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세상사는 이야기

남존여비(男尊女卑 )

淸潭 2024. 3. 27. 15:39

남존여비(男尊女卑 )

https://sjgold.tistory.com/17111529

淸潭 2024. 3. 2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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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It's nice to have a girl around the house

집안에 여자 하나 들이는 건 좋죠.

1960년대 미국 광고 中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자연적으로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의 관계,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이다.

  男尊女卑 란 ?

남성은 존귀하고 여성은 비천하다는 뜻의 단어이다.

 남존여비는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세계관을 설명하는음양(陰陽)’ 개념에서 기원한다. 음양이란 단어는 처음에는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두 가지 상반된 기본 요소 또는 동력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점차 개념의 발달과 함께 건곤(乾坤)으로 추상화되고, 남성성과 여성성에 적용되어 사회 신분적인 가치로 쓰이게 되었다.

 『주역』에는건도(乾道)는 남자를 만들고 곤도(坤道)는 여자를 만든다고 하였고,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데 그것을 본떠 건괘와 곤괘가 자리 잡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늘· · 인간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인데, ()은 건괘(乾卦)가 되어 하늘과 남자에 배속되고, ()은 곤괘(坤卦)가 되어 땅과 여자에 배속되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자연현상과건괘와 곤괘가 자리 잡는다라는 괘의 배열 순서가 결합하여 천존지비(天尊地卑)나 양존음비(陽尊陰卑)로 도출되었다. 다시 말해 높고 낮은 천지의 공간적인 위치로부터 귀하고 천하다는 사회적인 개념을 도출한 것이다. 하늘은 높음과 남자에 유비(類比)되고, 땅은 낮음과 여자에 유비되면서 남존여비라는 개념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이치로 합리화된 남존여비는 정치와 생활 속에서 다양한 불평등 양상을 드러내었다. 남자는 이끌고 여자는 따른다는남수여종(男帥女從)’, 여자를 남자의 종속적인 위치로 설정한삼종지도(三從之道)’, 아내는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여필종부(女必從夫)’ 등의 용어가 사회적으로 통용되었다. 또 유교 경전의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거나여자는 재능이 없는 것이 덕()”이라는 말은 남존여비 관념을 강화시키는 지식의 근거가 되었다.

 유교 사회 조선에서는 이러한 관념에 근거하여 여자의 사회적 활동을 금지시켰는데,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이 여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여자란 본디 남자보다 낮다는 관념은 남자에게 혼인관계를 무효화시킬 권한을 주었다. 강제 이혼의 요건인 칠거지악(七去之惡)에는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은 경우, 아들을 낳지 못한 경우, 남편의 다른 여자를 질투한 경우,[1] 병에 걸린 경우, 말이 많은 경우 등이 있다. 여자를 도구화하고 사물화시킨 이러한 규정들은 여자의 지위나 인격이 근본적으로 비천(卑賤)하다는 관념이 있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남자에게는 남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인생삼락(人生三樂)으로 사람으로 태어난 것, 남자로 태어난 것, 오래 산 것을 들고 있다. 즉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데 사람으로 태어난 것,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데 남자로 태어난 것, 태어나 바로 죽기도 하는데 95세가 되도록 살고 있는 것을 들었다. 반면에 여자는 남존여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스스로 남자를 존대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자가어와 비슷한 일이 고대 서양에서도 있었는데,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1)인간으로 (2)아테네에서 (3)남자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2. 발생하는 원인[편집]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남존여비 현상이 존재해 왔는데, 그 과정과 기원을 짧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과거 남성이 완력()을 기준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남아선호사상이 생겨났었다. 소규모 사회일땐 크게 부각되지 않았었지만, 공동체가 커질수록 사회시스템이 복잡해졌고, 기존에 있던 선호사상의 영향으로 대부분 남성이 사회적 지위를 잡게 되면서 사회적 활동이 증가하며 그 권리가 상승했을 것이다. 동시에 여성은 출산과 육아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내게 되면서 사회활동이 저하되었다. 이때부터 남녀간의 차등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한남아선호였던 사상은여아혐오가 내포될 정도로 극단적인 양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변질된 사상은남존여비의 이름으로 여러가지 제약들을 이용해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제한되게 함과 동시에, 남성에게는 사회적 위치를 높일 수 있는 활동을 펼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고위층들 사이에선 집안의 대를 이으며, 관직에 나가 중요한 일들을 수행하던 남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적 시스템이 구축되어 존귀한 취급을 받았고. 출산과 양육, 여러가지 예법, 지위에 따른 체면 등으로 인해, 여성의 외부활동이 상당한 제한되면서 생기게 된 현상이란 것이다.

