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마을 산수유 전설 구례설화 / 설화
중국 산동성 청도, 지금도 청도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예전에 신라방이 있었던 곳도 바로 그곳이다. 산동성은 이래저래 한국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 말기 대학자로 유명한 그는 868년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 최견일이 무표정하게 말하였다.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마라.”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 최치원은 열여덟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1)에 합격하였다. 그 후 최치원은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신라방에 있던 아가씨 가운데 동아라는 이름의 여인이 최치원을 사모하게 되었다. 귀족 출신인데다 인물도 훤칠하고, 더구나 빈공과에 합격한 후 토황소격문 등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인지라 여인이라면 누구나 최치원을 흠모할 만하였다.
우연히 동아와 알게 된 최치원 역시 오랜 외국 생활에 힘든 심신을 편하게 해주는 동아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신라방 근처에 있는 적산 법화원에서 자주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법화원은 823년 신라 해상왕 장보고가 당나라에 머물던 시절 거액을 들여세운 불교 사찰로, 당시 적산 인근에 위치한 신라방에 살던 동포들이 모여 단합을 도모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885년, 최치원이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떠나기 전날, 최치원은 동아에게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였다.
“내 바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소.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니 차도를 봐서 반드시 1년 안에 돌아오겠소.”
그러자 동아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더니 이내 말문을 닫았다.
그런데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최치원은 당나라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잊고 말았다. 더구나 당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천재가 귀국하였기에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중앙관직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 이후 대산군(大山郡)2)·천령군(天嶺郡)3)·부성군(富城郡)4)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어느 날, 최치원은 갑자기 동아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지 벌써 8년이 지났다. 그래서 임금에게 청하여 893년 하정사(賀正使)5)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이 횡행하여 중국행이 무산되고 말았다. 동아가 보고 싶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최치원이 다시 간청하여 얼마 후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게 되었다.
업무를 마치고 짬을 내어 신라방에 간 최치원은 서둘러 동아를 찾았다. 8년 만에 만난 동아는 무척 수척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최치원을 보는 눈만큼은 빛이 났다. 그런데 어디선가 여자 아이 하나가 달려오더니 ‘엄마!’ 하면서 동아 곁에 다가서는 게 아닌가.
“예쁘게 생겼구나. 이름이 뭐니?”
여자 아이는 부끄러운지 엄마 치마폭으로 숨어들어가면서도 최치원을 바라보며 여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수아, 장수아.”
잠시 후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떤 남성이 동아를 찾으며 다가오자 그 여자 아이가 ‘아빠!’ 하며 달려들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최치원이 떠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동아가 이웃마을 장씨와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늦게 돌아온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고 사는 동아를 보니 최치원은 세상이 싫어졌다.
그렇게 최치원은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최치원을 동아가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꼈다. 골품제도도 문제이지만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고,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며 배운 지식을 써먹는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최치원은 산천을 유람하며 지내다 말년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췄다.
905년, 중국 산동성 신라방. 결혼한 지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말이 없는 부인이 안타까웠던 장씨가 어느 날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그가 그렇게도 보고 싶소?”
동아는 느닷없는 남편의 질문에 화들짝 놀랐다. 남편이 이야기한 그는 최치원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남편이 수아 이야기를 꺼냈다.
“수아 아버지가 누군지도 잘 알고 있소. 내 수아를 친딸처럼 여기며 살았건만 당신이 이리도 그를 잊지 못하니 어찌 하면 좋겠소.”
수아 이야기까지 꺼내자 동아는 돌연 남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사실 수아는 최치원이 남기고 간 선물이었다. 최치원이 귀국하던 885년 동아는 이미 수아를 임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아를 낳을 때까지도 최치원이 돌아오지 않자 수아 부모가 수아를 강제로 이웃마을 장씨와 결혼시켜버린 것이다. 물론 착하디착한 장씨는 핏덩어리 수아를 친딸처럼 여기며 지금껏 키웠다. 수아 역시 장씨를 친아버지로 알고 살았다.
며칠 뒤, 장씨가 수아를 불렀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장씨가 수아에게 말하였다.
