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일국사와 굴산사지
옛날 학산리(지금의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마을에 한 처녀가 굴산사 앞에 있는 석천(石泉)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자 물속에 해가 떠 있었다. 물을 버리고 다시 떴으나 여전히 해가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물을 마셨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처녀에게 태기가 있어 마침내 아이를 낳았는데,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마을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산모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튿날 그곳에 다시 가보니 뜻밖에도 학과 산짐승들이 모여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날개를 펴서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산모는 비범한 아이가 될 것이라고 믿고 아기를 데려와 키웠다. 아기가 자라자 당시의 서울인 경주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아이는 나중에 국사(國師)가 되었는데,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났다고 하여 범일국사(泛日國師)라고 부르게 되었다.
범일국사는 구산선문의 한 곳인 사굴산파를 개창한 선승이다. 속가의 이름은 김품일이고,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 탑호는 연휘(延徽)다. 그는 흥덕왕 6년(831) 2월 당나라에 유학하여 여러 고승들을 만났고, 중국의 고승 마조선사의 제자인 제안(齊安)에게서 성불의 가르침을 받았다.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을 곧 도라고 한다.”
범일국사는 문성왕 6년(844)에 귀국한 후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물렀으며, 명주도독의 요청에 따라 굴산사로 옮겨서 40여 년 동안 후학을 가르쳤다.
깨달음이 깊었던 범일국사를 신라 조정의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국사로 모시려고 하였으나 그는 모두 거절하였다. 보현사를 세운 낭원대사 개청(開淸)과 행적(行寂)이 그의 제자다. 범일국사는 훗날 학산에 돌아와 자신의 지팡이를 던져 그것이 꽂힌 곳에 절을 지어 심복사(尋福寺)라고 하였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너른 들판에는 당간지주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이름 하여 굴산사지 당간지주로, 이 넓은 들판을 배경으로 세워졌던 굴산사는 신라 문성왕 14년(852)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의 본산이다. 사찰의 당우가 약 300미터에 이르렀던 이 절은 강릉 지방에서 가장 큰 절이었고, 승려만도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나라 곳곳에서 범일국사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쌀 씻은 물이 동해 바다에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큰 절이 언제, 어떤 연유로 폐사되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 뒤 굴산사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다가 1956년 큰 홍수 때 주춧돌 여섯 개가 드러났으며, 절터에서 ‘문굴산사(門掘山寺)’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범일국사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그 후에 굴산조사 범일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태화 연간(827~835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 개국사에 갔더니 왼편 귀가 떨어진 웬 상좌 한 사람이 여러 중들의 말석에 앉아 있다가 조사에게 말하기를 “저 역시 신라 사람입니다. 집이 명주 땅 익령현 덕기방에 있사온데, 후일 스님이 만약 본국으로 가시거든 반드시 저의 집을 지어주소서”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여러 군데 설법 모임을 돌아다니다가 염관으로부터 불법을 공부하고 회장 7년(정묘년, 847)에 귀국하여 우선 굴산사를 세우고 불법을 전파하였다.
대중 12년(무인년, 858) 2월 15일 꿈에 전일에 본 상좌가 방 문 앞에 와서 말하기를 “전일 명주 개국사에 있을 때 스님의 약조가 있어 이미 승낙까지 받았는데, 어찌 그리 지체를 하고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조사가 놀라 깨어나 수십 명의 사람을 데리고 익령현 경내에 이르러 그의 집을 찾았다. 낙산 밑 마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어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라고 하였다. 그 여자는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를 하나 두었는데, 언제나 마을 남쪽 돌다리 옆에 나가 놀면서 그 어머니에게 고하기를 “나하고 같이 노는 친구 중에 금빛으로 빛나는 아이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 어머니가 조사에게 그 말을 전하자 조사가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그 아이와 함께 놀던 다리에 가서 찾았더니 물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었다. 그 돌부처를 꺼내보았더니 부처의 왼쪽 귀가 떨어진 것이 전날 보았던 상좌승과 같았다. 이는 정취보살의 석상이었다. 곧바로 점치는 패쪽을 만들어 모실 집 지을 자리를 점쳐보니 낙산 위쪽이 바로 그 자리였다. 이리하여 전각을 세우고 불상을 그곳에 모셨다.
절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남았다. 학산리 223번지에 서 있는 이 당간지주는 보물 제86호로 지정되었는데, 네모반듯한 밑돌 위에 높이가 약 6미터 되는 두 개의 네모진 돌기둥이 약 1미터 사이를 두고 마주 서 있다. 모양이 방앗가달(쌀개)처럼 생겼다고 하여 방앗가달이라고도 부른다.
학산리 731번지에 있는 굴산사지부도탑은 보물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선덕여왕 13년에 범일국사가 굴산사를 세울 때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지대석 밑에 있는 지하실에 오백나한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인들이 훔쳐갔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범일국사와 굴산사지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 10. 5., 다음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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