 처음엔 딱히 남존여비라고 표현할 만큼의 큰 차이는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서서히 남자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당연해진다면 가령 귀중한 교육의 기회가 생겨도 그 기회는 힘든 일을 다 하고 중요한 결정을 다 내린, 남자에 그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사회의 지도층은 남성이 되기 십상이다. 설령 지도층에 있는 남성이 딱히 남성우월론자가 아니더라도 남성이 계속해서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사회라고 생각되면 어드밴티지는 남성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랫동안 인류는 전쟁이 많았고 전쟁이 나면 남자들은 전장에서 많이 죽고 진쪽은 학살이 기본이었다. 그렇게 남자가 대량으로 죽어나갔기 때문에 희소자원인 남성이 우대를 받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전쟁 중이나 전후 시대에 남존여비가 강해졌다가 평화가 지속되면 지위의 격차가 줄어들었다 하는 일이 반복되었는데 전후 러시아나 베트남 등의 일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전쟁이나 대량학살이 없는 현대 국가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 상황에서 수백 년에서 길게는 수천 년간 진행되면 남존여비 사상은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된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남존여비가 덜하냐 더하냐의 차이는 생기게 되지만[2], 덜하든 더하든 은연중에 남존여비가 남아있는 곳이 대부분인 이유는 이런 현상에 기인한다.

 당장 현대에서도 맞벌이를 하지 않는 집안을 보자. 남자만 돈 버는 일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은연중에 남자의 발언권이 세지기 십상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결혼을 했다면 돈을 쌓아두고 사는 게 아닌 이상 가족 중 누군가는 돈을 벌어와야 한다. 반면 가사는 결국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돈을 버는 일)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자체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3] 문제는 그 때문에 가정에서의 발언권에 차이가 생겨난다는 부분.

 거기다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는, 그리고 아마 어지간해선 사라지기 힘든 남존여비의 마지막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부분은 바로남자가 여자를 지켜야지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남성이 근력이 세고 여성은 상대적으로 약하므로 전투원으로서 남성이 효율적인 만큼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동시에남성이 근력이 세므로 여차저차한 과정을 거쳐서 더 많은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라는 개념 면에선 같다. 그리고 그 부분이 결국 권리로 이어진다. 한국에서는 남성만 군대에 강제로 징병되는 부분이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며, 넓게 보면 목숨이 위험할 때 가급적이면 노약자나 여성, 어린이 등을 보호하게 되는 불문율이나 심지어 약자를 배려하는 부분이나 레이디 퍼스트 등의 개념들도 그런 것.

 반대로 여성만이 아이를 낳을 수 있고[4][5], 추운 극지방이나 식량이 없는 극한 상황에서는 지방이 많은 사람이 생존할 가능성이 큰데 보통 여성이 남성보다 지방이 많기 때문에 소수의 몇몇 상황에서는 여성의 신체가 유리할 수 있다. 또한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투쟁 행위가 그다지 이득이 없기 때문에 남성의 가치 자체도 딱히 높지 않다. 현실에서는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여존남비의 사회도 아마 이런 여성의 신체적 특성에 의해서 종합적으로 사회에서보다 많은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바람에 여존남비의 사회가 성립된 것이라고 볼수 있겠다.

