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팔도(八道)의 연혁(沿革)

淸潭 2020. 4. 24. 12:27

팔도(八道)의 연혁(沿革) 


경기(京畿) 한북(漢北) 지역

 

()나라 때는 기자조선(箕子朝鮮), ()나라 때는 낙랑(樂浪)에 예속되었는데, 뒤에 공손도(公孫度)가 대방군(帶方郡)을 두었다. ()나라 때는 백제에, ()나라 때는 신라에 들어갔고, ()나라와 금()나라 때는 궁예(弓裔)의 근거지가 되었다. 고려에 들어가서는 관내도(關內道)가 되고, 우리 태종 때는 한남(漢南)과 합하여 경기가 되었다.

 

경기 한남(漢南) 지역

 

주나라 때는 한()의 땅이었고, ()나라 때는 백제에 편입되었는데, 백제가 광주(廣州)로 도읍을 옮기면서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 불렀다. 당나라 때는 신라에 들어갔고, 신라 말에는 궁예에게 들어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고려에 편입되어 양광도(楊廣道)가 되었다. 태종조에 소사(素沙) 이북의 땅을 떼어 경기에 예속시켰다.

 

충청도(忠淸道)

 

주나라 때는 한()의 땅이었다가, ()나라 때는 백제에 들어갔다. ()나라 원휘(元徽) 연간에 백제가 도읍을 공주(公州)로 옮기면서 고마성(固麻城)이라 호칭하고, 또 부여로 옮기면서 거발성(居拔城)이라 불렀다. 당나라 때는 신라에 들어가 웅주(熊州)를 설치하였고, 신라 말에는 견훤(甄萱)의 근거지가 되었다가 고려에 들어가 중원(中原), 하남(河南) 두 도()가 되었다. 예종조(睿宗祖)에 양광도(楊廣道)에 합쳤는데 명종(明宗)이 나누어 충청도로 만들었고, 충숙왕(忠肅王) 때에 또 양광도에 합쳤다가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충청도라 불렀다.

 

전라도(全羅道)

 

주나라 때는 한()의 땅이었다가, ()나라 초기에 기준(箕準)의 근거지가 되었다. 애제(哀帝) 때는 그 북쪽 경계가 백제에 들어갔고, 당나라 때는 신라에 들어가 전주(全州)와 무주(武州) 두 주()를 두었다. 신라 말에는 견훤의 근거지가 되어 전주(全州)를 수도로 하였다. 고려에 들어가 강남(江南)과 해양(海陽) 두 도()를 두었다가 뒤에 전라도로 합쳤다.

 

경상좌도(慶尙左道)

 

주나라 때는 한()의 땅이었고, ()나라 때는 신라가 경주(慶州)에 수도를 두었으며, 당나라 때는 신라가 우도(右道) 지역을 합하여 상주(尙州)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 세 주()를 설치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우도를 합하여 영남(嶺南)ㆍ영동(嶺東)ㆍ산남(山南) 세 도로 하였다가 뒤에 경상도로 합쳤다. 본조(本朝)에서는 낙동강(洛東江) 동북을 나누어 좌도로 삼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합하여 한 도로 삼았다.

 

경상우도(慶尙右道)

 

()나라 때는 변한(弁韓) 12()의 땅으로서 통합 수도는 김해부(金海府)인데, 구야(狗邪) 또는 가야(伽倻)라고 불렀다. ()나라와 진()나라 때에 신라에 들어갔고, 고려 때는 경상도가 되었으며, 본조에서는 낙동강 서남을 나누어 우도(右道)로 삼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합하여 하나로 하였다.

 

강원도(江原道) 영동(嶺東)

 

주나라 때는 예()의 땅으로서 강릉(江陵)을 수도로 하였고, ()나라는 창해군(滄海郡)을 두었으며, 뒤에 신라로 편입되어 명주 소경(溟州小京)을 두었다. 고려에 들어와 강릉도(江陵道)가 되었는데, 혹은 삭방도(朔方道)라고도 한다. 고려 말에는 교주도(交州道)에 합하였고, 본조에서는 영동과 영서를 합하여 강원도로 하였다.

 

강원도 영서(嶺西)

 

주나라 때는 맥()의 땅으로서 춘천(春川)에 도읍하였고, ()나라 때는 창해군(滄海郡)에 예속되었다. ()나라 때는 신라에 들어가 삭주(朔州)를 두었는데, 뒤에 궁예의 근거지가 되어 철원(鐵原)을 수도로 하였다. 고려에 들어가 교주도(交州道)가 되었다.