“수아야, 실은 네 친아버지는 멀리 바다 건너 신라에 있단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수아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아버지,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세요?”
배시시 웃는 수아를 보며 장씨가 다시 이야기하였다.
“니 엄마가 좋아했던 분은 최치원이라고, 너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분이 바로 수아 니 친아버지란다.”
수아는 곧바로 어머니께 달려갔다.
“어머니, 제 친아버지가 바다 건너 신라 땅에 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수아가 숨을 헐떡이며 말하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었다.
“미안하구나, 수아야.”
이야기를 마친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이야기를 꺼냈던 장씨는 아내가 더욱 더 심란해하자 며칠을 잠을 설치며 고민하였다.
어느 날 장씨가 아내와 수아를 불렀다.
“수아야, 신라에 가서 니 친아버지를 찾는 것이 어떻겠니. 그러자면 신라 사람과 혼인을 하면 좋겠는데...”
그러자 수아가 펄쩍 뒤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버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제가 미우세요? 왜 저를 신라 땅으로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세요?”
수아는 자신이 다른 사람의 딸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밀어내려 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서운함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아버지 제안에 동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어머니마저 왜 그러세요? 아버지 어머니를 두고 바다 건너가서 어찌 살란 말인가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어머니는 또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수아는 알 것도 같았다. 또한 수아 역시 어릴 적 잠시 보았던 최치원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결국 수아는 장사를 하러 신라방에 들른 신라 청년과 혼인을 하기로 하고 함께 배를 탔다. 신라로 떠나는 수아에게 어머니는 작은 비단주머니를 주었다. 오래 전 최치원이 동아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혹 그분을 만나게 되거든 이 비단주머니를 보여주도록 해라. 그러면 알아볼 것이다.”
20년을 애지중지 하면 키웠던 딸을 떠나보내는 장씨의 가슴도 찢어질 것 같았다. 장씨가 수아에게 뭔가를 건넸다.
“신라에 가거든 이것을 심도록 해라. 산수유 묘목이란다. 고향생각이 나거든 산수유 꽃을 보면서 향수를 달래도록 해라.”
수아가 태어나 살았던 산동에 지천에 깔린 것이 산수유라 사실 수아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워낙 흔하게 보아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구례군 산동면 계척마을에는 산수유 시목(始木)지가 있다. 우리나라 산수유는 모두 이 시목의 자손이다. 1000년쯤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가 바로 중국 산동성에서 시집온 수아가 가져온 산수유 나무다.
신라 청년과 결혼하여 구례로 시집온 수아는 친아버지 최치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리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다행히 구례가 지리산을 끼고 있는지라 수아는 남편과 함께 틈만 나면 지리산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최치원의 행방은 찾을 길 없었다.
그러는 수아를 시어머니가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최치원의 딸이라는 사실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살림은 내팽개치고 친아버지를 찾아다니는 며느리나, 그런 며느리를 도와주는 아들이나 다 미웠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말조차 서툴러서 대화도 잘 통하지 않아 시어머니의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럴 대면 수아는 산수유 나무를 찾곤 하였다. 시집오자마자 심어놓은 산수유 나무가 제법 자라서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면 고향 산동 생각에 잠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 봄, 최치원이 쌍계사를 다녀갔다는 소문을 들은 수아 부부가 서둘러 쌍계사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쌍계사 입구에 있는 바위에 커다랗게 쓰인 글씨가 바로 아버지 최치원의 글씨라는 말을 듣고 수아는 한 동안 글씨 앞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끼니때가 되어도 밥을 차릴 생각은 하지 않고 걸핏 하면 아버지 소식을 듣고 밖으로 도는 며느리에 대한 구박은 이제 극에 달하였다.
“너는 도대체가 시집을 온 거니, 아버지를 찾으러 온 거니? 시애미 말이 말 같지가 않은 거니?”
그날도 어김없이 수아는 산수유 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 그루 밖에 없던 산수유 나무 근처에 여기저기에 올망졸망한 아이 나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산수유 나무에 위안을 받은 수아가 서툰 우리말로 시어머니께 간청을 하였다.