 3. 각국의 남존여비[편집]

 3.1. 미국, 유럽[편집]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 그가 우리 프랑스인이든, 독일인이든[6], 국왕이든, 노예든, 학자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저 미개한 아프리카 원주민조차 우리와 똑같은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다. 단 하나 여성은 예외다.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다. 그러므로 교육시킬 필요도 없으며, 정치에 참여시켜서도 안 된다.

장 자크 루소, 《에밀》 中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남존여비적 사고관이 있었으며, 비록 계몽주의와 여성 참정권 쟁취 등의 영향으로 사그러들긴 했으나 길게는 20세기에도 보수적 관점이 지속되었다. 맨 위에 인용된 어구와 잡지광고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 종교적으로 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서도 주신은 모두 남신이었다. 기독교에서도 중심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

 인간의 이성을 발견한다는 16세기에도 유럽에서는 남존여비적인 관념이 지배적이어서, 당시 서양 철학사에서도 이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당시 남성 국왕들은 거의 대부분 대놓고 첩을 거느렸다. 심지어 남성 국왕이 첩을 거느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로 여겨졌다. 한 예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랑하는 애처가여서 이전의 프랑스 국왕들과는 달리 첩을 거느리지 않았는데, 그러자 프랑스 백성들은 루이 16세가 성불구자인 모양이라며 부정적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루이 16세 이전의 국왕들인 루이 14세나 루이 15세는 여러 명의 첩들을 거느렸고 프랑스 백성들은 그런 국왕들의 성생활이 당연하다고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평생 동안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당시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에서는 설령 여왕이라고 해도 여자인 이상 결혼을 하면 남편한테 복종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기에, 자칫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했다가는 남편한테 권력을 빼앗길까봐 우려했던 것이다. 실제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두번 결혼했는데 하필 그 상대가 신하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여서 국내외적으로 비웃음을 사고 위신이 떨어졌다.

 또한 19세기 대영제국의 시대에도 정작 빅토리아 여왕은 "여성의 정치 참여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라면서 여성의 참정권 요구를 부정적으로 여겼다.

 모르몬교 본산인 현 유타 주에서는 아직도 일부다처제 남성들이 존재하고 그 수가 미국 전역으론 무려 만 명이 넘는다. |자세한 통계자료. 심지어 일부다처제 tv show도 오늘날 미국에 존재한다.일부다처제 tv show

 3.2. 한국[편집]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 여학교이니

세상 천지에 차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남자들과 평등하자 앞 다투어 소리내니

만물 가운데 이런 일이 또 어디있나

 내칙지문과 열녀전

아름다운 옛 규범이 과연 어떠하기에

그 누가 변화를 이 지경까지 주장했나

백번 놀라고 천 번 경악하고 가히 곡할 일이네

유인석 의암집

▲당시 사대부들에게 있어 바깥활동은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교육을 받기 위해 전문시설(서당, 성균관)에 가는 것도 남성의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7]

 조선중기 이후. 양반가의 여성들은 그 사회적 지위가 지극히 열등하였는데, “여성은 알게 할 것이 없고 다만 좇게 할 것이라는 유교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그 근본이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기에, 하류층의 여성들과 달리 매우 억압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를 반증하듯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까지 있었는데, 당시 다소곳하지 못하고 시끄러운 것은 양반들의 미덕이 아니었고, 여성이 집안에서 좌지우지하여 언권(言權)을 발휘하면, 남성이 집안의 기둥이고 여성은 그러한 남성을 보조한다는 양반들의 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8][9]

 고려와 조선 초기만 해도 딸은 상속에서 차별대우를 전혀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 등,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예법에 따른 차별적 대우와 다른 양태를 보였다. 물론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던, 고려와 조선초기도 여성의 관직진출은 불가능했었지만, 고려는 여성의 외출과 개인적인 업무에 대한 제약이 없었던 반면, 조선에 들어서면서 여성이 친가에 방문하는 것조차 막을 정도로, 개인적인 외부 활동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게 된다.[10]

