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野談,傳說,說話,등

이 풍헌전〔李風憲傳〕

淸潭 2016. 10. 13. 10:15

이 풍헌전李風憲傳 매천 황현(黃玹)

 

이 풍헌(風憲; 조선 시대에, 유향소에서 면(面)이나 이(里)의 일을 맡아보던 사람.)의 이름은 잊어버렸다. 처음에 좌진영(左鎭營)에 소속되어 순포(巡捕)로 있을 때에는 도적을 매우 잘 추적하였다. 구례로 이사 와서는 토지면(吐旨面)의 풍헌(風憲)이 되었는데, 이 직임은 옛날 향정(鄕正)과 유사한 것이다. 하루는 만산(萬山)의 산중을 가다가 돈꿰미를 메고 앞서 가는 두 명의 도적을 만났다. 이에 풍헌이 묻기를,

객들은 어디로 가시오? 산이 후미졌는데 대담하게 돈을 지고 말이오.”

하니, 도적이 갑자기 말하였다.

우리는 상인이오.”

무슨 상인이오?”

담배를 파오.”

다 팔았소?”

아직 팔지 못했소.”

담배를 팔 경우에는 담배를 지고 돈이 없는 게 상례이거늘, 지금은 어째 돈을 먼저 지고 있는 것이오?”

 

하니, 도적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이들을 뒤따르며 1리쯤을 가는 동안 자꾸 다른 일을 캐물으니, 도적이 노하여 칼을 뽑아 들이대며 말하기를,

너 이놈, 죽고 싶으냐? 어찌 말이 많으냐?”

하니, 풍헌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 생각에는 너희가 햇병아리로 보인다.”

하자, 도적이 말하기를,

무슨 말이냐?”

하니, 풍헌이 말하기를,

두 눈을 달고 다니면서 장사(壯士)도 알아보지 못하느냐. 너희가 보기에도 내 몸이 이렇게 장대한데 반평생을 굶주렸으니, 악한 생각이 싹트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지금 우리가 만난 것은 하늘의 뜻이다. 생사를 걸고 이 일을 함께하자.”

 

하자, 도적이 의심의 눈초리로 한참을 보더니, 말하기를,

속임수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하니, 풍헌이 탄식하기를,

오늘날 백성치고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겠는가. 단지 떨치고 일어나지 못할 뿐이다. 그대들도 한번 생각해 보라. 호랑이나 이리를 피하듯 도적을 피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대들이 도적인 줄을 알고서도 다시 기꺼이 화를 자초하겠는가.”

 

하자, 도적이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이에 풍헌이 말하기를,

남아(男兒)는 서로 알아주는 걸 귀하게 여긴다. 그리되면 형제와 다름없으니, 땅에 술을 뿌려 의형제가 되기를 맹세하자.”

 

하고는, 드디어 이들을 유인하여 주막으로 갔다. 주막에 이르자 주모에게 눈짓을 한 뒤 큰 주발 세 개를 내오게 하여 술을 따랐다. 일제히 한 주발씩 들고 술을 마시는데, 주발을 기울여 술이 다 들어갈 무렵이 되자, 도적의 목이 뒤로 젖혀져 목젖이 볼록하게 튀어나오고 눈은 주발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 풍헌이 미리 찾아 놓은 짧은 방망이를 들고 두 도적의 목젖을 향해 냅다 일격을 가하였다. 도적들이 아이쿠!’ 하고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는 틈을 타서 큰소리를 지르며 포박을 한 다음 현()으로 압송하였다.

 

그런데 현포(縣捕)는 도적의 장물(贓物)이 탐이 나서 군침을 삼키며 생각하기를, ‘저놈들을 놓아 주었다가 다시 사로잡으면, 저 풍헌의 공을 빼앗을 수 있겠다.’ 하고는, 이 풍헌이 양민을 죽이려 했다고 크게 떠벌렸다. 그러자 도적들이 그의 속셈을 알아차리고는 누차 신문(訊問)을 해도 자복(自服)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풍헌이 화가 나서 주먹으로 땅을 내려치면서 말하기를,

 

무슨 소리를 지껄이느냐. 나에게 토포(討捕)의 직함을 빌려 주면 단박에 이 일을 밝혀내겠다.”

 

하였다. 관원이 그 말을 듣고는 선뜻 그에게 토포의 직함을 주었다. 그러자 풍헌은 마침내 큰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마시고는 손에 쇠몽둥이를 들고 그들 앞에 와서 말하기를,

너희가 당초에 뭐라 말했는데, 감히 이렇게 나오느냐. 자복하지 않으면 뼈를 가루로 만들어 주겠다.”

 

하니, 도적들은 그제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서 올려다보며 탄식하기를,“아아, 저 풋내기에게 농락을 당했구나.”

 

하였다. ()에서는 드디어 두 도적을 장살(杖殺)하려고 곤장을 쳤는데, 그중 한 도적이 힘이 세어 허벅지만큼 큰 장()100여 대나 맞고도 죽지 않으므로, 끈으로 목을 매어 숨을 끊었다. 이때부터 이 풍헌의 명성이 인근에 자자하였고, 일대에 숨어 있던 강도들이 모두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는 바이다.

내가 보기에, 옛날 호걸(豪傑)로 이름이 난 사람들을 보면, 한미(寒微)한 출신들이 종종 있으니, 이 풍헌을 어찌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근래에 도적이 자주 출몰하여 군읍(郡邑)에서 현상금을 걸었다. 아마도 도적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소문이 있을 법도 한데, 이 풍헌과 같은 일은 전혀 없고 처음 보는 일이니, 어째서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