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인들(8) 이상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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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월남 이상재가 친할아버지처럼 느껴집니다. 월남은 1850년에 태어나 1927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내가 태어나던 해에는 77세였으니 나는 그 어른을 뵌 적도 없고 월남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일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대학생 시절에 나의 친구이던 신영일이 어느 헌 책사에서 1929년에 발간된 구식으로 제본된 <월남 전기> 한 권을 구해서 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날부터 이 책을 탐독하였고, 나는 구한국 말과 일제시대를 통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그를 모시게 되었고 매일 마음속에 모시고 살게 되니 이 어른이 나의 친할아버지처럼 느끼게 된 것입니다. 나는 월남의 그림자라도 보이는 모임에는 기를 쓰고 참석하였고, 충청도 한산에 있는 ‘월남의 집’에도 여러 번 가 보았고, 그의 동상이 종묘 앞 공원에 건립되었을 때에도 가서 축사 한 마디를 하였습니다. 강연을 하면서 월남에 언급한 일도 수천 번은 될 것입니다. 한전의 사장을 지낸 손자 이홍직 선배가 서대문 녹번동에 살고 있었는데 ‘월남 이상재 전기’를 쓸 생각이 있어서 그 선배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 손자가 배재학당을 졸업하던 날 졸업식에 참석한 월남이 축사에 앞서 던진 해학적 한 마디를 기억하고 있는 나는 이 선배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은 할아버님(월남)을 모시고 함께 보낸 시간도 적지 않으셨을 텐데 그 할아버님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선배께서 곧 답을 주었습니다. “우리 할아버님은 매사에 태연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지요. 자연스러운 분이셨지요. 그래서 언제나 태연하셨지요.” 위대한 사람은 무슨 일이 생겨도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입니다. “쥐 한 마리 때문에 태산이 요란하게 굴어서야 되겠냐”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이토록 혼란한 것은 월남 같은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월남은 자기보다 아홉 살 위인 판서 박정양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박 판서가 주미공사(미국 특파 전권대사)로 임명된 것은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5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상재는 서기관 자격으로 박 공사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1882년 미국의 해군 제독 R. W. Schufeldt가 청나라 이홍장의 반대를 물리치고 조선의 문호 개방에 성공해서 공사 일행이 미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월남이 끼어 있던 공사 일행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을 많이 하고 돌아와 고종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청나라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하는 수 없이 공사 박정양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월남은 부름을 받아 대궐에 들어가 고종 앞에 부복하였을 때 고종은 “이번에 수고가 많았어. 이 기회에 벼슬을 한 자리 하지”라고 하였습니다. 충신 이상재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모시고 갔던 어른은 옥중에 있는데 모시고 갔던 놈이 벼슬을 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감탄한 고종이 “그럼 아들을?”라고 했을 때 월남은 “제 아들놈이 무식해서 벼슬이 가당치 않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렇게 사양하고 어전을 물러나는 이상재를 보내며 고종이 입속말처럼 “저런 신하만 있으면 나라가 되겠는데”라고 하였답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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