 사실 계급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이러한 제약들은 없거나, 약해졌으며, 양반과 평민은 서로가 정 반대의 세상을 살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친족 및 상속 분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양반들 사이에서 부계친족제도가 강화되고 남존여비 사상이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중반 이후이며, 평민들 사이에선 이러한 사상은 19세기 말기쯤에 올라오다가, 20세기에 들어 급격한 근대화기존의 경제체계 붕괴남성에 대한 의존도 상승처럼 여러 사회적 혼란들이 겹겹이 일어나는 바람에 남존여비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성리학 이념의 정치적 강화에 따른 종법제도의 확립의 여파로 설명하던 이전의 이론을 넘어서, 양란 등의 전쟁으로 인한 가정의 파괴와 성 관념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조처, 혼인 이후 거처의 변화에 따른 여권의 하락, 양반 지주의 토지 확대 정체에 따른 장자상속제로의 이행의 여파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하는 견해가 등장하고 있다.

 남존여비 풍조에 고통받았던 한 예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육영수인데, 육영수의 아버지인 육종관은[11] 자신의 딸이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배화여고)의 수학여행(일본)도 못 가게 반대했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급속하게 생긴 풍습이라(특히 일반민중에게) 그 유지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위의 문제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남존여비의 해소과정은 발생 과정보다 더 급속해서 한 시대를 사는 모든 세대별로 성차별 수위의 스펙트럼이 다 다른 수준이다.

 3.3. 중국[편집]

송나라 이후부터 여성들에게 천년동안 전족이 실시되었다. 송나라때는 그저 꽁꽁 싸매던 것을 그 이후에는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두 방향으로 접고 천으로 꽁꽁 싸맨 뒤 꿰매어 작은 신발을 신겨 자라지 못하게 했다. 이 과정을 겪으면 발가락 뼈가 부러지고 굽고 자라지 못하면서 작은 발이 만들어진다. 이상적인 전족의 크기는 점점 작아졌고, 명나라와 청나라시기에는 삼촌금련 즉, 성인 여성의 발이 10cm(3) 이하인 것을 으뜸으로 쳤다.

 처음에 이러한 전족문화는 왕실~귀족 여인들이 주로 행해지는 문화였다. 그런데 어느순간 민간에서도 이러한 풍습이 퍼져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수많은 여성들이 전족을 가지게 되었다. 2010년을 기준으로 전족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과거의 흔적을 가지고 계신 할머니들을 찾아볼 수 있다.

 뼈를 꺾는 전족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제대로 걷기가 힘들어 노동력을 상실하였으며, 평생 관리해줘야 하는 등 여성에게 평생동안 족쇄로 작용하였다. 이토록 여성을 억압하는 전족이 널리 퍼진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로 작은 전족을 가진 여성은 순종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뼈를 접어 전족 모양을 만들기만 하는 것도 몇년이 걸리고 고통스러운데, 이 전족을 작게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했다. 예쁜 전족의 기준은 연꽃잎 모양의 작고 가는 발이었다.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으로 더 꽁꽁 싸매고, 뼈를 더 많이 꺾어야 했다. 가는 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발에 그릇조각을 넣은 뒤 천으로 동여매 살이 썩어서 떨어져나가게 하는 등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몇년동안 이런 과정을 견뎌내 작은 전족을 가지게 된 여성은 남들보다 순종적인 성격이라고 여겨져 인기가 있었다.

두 번째로 전족은 여성의 괄약근을 강화시킨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족을 한 여성은 발이 기형이 되어 제대로 서고 걷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걷는 데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게 되고, 이것이 괄약근을 강화시킨다고 본 것이다. 즉 전족을 한 여성은 남편을 성적으로 만족시키기 좋다고 생각되었다.[12]

세 번째로 전족을 한 여성은 집안일을 잘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족을 한 여성은 걷기가 힘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실내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는 남성들에게 집안일에 충실한 여성으로 비춰졌으며, 남성들은 전족을 한 여성이 집안일을 더 잘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에 발이 큰 여성은 집밖으로 나돌아다니기만 한다고 생각해 좋아하지 않았다.