“어머니, 딱 한 달만 시간을 주세요. 한 달만 아버지를 찾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더 이상 찾지 않을 께요.”
비록 구박은 하였지만 멀리 당나라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신라 땅에까지 시집을 와서 외로움을 타는 며느리가 내심 안쓰러웠던 시어머니가 한 달 말미를 주었다.
쌍계사에서 그나마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였던 수아 부부가 근처 마을을 돌아보다 마을 앞 냇가 건너편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는 또 다른 글씨를 발견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몇 년 전에 누군가가 귀를 씻고 산으로 들어간다며 세이암(洗耳嵒)이라고 손가락으로 새겼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최치원이 틀림없었다.
*최치원이 쌍계사 입구 바위에 썼다는 석문(石門)과 쌍계(雙磎) 글씨.
*최치원이 귀를 씻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너럭바위에 손가락으로 새겼다는 세이암(洗耳嵒)이라는 글씨.
돌아오는 길에 수아 부부는 범왕리에 있는 자그마한 푸조나무를 보게 되었다. 생김새가 희한하게 생겨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가 수아 부부를 보고 물었다.
“그 나무는 어찌 그리 자세히 들여다보시우?”
“나무가 참으로 신기하게 생겨서요.”
“신가하다마다. 몇 년 전에 어떤 도인이 지나가다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싹이 난 것이라우. 그러니 신기할 수밖에.”
할머니 이야기를 들은 수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네? 그 도인이 어떻게 생겼던가요? 그리고 뭐라 하던가요?”
할머니께 들은 인상착의는 쌍계사 스님께 들은 인상착의와 흡사하였다. 역시 최치원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가까이에 아버지 흔적이 이리도 많이 남아 있다니... 수아는 어릴 적 보았던 최치원 생각에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수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그분 말씀이,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 있고 나무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라던데...”
할머니 이야기를 들은 수아는 친아버지인 최치원이 지리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찾지 않기로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수아는 그 동안 못했던 것을 다하려는 듯 시어머니 봉양에 온 힘을 다하였다. 그러는 사이 산수유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났고, 열매의 다양한 효능을 알게 된 인근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산수유 씨를 받아가는 바람에 구례 일대가 온통 산수유 천지였다. 그리하여 아예 지명조차 산동마을로 바뀌게 되었다.
산수유 묘목과 열매를 팔아 살림도 넉넉해진 수아 부부가 어느 날 아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갔다. 나들이라 해봐야 근처 개울이었는데 수아는 그 동안 십 년 가까이 이곳에 살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개울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친아버지 찾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보, 이 개울 이름이 뭐에요? 너무나 아름다워요.”
“응, 이 개울 이름은 서시천이라고 해.”
남편이 들려준 서시천 이야기를 신기하기만 하였다. 마치 중국에서 시집온 자신을 위로하기라도 하려는 듯 중국과 관련된 전설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진시황. 그는 동국(東國)의 지리산에서 불로초가 자란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다.
3000여 명이나 되는 사신 일행이 모두 9척의 배에 나눠 타고 지금의 다사강(多沙江)을 따라 올랐다. 모래가 많다는 뜻의 다사강은 섬진강의 옛 이름이다. 그들은 다사강 지류를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그 개울이 바로 서시천이다.
당시 사신의 이름이 서불(徐巿)이었다. 그런데 슬갑 불(巿)은 저자 시(市)와 같다. 그래서 본디 서불천인데 훗날 서시천으로 됐다고 한다. 산동에 시장(市場)이 크게 번성할 것을 내다본 것일 수도 있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출처] 산동마을 산수유 전설|작성자 월간 설화와 인물
'글,문학 > 野談,傳說,說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곡재의 처녀귀신 곡성설화 / 설화 (0) | 2016.11.23 |
---|---|
다자구야 들자구야 (0) | 2016.11.23 |
범일국사와 굴산사지 (0) | 2016.11.21 |
달맞이고개의 전설 (0) | 2016.11.21 |
고려 때의 효자 김천 (0) | 2016.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