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우리의옛것

고분군 발굴

淸潭 2018. 6. 9. 10:27

경남 창원 현동에서 가야시대 최대 규모 고분군 발굴
◇ 고대 선박 모습 가늠할 돛단배 모양 토기 출토 함안 중심 번성했던 아라가야 유적으로 추정

◇ 최근 경남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에서 아라가야의 왕성 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된 데 이어, 이곳에서 20㎞가량 떨어진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서 3~5세기 아라가야 지방세력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시대 최대 규모 고분군이 발굴됐다. 특히 바다와 인접한 이곳에선 고대 항해용 선박을 형상화한 배 모양 토기가 출토돼 관련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 사진: 경남 창원시 현동 아라가야 고분군에서 출토된 배 모양 토기. 고대 가야의 선박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보물급 유물로 평가받는다.

○··· 삼한문화재연구원은 8일 창원 현동 발굴현장에서 주민 현장설명회를 열었다. 이곳은 거제시 장목면과 창원시 우산동을 연결하는 거제~마산 국도 건설구간의 한 부분으로, 삼한문화재연구원이 부산지방국토관리청 의뢰를 받아 지난해 6월부터 올해 11월까지 이 일대 3만582㎡를 발굴하고 있다. 발굴작업이 끝나면 이곳엔 국도 나들목이 건설될 예정이다.아직 발굴조사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이곳에선 청동기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무덤·집터 등 유구 1000여 기가 확인됐다.

이 가운데 640여기는 나무로 곽을 짠 덧널무덤으로, 무덤 안에서 통 모양 굽다리접시와 불꽃무늬 토기 등 아라가야 계통 토기와 망치, 덩이쇠, 둥근 고리 큰 칼, 비늘갑옷, 투구 등 2500여점의 가야 유물이 출토됐다.특히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길이 5.6m, 폭 2.0m 크기의 387호 덧널무덤에선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철창 등과 함께 가야시대 항해용 돛단배를 형상화 한 길이 29.2㎝, 높이 18.3㎝ 크기의 배 모양 토기가 출토됐다. 날렵한 조형미를 갖춘 배 모양 토기는 세부적인 기능들이 정교하게 표현돼 있고, 선체 아랫부분에 굽다리를 붙여 세울 수 있게 되어 있다.


◇ 경남도 가야사연구복원추진단은 “가야시대 항해용 돛단배를 형상화한 토기가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것은 처음이다. <△ 사진:> 경남 창원시 현동 아라가야 고분군 발굴조사 현장.

○··· 중국·낙랑·왜 등과 바다를 통해 활발하게 교역했던 것으로 알려진 고대 가야인들의 선박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보물급 유물”이라고 배 모양 토기를 평가했다.

아라가야는 가야 6국 중 하나로, 경남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다. 아라가야의 중심지였던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에선 아라가야 왕성 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최근 발굴됐다.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사진 경남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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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굴왕’이 묻어버린 백제무덤 80년만에 찾았다
◇ 공주 교동 발굴중 학계 찾던 백제 전축분 발견 30년대 도굴왕 가루베 조사 뒤 위치 뺀 기록만 남겨 무령왕릉과 같은 터널 얼개…벽돌은 달라 무덤 미완성 여부 놓고 학계 논란일 듯 부근 야산 꼭대기선 백제 석축 단 확인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 나와…국가시설 추정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백제 벽돌무덤인 옛 교촌리 3호분의 발굴 현장. 정연하게 벽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었다. 천장과 들머리 부분은 남아있지 않다.80년만이다.

○··· 약 국내 고고학계가 다시 발견하길 고대해온 백제무덤이 결국 나왔다. 백제 옛 도읍인 충남 공주에서 식민지시대 발굴된 뒤 묻혔던 백제의 고급 벽돌무덤(전축분)과 석축 시설이다.공주대박물관은 최근 공주시 교동 252-1번지 일대의 고분군 추정터를 조사한 결과 5~6세기 백제 웅진도읍시기 벽돌무덤(전축분)인 옛 교촌리 3호분을 찾아냈다고 7일 발표했다.

박물관 쪽은 또, 교동 공주향교 뒤쪽 교촌봉 꼭대기에서 옛 교촌리 2호분의 자취도 확인하고 이 유적이 무덤이 아닌 백제의 석축 단 시설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고 덧붙였다.


◇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옛 교촌리 3호분은 조선시대 지역민들 사이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중종 25년인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공주목’조를 보면, “향교 서쪽에 무덤이 있는데, 백제왕릉이라고 전한다”라고 밝힌 기록이 있다. △ 사진: 일제강점기인 1939년 가루베 지온이 발굴조사할 당시 찍은 옛 교촌리 3호분의 내부모습.