 즉 종합하면전족을 한 여성은 본인의 고통스러움을 감내하면서 남편에게 기쁨을 준다는 이유로 남성들에게 선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전족 문화는 궁정에서 시작되어 상류층에게 퍼졌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들을 모방하고 싶어했던 평민계급까지 전족이 확산되었다. 당시에는 얼굴이 예쁜 것보다 발이 작은 것이 미인으로 여겨졌으며, 남성들은 손바닥 위에 두짝이 다 올라갈 정도로 작은 전족 신발을 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남성의 기쁨을 위해 여성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기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남존여비의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3.4. 일본[편집]

3.4.1. 황실에서[편집]

일본 황실의 경우 남존여비가 무척 심한데, 메이지 덴노 시절에 만들어진 황실전범의 규정에 따라 남성만이 황위를 계승할 수 있다. 황태자 부부의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를 염두에 둔 여성 덴노 허용 논의도 한때 활발했으나, 2006년 차남 후미히토 친왕이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 친왕을 낳으면서 잠잠해져 버렸다. 그 후, 아들을 낳은 차남 일가가 각광을 받고, 아들이 없는 황태자 일가는 홀대를 받았다.

 또한 일본 황실의 공주들은 평민과 결혼하면 황족의 신분을 잃고 남편의 신분을 따라 평민이 된다. 그러나 왕자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아키히토 덴노의 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2005년 평민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한 후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되었으나, 그녀의 큰오빠 나루히토 황태자와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은 평민과 결혼해서도 여전히 황족의 신분이다.[13]

 이 외에도 공식 석상에서 아내는 남편과 나란히 걷지 못하고 3걸음 뒤에서 따라가야 하며,[14] 마사코 황태자비의 경우 약혼 발표 기자회견 당시 신랑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고작 19초 길게 말했다고 이상하게도,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조차 묘하게 비난거리가 되었으며, 불임의 원인은 나루히토 황태자 쪽에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나 마사코 황태자비 혼자서만 비난과 압박을 받기도 했다.

 또한 후미히토 친왕의 아내 키코 비가 1990년 결혼식 당시 신랑의 머리를 다듬어주는 모습의 사진이 찍혔는데, 이를 두고 감히 남편의 머리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만큼은 아니지만 키코 비도 결혼 후 딸만 둘을 낳았다는 이유로 압박을 받았다고 하며, 결국 40세의 나이에 어렵게[15]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 친왕을 임신하고 출산해야 했다.

3.4.2. 일반에서[편집]

가정이나 언어생활에서 가부장적인 경향의 잔재가 남아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남편을 지칭하는 단어가 主人, 주인이다. 또한 친족을 가리키는 표현에서, 여자가 남편의 가족들(인척)들을 부르는 표현은, 나이에 상관 없이 높임 표현이다. 요즘은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남성어와 여성어의 구분도 그런데, 여성어는 남성어의 경어와 비슷하다.[16] 또한 과거에는 가정에서 목욕하는 순서를 (손님)→아버지아들어머니딸에 맞추기도 했다고 한다.[17]

 3.5. 러시아[편집]

중세 러시아에서는 여성에 대한 대우가 열악해서 심각한 성차별을 당했는데, 여자를 어리석고 열등하며 도덕 관념이 없는 존재로 보는 여성관의 영향이 컸다. 여성의 결혼은 전적으로 아버지, 시아버지, 남편에게 달린 일이었고, 결혼 전에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를 채찍으로 때린 뒤 그 채찍을 남편이 될 남성에게 건네주는 관습이 있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거나, 혹은 재혼하기 위하여 강제로 이혼하게 한 뒤 아내를 수도원으로 보내어 사회와 격리시키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런 관념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다가 소련시절에 와서는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일정부분 타파되었다.

