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갑[射琴匣]
신라 제21대 비처왕(毗處王)[소지왕(炤智王)] 즉위 10년 무진(서기 488)에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말로 말하였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시오.”[혹은 신덕왕(神德王)이 흥륜사(興輪寺)에 예불하러 가는데, 길에서 여러 쥐가 꼬리를 서로 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괴이하게 여겨 돌아와서 점을 쳐보니, ‘내일 제일 먼저 오는 까마귀를 찾으라.’라고 하였다지만, 이 설은 잘못된 것이다.]
왕은 말을 탄 병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쫓아가도록 하였다. 병사가 남쪽으로 피촌(避村)[지금의 양피사촌(壤避寺村)으로 남산(南山)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렀는데, 돼지 두 마리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병사는 한참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길가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이때 어떤 노인이 연못 속에서 나와 편지를 주었다.
편지 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 편지를 왕에게 바쳤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
그러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서민을 말하는 것이고, 한 사람이란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여기고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편지 속에는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집을 쏘라)’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은 궁으로 들어가서 거문고 집을 보고 활을 쏘았다. 그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 하던 중이 궁주(宮主)와 몰래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형을 당했다.
이로부터 나라의 풍습에 해마다 정월 첫 해일(亥日), 첫 자일(子日), 첫 오일(午日)이 되면 모든 일을 조심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 까마귀의 제삿날)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 지냈는데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속어로는 달도(怛忉)라고 하는데, 슬퍼하고 근심스러워서 모든 일을 금하고 꺼린다는 뜻이다. 노인이 나와 편지를 바친 연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한다.
도화녀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
신라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은 시호가 진지대왕(眞智大王)이고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서기 576)에 왕위에 올라[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서기 579)라고 하나 잘못된 것이다.] 나라를 4년 동안 다스렸는데,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여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에 앞서 사량부(沙梁部) 백성의 딸이 있었는데, 자색이 곱고 아름다워서 당시에 도화랑(桃花娘)이라고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관계를 갖고자 하자 여자가 말하였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일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천자의 위엄이라 할지라도 남편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게 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죽이겠다면 어찌 할 것이냐?”
“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할지언정, 다른 남자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왕이 장난삼아 말하였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그렇다면 가능합니다.”
왕은 그 여자를 놓아 보내주었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어 죽었는데, 2년 후에 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열흘 뒤에 갑자기 밤중에 왕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 여자의 방으로 들어와서 말하였다.
“네가 옛날에 남편이 없으면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지금 네 남편이 없으니 괜찮겠느냐?”
여인은 가벼이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부모가 말하였다.
“임금님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하겠느냐?”
그리고는 딸을 방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늘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더니, 7일 후에 홀연히 왕의 자취가 사라졌다. 여자는 이 일로 인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을 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면서 남자 아이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하였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은 이 이상한 소문을 듣고 그 아이를 궁중으로 데려다 길렀다. 나이가 15세가 되자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비형은 매일 밤마다 멀리 도망 나가 놀았다. 왕이 용사 50명에게 지키게 하였지만,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서 서쪽 황천(荒川) 언덕 위[서울 서쪽에 있다.]에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들이 숲 속에 엎드려서 엿보았는데, 귀신들은 여러 절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는 각각 흩어졌고 비형랑도 돌아오는 것이었다. 군사들이 이 일을 왕에게 아뢰자, 왕이 비형을 불러서 말하였다.
“네가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는데 정말이냐?”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에게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나 잘못된 것이다. 또는 황천 동쪽 깊은 개천이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으라고 하거라.”
비형은 왕명을 받들고 귀신들을 시켜서 돌을 다듬어 하룻밤 만에 큰 다리를 완성하였다. 그래서 그 다리를 귀교(鬼橋, 귀신다리)라고 한다.
왕이 또 물었다.
“귀신들 중에 인간 세상에 나타나서 조정을 도울 수 있는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치를 도울 만합니다.”
“함께 오라.”
다음날 비형이 길달을 데리고 와서 뵙자 길달에게 집사 벼슬을 내렸는데,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 당시 각간 임종(林宗)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하여 그를 아들로 삼게 하였다. 임종은 길달에게 명하여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누문(樓門)를 세우게 하고 밤마다 그 문 위에서 자도록 하였다. 그래서 그 문을 길달문이라고 한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해서 도망가자, 비형이 귀신들을 시켜 그를 잡아 죽였다. 그래서 귀신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서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글을 지었다.
성스러운 제왕의 혼령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의 집이 이곳이라네.
날고 뛰는 온갖 귀신들아
이곳에 머물지 말지어다.
나라 풍속에 이 글을 써 붙여서 귀신을 쫓아버리곤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화녀와 비형랑 [桃花女 鼻荊郞]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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