 

황해도(黃海道)

 

주나라 때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땅이었고, ()나라 때는 위만(衛滿)의 땅이었다가 그 뒤에 낙랑에 예속되었는데, 뒤에 공손도(公孫度)가 남쪽 경계를 떼어 대방군(帶方郡)을 두었다. ()나라 때는 낙랑은 구려(句麗)에 들어가고 대방은 백제에 들어갔다. 당나라 때는 신라에 들어가 한주(漢州)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궁예의 근거지가 되었다. 고려에 들어가서는 처음에는 관내도(關內道)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나뉘어 서해도(西海道)가 되었다. 본조에서는 초기에 풍해도(海道)로 삼았다가 이윽고 황해도로 고쳤다.

 

평안도(平安道)

 

주나라 때는 기자조선의 땅으로서 평양(平壤)을 수도로 하였고, ()나라 때는 패강(浿江) 이북은 한(), 요동(遼東) 이남은 위만에 속하였다. ()나라 때는 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당나라 때는 패강 이북은 발해(渤海), 이남은 신라에 들어가 한주(漢州)에 예속되었다. 고려는 서경(西京)을 두어 패서도(浿西道)로 삼았다가 뒤에 북계(北界)로 개칭하였다. 지금 운산(雲山) 이북은 여진(女眞)에 넘어갔다. 고려 말에는 원()나라에 함락되어 동녕부(東寧府)를 두었다가 뒤에 돌려주자 고려가 서북면(西北面)을 삼았다. 본조에서는 압록강(鴨綠江) 내지(內地)를 모두 개척하여 평안도로 삼았다.

 

함경도(咸鏡道) 관남(關南)

 

주나라 때는 동옥저(東沃沮) 땅이었는데 함흥(咸興) 이남은 예() 땅이었다. ()나라 때는 옥저의 땅은 현도(玄菟)로 하고, 예의 땅은 임둔(臨屯)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낙랑에 합쳤는데, 이윽고 구려에 들어갔다. 당나라 때는 안동부(安東府)에 예속시켰다가 이윽고 발해에 들어가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를 설치하였고, 덕원(德源) 이남은 신라에 들어가 명주(溟州)에 예속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정평(定平) 이남은 삭방도(朔方道)에 예속되고 이북은 여진에 들어가 갈라전(曷懶甸)이라 불렸다. ()나라 때는 정평 이북은 금곡라로(金谷懶路) 총관부(摠管府)에 예속되었고, ()나라 때는 합란부(合蘭府)를 함흥(咸興), 쌍성부(雙城府)를 영흥(永興) 북쪽에 두었다. 원나라 말에는 길주(吉州) 이남은 모두 고려에 편입되어 삭방도라 칭하였다. 우리 태종조에는 남북관(南北關)을 합하여 영길도(永吉道)라 하였다가 이윽고 함길도(咸吉道)로 고쳤으며, 또 영안도(永安道)로 고쳤다가 뒤에 함경도로 고쳤다.

 

함경도 삼수(三水)ㆍ갑산(甲山) 지역

 

주나라 때는 고구려 땅이었다. 한나라 때는 서개마현(西蓋馬縣)을 두었으며 현도군에 예속하였는데, 광무제(光武帝) 때에 구려에 들어가 졸본계(卒本界)가 되었다. 당나라 때는 안동부(安東府)에 예속하였다가 이윽고 발해에 들어가 솔빈부(率賓府)에 예속되었다. ()나라 때는 여진에 들어갔고, ()나라 때는 휼품로(恤品路)를 설치하였는데, 속빈(速頻)이라고도 하였다. 원나라 때는 여진에 들어갔고, 원나라 말에는 고려에 들어가 갑주(甲州)를 두었다. 본조에서는 갑산ㆍ삼수 두 부()를 두었다.

 

함경도 관북(關北) 지역

 

주나라 때는 북옥저(北沃沮) 땅으로서 치구루(置溝婁)라고도 칭하였다. 한나라 때는 현도군에 예속하였다가 뒤에 낙랑에 예속시켰는데, 이윽고 구려에 편입되어 책성(柵城)이라 칭하였다. 당나라 때는 안동부에 예속하였다가 이윽고 발해에 편입되어 동경 용원주(東京龍原州)를 설치하였다. ()나라 때는 여진 부락(女眞部落)이었고, ()나라 때는 호리개로(胡里改路)에 예속되었다. 원나라 때는 호리개 도온(胡里改桃溫) 등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여 합란부(合蘭部)에 예속하였는데, 뒤에 여진 알타리 부락(斡朶里部落)이 되었다. 본조에서는 두만강(豆滿江) 이내의 땅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六鎭)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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