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일화
율곡과 가난
우리 역사상에 청빈한 관리[淸白吏]의 이야기가 많이 전하며, 또 그것을 하나의 미담으로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율곡 선생은 워낙 도학으로 높은 위치를 점령한 어른이기 때문에, 그의 생활이 가난했던가 어땠던가 하는 것쯤은 그다지 중대하게 생각할 여지가 없는 문제다.
그래서 율곡의 생활이 가난했던 이야기는 일찍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지만은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서 보면 그의 청빈했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가) 반찬 없는 밥
율곡이 대제학 벼슬을 사양하고, 잠깐 파주(坡州)로 물러나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율곡 선생 밑에서 부제학을 지낸 최황(崔滉)이란 이가 율곡을 방문하여 겸상을 차려서 밥을 먹는데, 반찬이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에 최황은 수저를 들고 머뭇거리기만 하다 말고 마침내 한 마디 했다.
『아무리 청빈하기로 이렇게 곤궁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까. 반찬도 없이 진지를 잡숫는대서야…… 소생이 민망하여 뵈올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율곡은 웃으며,
『나중에 해가 지고 난 뒤에 먹으면 맛이 있느니!』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속담에 있는『시장이 반찬이지』하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최준(崔濬) 지음>
(나) 쌀 선물을 받지 않음
율곡이 해주 석담에서 살 때였다. 언제나 점심에는 밥을 먹지 않았다. 양식이 모자라기 때문에 죽도 끓이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이것을 안 재령(載寧) 군수가 선생에게 쌀을 보내드렸다. 더구나 그 군수는 최립(崔笠)이란 이로서, 율곡의 어릴 적 사귐이었다. 그러나 율곡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자제들은 양식이 끊어졌던 차에 어디서 쌀 선물이 들어오므로 대단히 반가웠는데, 율곡은 두말도 없이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자제들이 이상히 여기며 물었다.
선생은 자제들을 향해서,『국법에 장물(臟物)을 주고받는 죄는 아주 엄격한 것이다. 우리나라 수령들이 나라 곡식 아닌 다음에야 따로 무슨 곡식이 있을 것이냐. 수령들이라 할지라도 제 개인의 곡식을 주는 다음에야 어찌 안받을 것이 있겠느냐마는, 이 최 군수는 제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응당 나라 곡식을 보내 주는 것일 테니 내가 어찌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대로 시장한 채 견디며 사는 것이지!』하는 것이었다.(율곡전서 권38, 잡록 중)
(다) 율곡과 대장간
율곡이 해주에서 살던 동안의 일이었다. 대장간을 차려 가지고 호미를 만들어 그것을 팔아서 양식을 사먹었다.
이것에 대해서 뒷날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선생은 최유해(崔有海)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근세에 와서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선생이 여주(驪州)에 물러나 있을 적에 친히 추수를 거두러 다니며, 마당에 한 알이라도 흘리지 못하게 하며, 이게 모두 하늘이 주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율곡 선생도 해주에서 대장간을 일으켜서 호미를 만들어 팔아 그것으로 양식을 바꾸었던 것이니, 이같이 의에 해당한 일은 큰 인물도 그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던 것인가 생각합니다.』
(라) 쇠고기를 먹지 않음
율곡 선생은 평소에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국법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소를 부려서 실컷 그 힘을 뽑아 먹고, 또 그 고기마저 씹는다는 것은 결코 어질다 할 수 없는 일이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침 조정에서『쇠고기 못 먹게 금하는 법령』을 내리자, 율곡은 득의한 듯이,『국법으로까지 이같이 금하는 일이니 더욱 범해서는 안된다』하고, 그로부터는 비록 제사라 할지라도 쇠고기는 쓰지 아니했다. (율곡별집 권3)
(마) 집을 팔아 형제와 나눔
율곡은 자기만이 가난하게 산 것이 아니라, 모든 형제가 다 가난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율곡이 가장 나은 편일 것은 사실인데, 그나마도 처가 덕택을 상당히 보았던 것 같다.
장인 되는 노경린(盧慶麟)이 서울에 집 한 채를 사서 율곡에게 준 것이 있었는데, 율곡은 형제들이 모두 가난하게 살아 끼니를 못 이어가는 형편임을 보고, 자기가 그 집을 지니고 태연히 있을 수 없어 마침내 그 집을 팔아 가지고, 그 돈으로 베를 사서 골고루 분배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 집 한채가 없었으며,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형제가 먹건 굶건 같이 사는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죽도 끓이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조익(趙翼) 지음『포저집(浦渚集)』>
(바) 율곡의 별세와 가난
선생 같이 생전에 일국을 잡아 흔드는 높은 명성을 가진 큰 인물로서, 가정생활은 어찌 그리 궁색하게 지냈던 것인지. 그는 물론 나라를 위하는 생각 뿐이요, 집안 일에는 머리를 쓰지 않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가난했던 가정 형편은 율곡이 별세하던 날 여실히 나타났다. 선생이 별세한 뒤에 당장, 집안에는 모아 놓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옷도 마련해 놓은 것이 없어 다른 이의 수의를 빌려 와서 염습을 했고, 또 그 뒤에는 처자들이 집이 없어 이리저리 이사 다녀 의지할 곳이 없었으며, 얼고 주림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을 보고, 친구들과 유림의 선비들이 돈을 모아서 율곡의 처자들을 위하여 서울에 집 한 칸을 마련해 준 일이 있었다. <이정귀(李廷龜) 지음『율곡선생 시장(諡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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