鵷雛 봉황새의 일종)를 보고 먹이를 뺏길까봐 지레 겁을 내어 소리를 꽥 지른다는 말로, 본디 양(梁)나라의 재상 자리를 장자(莊子)에게 뺏길까봐 온 도성을 샅샅이 수색하여 장자를 잡으려고 한 혜시(惠施)를 빗댄 말이라고 한다. 《莊子 秋水》
[주-D009] 소왕(昭王)이 …… 일 :
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소왕(昭王)이 국력을 기르고 제(齊)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유능한 선비를 초치(招致)하는 중에 위(魏)나라 출신인 악의(樂毅)를 아경(亞卿)으로 중용하고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아 두텁게 신임한 일을 이른다.
참고로, 소왕에 이어 즉위한 혜왕(惠王)은 이와 대조적으로 제나라의 이간책에 넘어가 악의를 상장군에서 끌어내렸는데, 그 결과 악의는 조(趙)나라에 투항해 버렸고, 연나라는 악의가 함락시켰던 제나라의 70여 성을 모두 도로 제나라에 빼앗겼다. 《史記 卷80 樂毅列傳》
[주-D010] 포숙(鮑叔)이 …… 일 :
포숙아(鮑叔牙)와 관중(管仲)의 돈독한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태도는 《열자(列子)》 〈역명(力命)〉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관중의 말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나는 가난한 어린 시절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많이 가져가도 포숙은 나를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이해해 준 것이다. 내가 포숙을 위해 일을 도모하다가 크게 잘못된 적이 있는데,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시운(時運)이 유리하고 불리할 때가 있음을 알고 이해해 준 것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 벼슬에 올랐다가 세 번 모두 쫓겨났는데,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고 이해해 준 것이다. 나는 세 번 전쟁에 나가 세 번 모두 도망친 적이 있었는데, 포숙은 나를 비겁하다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음을 알고 이해해 준 것이다. 공자 규(糾)가 패하자 소홀(召忽)은 자결하였으나 나는 감옥에 갇혀 모욕을 감수했는데, 포숙은 나를 염치없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조그만 일에는 개의치 않고 천하에 공명을 떨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줄을 알아준 때문이다. 나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이고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
[주-D011] 사람 …… 봉하고 :
공자(孔子)가 주(周)나라를 구경하다가 후직(后稷)의 사당 섬돌 앞에 있는 사람 동상(銅像)을 보니, 입이 세 군데가 봉해지고 등에 “옛날에 말을 조심해서 한 사람이다……〔古之愼言人也……〕”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孔子家語 觀周》
[주-D012] 백규시(白圭詩)를 …… 외었다 :
공자의 제자 남용(南容 남궁괄(南宮括) 또는 남궁괄(南宮适))이 말을 조심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다는 고사이다. 《논어》 〈선진(先進)〉에, 공자가 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언행을 조심하는 성품을 높이 사서 형의 딸을 시집보냈다고 한다.
‘백규시’는 《시경》 〈억(抑)〉의 “흰 옥의 티는 갈아낼 수 있지만 이 말의 잘못은 어찌할 수 없네.〔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라는 시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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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家訓).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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