 조선에서도 그랬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일수록 사회적으로 활발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6~17세기의 러시아 상류층 여성은 태어나고, 성장할 때부터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지만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여성을 경제 활동에서 격리시킬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하층민 여성은 비교적 자유롭게 남자와 부대끼곤 했다.

 현재도 어느정도 남존여비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건 거의 남녀간의 완력차이에 더해 전혀 개선되지 않는 치안문제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참고 - 중세 러시아 여성인권 잔혹사

 3.6. 중동[편집]

현대에 이르러 가장 강력한 남존여비 지역은 역시 중동이다. 히잡은 여성들만 착용하고 특히 일부 극렬 이슬람주의 국가에서는 여성들은 마치 닌자마냥 차도르, 니캅, 부르카로 얼굴 전체을 가리고 다녀야 한다. 다만 아무리 더워도 여자는 몸을 다 가리는 옷을 입어야만 하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고역이 장난이 아니라는 시각은 사실이 아니다. 서아시아 국가들보다 좀더 세속적이고 여성의 인권이 나름 보장된 북아프리카 등지에서도 여성들이 히잡을 쓰는 경우가 많다.

 대도시가 아닌 이상, 태양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사막 지대에서는 아무리 더워도 히잡같은 것으로 몸을 가리지 않으면, 피부가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18] 그래서 이 지역의 원주민들인 베르베르인들같은 경우는 남자도 눈만 내놓고 몸을 꽁꽁 숨길 정도다. 여성의 히잡 착용은 어느 정도 현실적인 측면도 있는 법이다. 물론 그것들을 강요하는 건 빼도박도 못하는 남존여비인 악습이다. 그래서 세속주의 성향의 아랍 민족주의 테러단체인 헤즈볼라의 경우는 기독교인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고 현재도 인구의 40% 가량이 기독교인인 국가의 정당이라서 아예 여성들에게 히잡을 입든지 말든지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심하냐 하면 올림픽에서도 배구나 농구선수들 중 여성들은 유니폼에 히잡을 덧대어 착용하고 나와서 시합을 할 정도이며[19] 수영같은 종목은 아예 여자가 출전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이자벨 아자니를 비롯한 유럽 여성들의 상당수가 히잡 반대운동을 하고 있다. 또한 챠도르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입기 어려운 비싼 옷이라 중동 여인들 입장에서는 없어서 못 입는 경우가 더 많고 가능하면 비싼 챠도르를 입어서 과시하고 싶은 마음을 지닌 사람도 많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강요된다면 문제지만 말이다.

 3.7. 인도[편집]

사티 항목과 주방에서 타죽은 부인 항목 참조. 사티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불구덩이로 집어던져버리는 악습인데 이미 19세기에 동인도 회사에서 금지한 악습이지만 사티를 금지하는 법률이 1987년에 제정되었다는 소리는 법으로 금지해야 할 만큼 계속 이어져왔다는 소리와 다름 없다. # 더군다나 인도의 열악한 행정력과 치안상황을 생각해본다면...

 4. 현대의 남존여비[편집]

현대에는 상당히 많은 국가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인권에 대한 관심과 여성 운동이 발달하면서, 대놓고 남존여비라고 할 만한 제도나 문화는 거의 다 없어졌다. 서구에서는 공산권 국가였던 나라들은 공산주의 자체가 인민의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에 남존여비 사상을 완전히 쓸어버리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여성의 사회 참여도가 비교적 높이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남자를 하늘()로 보고, 여자를 땅()으로 보는 관점이 있었다. 이에 반박하는 개드립이 있다. 땅값이 더 비싸다는 것이다. 혹은 남자를 하늘로 간주하는 사람 앞에서, 대기오염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고, 이어 하늘 천()자의 위에 한 획을 그어 지아비 부()자를 만들어, 남자는 하늘보다 높다는 뜻으로 개드립 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개발도상국에서는 남존여비 사상이 만연하며, 그러한 사회에서 자란 여성들도 남성중심적 사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선진국에서 남존여비적인 제도가 거의 사라졌다고 하는 것도 모두 법적으로만 필수성이 없어지고 이를 어길 시의 대가가 표면적으로나마 표시되었다는 것이지,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주변에서 강요하고 이에 여성 또한 휩쓸려 순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시월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이 남편 집안의 며느리로서 핍박 받을 수도 있지만, 결혼 후에 여성으로서 핍박 받을 수도 있기 때문. 이어 딸들이 성차별 등의 방식으로 핍박 받기도 하는데, 이를 주도하는 사람이 같은 여성인 엄마일 수가 있다. 엄마들은 자신들이 집안에서 또는 시월드에서 당한 것을 딸에게 대물림하는 셈인데, 이는 마치 군대의 내리갈굼과 유사한 것이다.

