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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인들(9) 이승훈

淸潭 2016. 11. 28. 11:01

한국의 위인들(9) 이승훈

 

남강 이승훈(1864-1930)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분입니다. 3‧1운동의 봉화불이 올라가기 얼마 전에 젊은 사람들이 오산으로 남강을 찾아와 “선생님, 곧 대규모로 독립을 위한 민중의 궐기가 벌어질 터인데, 남강 선생께서 ‘민족 대표’의 한 분이 되셔야 한답니다.” 남강은 1919년에 이미 50의 중반을 넘어선 초로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남강은 “내가 이제 나이가 많아서 그런 일은 못해”라고 하지 않고, “내가 늙어서 요를 깔고 누워서 앓다 죽을 줄 알았는데 이제 제대로 죽을 길을 찾았구나. 가자”라고 분연히 일어나 서울로 가서 ‘민족 대표’가 되셨습니다.

밖에 나가서 일을 보고 ‘운동 본부’에 들러, “서명이 다 끝났냐?”고 물었답니다. 실무를 맡은 젊은이가, “아직 서명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니 남강이 “왜?”하고 물었답니다. 그 젊은이가, “기독교 대표들은 ‘우리가 대표 수가 제일 많으니 우리 이름부터 쓰는 게 도리가 아닌가’하고 천도교 대표들은 ‘그래도 우리가 민족 종교의 상징인 천도교 대표들이니 우리 이름이 먼저 나와야 한다’고 우겨서 서명이 아직 안 되고 있습니다”라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남강 이승훈은 격한 어조로, “이 사람아, 그 순서가 죽는 순서야. 천도교의 손병희 이름부터 먼저 써줘” 그래서 ‘독립선언서’에 손병희 이름이 먼저 나왔다는 말을 나의 스승 함석헌으로부터 직접 들은 바 있습니다.

하루는 남강이 식구들을 다 모아 놓고 가족회의를 하였답니다. “논마지기 얼마 남은 것 다 팔아서 학교에 주자”고 남강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 말에 질려버린 가족들이 “아버님, 그걸 다 팔아서 학교에 주면 우린 뭘 먹고 삽니까?” 탄식에 가까운 식구들의 하소연이었습니다. 남강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학교에 돈이 없어서 교직원 월급도 못 주고 있다는데 우리가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아? 다 학교에 주고 우리는 학교 근처에 가서 학생 하숙을 하면 밥은 먹어!”

식구들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남강에게 있어서는 집안 살림보다는 학교가 열 배나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남강은 유기 장사, 도자기 장사를 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평양에 회사도 설립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남강은 도산의 강연을 듣고 민족 교육이 시급함을 깨달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1907년에 오산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남강은 가족들에게, 친지들에게, 오산 교직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나를 땅에 묻어 뼈까지 썩게 하면 안 된다. 내 뼈로 인체의 해골 표본을 만들어 학교 박물실에 두고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야 한다.”

그것을 일본 당국이 못 하게 막았습니다. 남강 이승훈의 해골에도 민족정신은 살아있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남강 이승훈에게 직접 배운 적은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나도 남강의 제자입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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