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歷史 Essay 141 ♣
☞ 신라의 여왕 ② 진덕여왕
647년 1월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죽자 이제 남은 성골(聖骨)은 덕만(德曼)의 사촌동생 승만(勝曼) 뿐이었다.
비담(毗曇) 세력을 처형하면서 28대로 등극한 진덕여왕(眞德女王647-654)은
26대 진평왕(眞平王)의 친동생인 국반(國飯)의 딸로,
즉위시의 나이도 결혼 여부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계가 없던 것은 확실해서 다음 왕부터는 진골(眞骨)인 김춘추(金春秋)로 왕위가 넘어간다.
당태종(唐太宗)에게 비단에 칭송시(稱頌詩)를 써 바쳤다는 태평송(太平頌)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당과 친교, 백제 고구려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업적은 있지만,
기간도 짧았고 의지도 별로 없었던지,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치적 개혁조치에 아무 이의를 달지 않고
추인만 하다가 재위 8년 만에 죽었다.
♧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신라의 28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647년~654년(8년간)이다.
진덕여왕은 마지막 성골 출신의 신라왕으로,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아우(同母弟)인 국반갈문왕의 딸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 박씨이다.
진덕여왕이 재위 4년(650)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백제를 대파한 사실을 고하고 왕이 비단을 짜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김춘추의 아들 법민을 보내어
당 고종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고종은 이를 좋아하여 법민을
대부경(大府卿)에 제수하였다고도 하고 삼국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도 당 고종이 진덕여왕을
계림국왕이라 개봉(改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덕여왕이 당 고종에게 올린 송시(頌詩)인 오언태평송은
당나라를 칭송하는 구절로 가득하며,
당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해 가려는 신라의 정책 방향이 시 속에 숨겨져 있는
신라의 야심적인 외교시(詩)라고 할 수 있다.
왕 4년 법흥왕 이래 신라가 독자적으로 사용해 왔던
기년(紀年)을 버리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삼국 통일의 대야심을 성취하기 위한 전초로서
적극적인 사대외교 정책을 폈던 임금이다.
왕이 죽었을 때 당나라 고종은 그 소식을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대상승(大常丞) 장문(張文)으로 하여금
지절(持節)을 거두고 조문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개부(開府)란 이름을 주어 그 의범(儀範)을 삼사(三司)와 같이 하였고
녹단(綠段) 3백을 주었다.
혁거세(赫居世)에서 진덕여왕까지가
성골(聖骨)이다.
[원문]
王織錦作五言太平頌(왕직금작오언태평송) -眞德女王(진덕여왕)
織錦頌(직금송)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대당개홍업 외외황유창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지과융의정 수문계백왕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통천숭우시 리물체함장
深仁諧日用 撫運邁時康
심인해일용 무운매시강
幡旗何赫赫 鉦鼓何??
번기하혁혁 정고하굉굉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외이위명자 전복피천앙
淳風凝幽顯 遐邇競呈祥
순풍응유현 하이경정상
四時和?燭 七曜巡萬方
사시화숙촉 칠요순만방
維嶽降宰輔 維帝任忠良
유악강재보 유제임충량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오삼성일덕 소아당가황
[해석]
대당이 큰 업을 열었으니
높고 높게 황운이 창성하도다.
융의(戎衣)로 천하를 통일하니 전쟁이 그쳤고
문(文)을 닦아 백왕을 이었도다.
천(天)을 통하니 높이 우시(雨施)를 숭상하고
만물을 다스리니 함장을 본받도다.
깊은 인은 일용에 화합하고
세상을 어루만지는 것은 시ㆍ강으로 하도다.
깃발은 어찌 그리도 빛나며
징과 북은 어찌 그리도 쾅쾅하는고.
명을 어긴 외이(外夷)는
천앙을 받았도다.
순풍이 유현한 곳
멀고 가까운 데서 상서로움을 다투어 아뢰도다.
사시로 옥촉(임금의 덕)이 조화되고
칠요(일ㆍ월 5성)는 만방을 두루 돌도다.
악(嶽)이 재상을 낳았으니
황제께서 충량에게 맡겼도다.
삼황오제가 한 덕을 이루었으니
우리 당나라 황가 밝도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