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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작지일(禍作之日)

淸潭 2016. 12. 15. 09:00

화작지일(禍作之日)

[요약] (: 재화 화. : 지을 작. : 갈지. : 해 일)


재앙이 일어나는 날은 예고가 없다는 뜻으로, 재앙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해도 그 조짐이 있을 때 미리 경계하고 조심해 막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미.

[출전] 소순(蘇洵)의 관중론(管仲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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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나라 소순(蘇洵)은 관중론(管仲論)에서 춘추시대 제()나라의 환공(桓公)을 패자(霸者)로 만든 유명한 재상 관중(管仲)을 비판한데서 이 말이 나왔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관중(管仲)은 제나라 위공(威公, 환공)의 재상이 되어 제후들을 제패하고 오랑캐들을 물리쳤으며, 그의 평생 동안 제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제후들이 감히 배반하지 못하게 했었다.

관중이 죽자 수조(竪刁), 역아(易牙), 개방(開方)이 중용되었는데, 위공은 혼란 중에 죽었고 다섯 명의 공자들이 왕위를 서로 다투어 그 화가 널리 뻗치어 간공(簡公)에 이르기까지 제나라는 평안했던 해가 없었다. 무릇 공을 이룸에는 그것을 이룬 날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분명 이루어지게 된 연유가 있는 것이다(夫功之成非成於成之日, 蓋必有所由起).

화가 일어나는 것도 화가 일어나는 날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또한 분명 그것이 시작된 조짐이 있는 것인즉(禍之作不作於作之日, 亦必有所由兆), 제나라가 잘 다스려진 것은 나는 관중 때문이라 말하지 않고 포숙(鮑叔) 덕분이라 말하고 싶다. 제나라가 혼란해진 것은 나는 수조, 역아, 개방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고, 관중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則齊之治也, 吾不曰管仲而曰鮑叔. 及其亂也, 吾不曰竪刁易牙開方而曰管仲)

소순(蘇洵)이 이렇게 관중(管仲)을 비판한 것은 다음과 같이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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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위()나라 영공(靈公) 때의 대부 사추(史鰌)는 자를 자어(子魚) 또는 사어(史魚)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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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추는 위령공에게 어질고 능력 있는 거백옥(蘧伯玉)을 천거하였으나, 위령공은 그의 충언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간신 미자하(彌子瑕)를 중용하였다. 사추는 여러 차례 거백옥을 등용하도록 간언하였으나 위령공은 끝까지 듣지 않았다. 사추는 병이 들어 죽기 전에 아들에게 말했다.

내 거백옥을 군주에게 나아가게 하지 못하고 미자하를 물리치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군주를 바로잡아 주지 못한 것이다. 살아서 군주를 바로잡아 주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도 예를 갖출 수가 없다. 내가 죽으면 내 주검을 창 아래에 두어라.” 사추의 아들은 그 말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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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공이 조문하러 와서 사추의 주검이 창문 아래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위령공에게 말했다. 위령공은 놀라 실색을 하며 말했다. “이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그러고는 사추의 주검을 올바른 자리에 모시도록 명했고, 거백옥을 등용하고 미자하를 내쳤다. 공자(孔子)가 이 일을 듣고 말했다.

옛날에 간언을 잘했다는 반열에 든 사람이라도 자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어처럼 죽은 뒤에도 주검으로써 간언하여 그 군주를 충성으로 감동시킨 사람은 없었으니, 충직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古之列諫之者, 死則已矣. 未有若史魚而尸諫, 忠感其君者也, 不可謂直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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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공자가어(孔子家語) 곤서(困誓)〉》에 나오는데, 공자가 말한 시간(尸諫)이 바로 신후지간(身後之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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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蘇洵)은 관중론(管仲論)에서 이렇게 관중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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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사추는 거백옥을 (군주에게)나아가게 못 하고, 미자하를 물러가게 못 했으므로 죽어서까지 간언을 한 것이다.(吾觀史鰌, 以不能進籧伯玉, 而退彌子瑕, 故有身後之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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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이 병이 들자 제() 환공(桓公)이 관중에게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을 문의했다. 환공이 포숙아(鮑叔牙), 수조(竪刁), 역아(易牙), 개방(開方) 등을 묻자 관중은 이들의 중용을 반대하면서, 습붕(隰朋)을 천거했다. 하지만 환공은 습붕을 등용하지 않고 수조를 중용했다. 수조가 집정한 지 3년째 되던 해, 수조가 역아와 공자 개방, 그리고 대신들을 거느리고 모반을 일으켰다. 환공은 목마르고 굶주린 상태에서 남문의 침실에서 죽었다. 환공이 죽은 지 3개월이 되도록 시신을 수습하지 않아 시체에 벌레가 생겨 문밖까지 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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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蕭何)는 죽음에 임해 조참(曹參)을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했다. 대신들의 마음 씀씀이는 원래 이래야 하는 것이다. 국가는 한 사람으로 인해 흥하기도 하고 한 사람으로 인해 망하기도 한다. 어진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국가가 쇠망하는 것을 우려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뽑아 놓은 후에야 안심하고 죽는다. 관중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안심하고)죽었을까?(大臣之用心, 固宜如此也. 一國以一人興, 以一人亡. 賢者不悲其身之死, 而憂其國之衰. 故必復有賢者, 而後可以死. 彼管仲何以死哉)”

[이 글은 다음의 백과사전의 글을 재구성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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