 서구권에서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부부동성인데, 현재 일본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부부성 같이 쓰기 제도를 법적으로 폐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기를 강요하는 등의 이유로 결국 성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또한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더라도, 자식에게 남성의 성씨를 물려주는 것이 문화적으로 자리잡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서구적 시각에서 본다면, 베트남을 제외한 유교 문화권은 여성이 '바깥일'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여성이 자아실현에 소극적인 풍조나, 정치 참여에 소극적인 경향이 있다. 1940년대에 "할 수 있다!(We can do it!)"라는 문구 앞에서 여성이 리벳공으로 일하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홍보하던 미국 같은 문화권에서, 한국은 물론 겉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중국조차 여성이 노동을 하며 가정을 돕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의 그늘 밑에서 집안일을 하며 사는 것은 아내의 '도리'이자 행복한 것이라는 구실로 노동권을 탄압하는 것 같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출산 휴가와 같은 문제와 결부되면 한국에서도 문제 의식이 좀 있다.

 중동에서의 예를 들자면 히잡이 있는데,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면 여성의 히잡 착용이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지만, 주변의 강요나 시선, '외간 남자로부터의 보호' '남편에 대한 순종의 근거'라는 구실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히잡 착용을 하는 경우이다.

 북한은 북한/인권 문서에서 보듯 최근에는 여성들이 자신이 차별받고 있다는 인식이 늘고 있다. 남성인 것이 우대받는 건 맞으나 경제권을 쥔 여성의 저항도 심하다. 남성이라도 권력, 빽이 없으면 그런 여성에게 밀리며, 권력이 있는 여성은 내연남을 두기도 한다. # 탈북자인 한송이 씨가 북한은 남자가 하자고 하는 것은 모두 따라야 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가 논란이 일었다. 함경도 계열 출신이다 보니 센 농담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는데 이것이 인터넷 커뮤니티로 퍼지며 북한이 진지하게 이슬람 국가보다 심한 남존여비 국가라는 주장이 퍼졌다. 어떤 곳은 저런 것보단 서로 부끄러워 하며 피하는 내외가 심했다는 등 지역마다 차이가 큰 것으로 보이며, 한송이 씨의 고향인 혜산시도 남자가 데이트 하며 양산을 받쳐준다든지 집안일 분담하는 것을 보기 좋다고 하는 등 바뀌는 모습이 있다. 가장 엄밀히 묘사하면 가부장적인 사회이므로 남자라서 이정도는 참아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 이혼을 하면 쪼잔하면 안되므로 남자가 여자에게 돈을 다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농촌은 몰라도 도시에서는 집안일, 밥해주는 일을 남자가 해주는 경우가 2010년대 중반 이후 급속도로 늘어, 시장에서 남자가 아기를 업고 다니는 것이 관찰되기도 한다. 한류의 영향과 정권 차원에서 남자를 통제하느라 여자가 주로 실질적으로 돈을 벌게 된 사회 구조 때문에 몇 년 사이에 크게 바뀐 모습이다.

 다만 남성인 권력자가 여성을 괴롭히는 것은 최근에도 문제가 크다. 독재를 위해선 굳이 남존여비가 필요하지 않아 이 부분은 세계 최악까진 아니다. 대신 권력을 가지고 괴롭히는 것은 탈레반, 이슬람 국가와 비교하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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