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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별명은 '고려천자(高麗天子)'

淸潭 2016. 10. 8. 10:51

그의 별명은 '고려천자(高麗天子)'


충북 괴산에 있는 그 이름난 화양계곡이다. 산도 좋고 물도 좋고 걷기에도 딱 좋은 곳이다. 옛 사람 말에 산에는 신선이 있어야 명산이고 물에는 용이 살아야 신령스럽다 했는데 이 곳 역시 신선도 있고 용도 산다.

 

용이 돌로 변해 길게 누워 있으니 바로 와룡암(臥龍岩)이고 신선들도 도처에 즐비하다.

 

오늘의 얘기는 이 곳 화양서원 뒤 만동묘(萬東廟). 명나라 신종, 의종 두 황제의 위패를 모신 곳. 여기를 오를라치면 우선 단정치 못한 돌계단이 앞을 가로막는데 심하게 가파른데다 폭도 좁아 오르는 사람꼴을 좀 우습게 만든다. 대원군이 이 계단을 오르다가 이 곳 묘지기에게 봉변을 당한 얘기나 '판서 위에 정승, 정승 위에 만동묘 묘지기'라는 당시 유행어가 나타내주듯이 만동묘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고 그에 따른 폐해 역시 대단했다. 이후 대원군이 집권을 하자 작심하고 철폐한 일은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건이다.

 

명나라 신종황제 만력제(萬曆帝), 이름은 주익균(朱翊鈞·1563-1620). 그는 명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주역이자 중국 역사상 수많은 황제 중에서도 기묘한 행태로 단연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엔 관심이 아예 없었고 물경 30년 동안이나 황제업무를 내팽개친 이른바 파업황제이었다. 고위신하도 황제의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였고 얼굴 한 번도 못 본 신하도 많았다고 한다. 관직 임명도 하지 않아 대부분의 자리가 공석이었으며 그러면서도 숨은 채 온갖 엉뚱한 짓은 다 했으니 나라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황제가 웬일인지 임진왜란을 당한 조선의 위급함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며 수만 대군을 파견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과 함께 싸웠으며 한 때는 조선백성이 전쟁통에 굶주린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재산까지 털어 쌀 백만 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식량까지 보내준 일도 있었다. 당시 명에서 그의 별명은 '고려천자(高麗天子)'. 조선 황제였다는 것이다. 조선에게는 만력제가 그야말로 수호천사이자 사무치는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니 만동묘의 설립은 바로 이 사실에서 연유되며 '명에 대한 의리'는 조선 사대부에게 도그마가 됐다.

 

한편 만력제는 철저히 명나라의 멸망을 재촉질했고 결국 그가 죽은 지 24년 후 의종 숭정제의 자살로 명왕조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 중국에서 만력제는 암군(暗君)중의 암군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생전 그렇게나 국고를 축내며 만든 그의 묘는 20세기 중반 들어 파헤쳐지고 시신도 홍위병들에 의해 불태워져 흔적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도 관광지로 유명한 베이징 외곽 '13'에서 정릉(定陵)이 그의 묘다.

 

혹 올 여름 만동묘를 들른다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 어떤 대접을 할 것인가? 그래도 고개 숙여 고마웠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제 집 단속이나 잘 할 것이지 참 별난 사람 다 있다고 웃고 말 것인가? 또 아니면 조선의 사대정신에 혀를 차며 한탄하고 말 것인가? 하지만 말이다. 너무 가볍지는 말자. 한 중 일 세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숙명'이다.

 

   

만동묘[] 

   

요약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을 제사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 30)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지은 사당.

인조 때 청나라를 다녀온 민정중이 구해온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이라는 글씨 한 폭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자 이글을 보고 의종이야 말로 예()를 지켜낸 최고의 군주로 칭송하였다. 존명 사대주의 사상에 열렬했던 송시열은 이를 받고서 이 글을 화양동 석벽()에 새겨 놓고 석벽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죽을 때 그의 제자 권상하()에게 이곳에 묘우()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여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묘에 딸린 전토()와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에는 묘를 중수하였으며 면세전() 20결()을 주었다.

1809년(순조 9)에는 묘우를 개축하고 1844년(헌종 10)에는 정식으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 묘는 노론()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여, 대원군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 등은 서울 대보단()의 경봉각()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4대 서원으로 유명하였으나, 노론()세력의 본산으로 화양서원이 행한 병폐가 극심했다. 지금은 복구되어 있고 만동묘정비가 지방기념물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동묘 [萬東廟]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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