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인들(7) 안창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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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님은 도산 안창호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도산은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없고 언제나 웃는 낯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민족의 지도자로 명성이 자자하던 어느 날 그의 집무실에 고향에서 형님이 찾아와 평양 시내에서 일하고 싶으니 직장을 하나 구해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한 마디 하고 사무실에서 나가 한참 만에 돌아온 도산의 손에는 지게가 한 틀 있었습니다. 그걸 본 형이 놀라서 “웬 지게냐?”하며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도산이 그 형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형님은 이 지게로 짐을 지시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버님으로부터 이런 도산에 관한 일화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도산이 돌아오는데 그의 금 회중시계를 노리고 차에 오른 소매치기가 있었답니다. 이놈이 기회를 잡아보려고 그의 주변을 맴도는데 눈치가 빠른 도산이 그 놈에게 그런 기회를 주었을 리가 만무하였습니다. 평양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데도 계속 따라왔습니다. 한적한 골목길에서 도산이 멎어서서 뒤따라오던 그 소매치기에게 금시계를 풀러 주면서, “너 이 시계 가져라. 일을 해서 벌어서 먹어야지!”라고 한 마디 꾸짖고 그는 유유히 사라졌답니다. DNA를 이렇게 달리 타고나는 인물이 가끔 인류의 역사에 탄생합니다. 도산은 그런 소질을 타고난 큰 어른이셨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한국 감리교의 감독을 지낸 이환신 감독이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도산이 대범한 사람이었지만 매우 까다롭고 좀스러운 면이 있어서 밥상을 받고 손으로 상 밑을 한 번 쓸어 보며, “이렇게 먼지가 많아서 되겠냐”고 야단치더랍니다. 미국 서해안에 살던 때 한인들의 집을 찾아 화장실과 하단을 점검하면서 “미국 사람들이 볼 때 더럽거나 지저분하면 안 된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한인들의 집 마당에 꽃나무를 심어준 일도 있었답니다. 안창호(1878-1938)는 일찍이 민족의 참상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19세 소년의 몸으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사면초가’인 왕조가 주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을사보호조약(五條約)이 체결된 뒤에는 언론으로 교육으로 민족을 깨우치려 노력하였고, 합방(1910) 뒤에는 중국으로, 미국으로 망명생활이 불가피했으며 그런 와중에도 흥사단을 조직해 겨레의 정신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한 때는 상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를 지낸 적도 있지만 벼슬자리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 매우 비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도산 10주기 추모 모임이 당시의 명동 시공관에서 있었습니다. ‘5.10 선거’를 앞둔 이승만이 그 자리에 나와서 한 마디 하였습니다. “집안이 어지러울 때에는 어진 아내가 그립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는 훌륭한 재상이 그립다”고 하며 3년 후배인 애국 운동의 선구자 도산 안창호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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