○··· 일제강점기인 1933, 1939년에는 ‘도굴왕’으로 악명 높았던 가루베 지온과 고고학자 사이토 다다시가 각각 무덤을 굴착조사했으나 발굴지점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뺀 채 조사내용만 요약된 기록들을 남겼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국내 학계는 3호분의 무덤 자리를 알지 못한 채 실제 발굴 위치를 찾기위한 지난한 작업을 벌여왔다. 지난해 12월 시굴로 시작된 공주대 박물관의 조사 끝에 무덤 실체를 마침내 확인하게 된 것이다.


◇ 재발견된 무덤 내부는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무령왕릉, 6호분과 같은 터널 모양의 얼개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천장과 묘실 입구 부분은 남아있지 않고, 내부 껴묻거리(부장품)들은 과거의 도굴과 발굴로 모두 사라졌다. 무덤방 벽면은 무늬 없는 네모꼴, 긴네모꼴을 한 벽돌들을 가로로 쌓아서 만들었다. 무늬있는 벽돌을 쓴 왕릉급인 송산리의 무령왕릉이나 6호분과는 양상이 다르다. <△ 사진:> 3호분의 북쪽 벽 부분을 가까이서 찍은 모습. 벽돌을 차곡차곡 가로쌓기 해 묘실 벽을 만든 얼개를 볼 수 있다.

○··· 조사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 무덤이 미완성인지, 완성된 뒤 파괴된 왕릉급 고분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30년대 무덤을 파서 처음 현황 조사를 했던 가루베는 일본에 돌아간 뒤인 1971년 출간한 <백제유적의 연구>에서 3호분을 축조하려다 그만둔 ‘미완성 고분’으로 단정한 바 있다.


◇ 교촌봉 산 꼭대기에서 확인된 백제시대의 석축 단 시설. 1939년 첫 발굴조사를 했던 가루베 지온은 이 유적을 백제 무덤(교촌리 2호분)으로 파악했지만, 공주대박물관의 최근 조사결과 국가의례 등을 펼쳤던 특수한 용도의 시설터로 확인됐다.

○··· 내부에 인위적으로 점토를 채웠고, 천장 부분을 쌓은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무덤방에 동·서·북쪽 벽만 쌓고 남쪽 들머리 통로는 조성하지 않은 정황이 보인다는 등의 견해가 근거였다. 그러나 공주대박물관 쪽은 이번 조사결과를 정리한 개략보고서에서 “가루베가 남긴 사진과 조사내용을 바탕으로 발굴된 무덤 얼개를 분석한 결과 터널식 천정을 쌓았다는 것을 알게됐다”면서 완성된 왕릉급 고분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3호분의 완성여부가 앞으로 학계의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전축분은 6세기 중국 남조에서 백제에 도입된 독특한 얼개의 외래풍 무덤이다. 불에 구은 벽돌을 정연하게 쌓아 사각진 묘실의 사방 벽으로 쓰는 것이 특징이다. △ 사진: 교촌봉 정상의 석축 시설 주변에서 나온 연꽃무늬 벽돌. 무령왕릉에 쓰인 무늬 벽돌과 거의 같다.

○··· 백제시대엔 대개 웅진도읍기에만 썼기 때문에, 남아있는 무덤도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무령왕릉과 6호분, 이번에 발굴된 교동의 옛 교촌리 3호분 정도다. 3호분은 무령왕릉, 6호분과 내부 얼개는 같지만, 벽돌유형이 달라 백제 전축분의 새 유형을 파악하는 단서를 얻게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 조사의 또다른 성과는 3호분 동북쪽의 ‘교촌봉’ 산꼭대기에서 백제시대 석축 단 시설터가 드러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유적 역시 가루베 지온이 1930년대 발굴갱(트렌치)을 파서 조사했으나, 구체적인 지점을 알리지 않고, 되묻어버려 해방 뒤 국내 학계가 위치를 찾는데 골몰해온 내력을 갖고있다. △ 사진: 공주 교동 일대의 구릉에 자리한 옛 교촌리 고분군 전경. 옆으로 공주 시가지가 보인다.

○··· 가루베는 이 유적을 이장 뒤 버린 무덤으로 보고 교촌리 2호 전축분이란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번 조사결과 2호분의 실체는 무덤이 아니라 네모꼴의 석축 단으로 드러났다. 터는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등 공주 일대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더욱이 주변에서 무령왕릉 출토 벽돌과 같은, 고급스런 연꽃무늬 벽돌이 나왔다는 점에서 석축단은 각별한 목적을 지닌 시설로 추정된다.

조사단은 “나라의 큰 의례 등을 펼쳤던 백제 왕조의 중요시설일 가능성이 있다”며 “교촌리 3호분과 더불어 세계유산 백제역사지구인 공주의 웅진도읍기 왕도의 경관을 체계적으로 복원할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공주대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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