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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 신화

淸潭 2015. 11. 22. 10:19

   김수로왕 신화

 

개벽한 이래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호칭 따위도 없었다. 그저 아도간(我刀千)·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千)·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의 9간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곧 추장으로서 이들이 당시 백성들을 통솔했던 것이다. 그 백성들은 모두 1백 호, 7만 5천 인이었으며 산야에 제각기 집단을 이루어 그저 우물을 파서 물 마시고 밭갈아 밥 먹을 정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18년-즉 신라 유리왕 즉위 19년(A.D.42) 3월 계욕일(鷄浴日)14)이다. 그곳 북쪽의 구지(龜旨)에서 뭔가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무리 2,3백 인이 그곳 구지봉에 모여들었다 사람의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를 내는 자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나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는 이렇게 물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9간들은 응답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
  소리는 또 물어 왔다.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
  그들은 응답했다.
  "구지봉입니다. "
  소리는 또 말했다.
 
 "황천(皇天)께서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임하여 나라를 새롭게 열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하라."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이 노래를 외치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너희들은 기뻐 날뛰게 될 것이다. "

  9간들은 그 말대로 모두 기쁘게 노래부르고 춤추었다. 노래하고 춤춘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우러러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자색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고 있었다. 줄 끝을 찾아보았더니 붉은 보에 싸인 금합이 매달려 있었다.

 그 금합을 열어 보았다. 해같이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 알들을 향해 수없이 절을 했다. 조금 있다 도로 보에 싸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갔다. 탑상(榻上)에다 놓아 두고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꼭 하루를 지나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금합을 열어 보았다. 여섯 개의 황금알은 사내아이들로 화해 있었다. 용모들이 매우 준수했다. 상에 앉히고 무리들은 절을 드려 치하했다. 그리고 공경을 다해 모셨다.

 사내아이들은 날마다 커갔다. 10여 일이 지나갔다. 신장이 9척으로 은나라의 성탕(成湯)과 같았고, 얼굴이 용 같아서 한나라의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여덟 가지 색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은 당의 요제(堯帝)와 같았다. 그리고 눈의 동자가 둘씩 있는 것은 우(虞)의 순제(舜帝)와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왕위에 즉위했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 했다. 혹은 수릉(首陵 : 붕어한 뒤의 시호임 )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고 불렀다. 곧 6가야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고 남쪽에 위치하여 우리 나라의 꼬리 부분이 된 곳이 가야의 영토다. 왕은 임시 왕궁(假宮)을 짓게 하여 들어가 거처했다. 질박·검소하게 하려고 풀로 이은 지붕에 처마는 자르지 않고, 흙으로 된 계단은 석 자를 넘지 않게 했다.

 즉위 2년(A.D.43) 봄 정월에 수로왕은 '서울을 정해야겠다'고 하며 궁의 남쪽 신답평 (新畓坪)으로 나갔다. 사방으로 산악들을 바라보고 나서 왕은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은 여뀌 잎사귀처럼 협소하구나. 그러나 지세는 빼어나서 가히 나한이 머무를 만한 땅임직도 한데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일곱을 이루었던 칠성(七聖)이 살았던 땅이 진실로 여기에 부합됨에랴. 토지를 개척하여 터전을 열어 놓고 보면 마침내 훌륭하게 되리라. "

  그리고는 둘레 1천5백 보의 나성(羅城:외성)과, 그리고 궁궐과 여러 관서의 청사와 무기고 및 창고를 건축할 터를 정한 뒤 환궁했다. 널리 국내의 장성, 인부와 장인들을 징용하여 그 달(12년 봄 정월을 가리킴) 20일에 금양(金陽)에서 성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이르러 역사를 마쳤다. 궁궐이며 관서의 청사 건축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그 공사를 진행시켰는데, 그 해 10월에 시작하여 그 이듬해, 즉 왕 즉위 3년(4.D.44) 2월에 이르러 낙성을 보았다.

 길일을 택하여 새로 지은 궁에 나아갔다. 그리고 만반의 정사를 장리(掌理)하며 온갖 정무에 근면했다. 완하국(琓夏國)이란 나라의 함달왕(含達王)의 왕비가 임신하여 낳은 알에서 깨어 나온 탈해라는 자가 문득 바닷가를 따라 가락국으로 왔다. 그의 신장은 석 자, 머리통의 둘레는 한 자였다. 탈해는 거침없이 수로왕의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왔소이다. "

   수로왕은 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여 나라 안을 태평케 하고 하민들을 안락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서 왕위를 줄 수 없으며, 또 감히 우리 나라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너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다. "

  탈해는 제의했다.

  "그렇다면 서로의 재간으로써 승부를 결정하자.  왕은 좋다고 응낙했다.

   삽시간에 탈해는 한 마리의 매가 되었다 그러자 수로왕은 독수리가 되었다. 탈해는 또 참새가 되었다. 왕은 그러자 새매가 되었다. 그 동안이 잠깐도 걸리지 않았다.

  탈해는 본신으로 되돌아왔다. 수로왕 역시 본신으로 돌아왔다. 탈해는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제가 술법을 다루는 마당에 독수리에 대해 매가, 새매에 대해 참새가 되었음에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인의 그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의 소치로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제가 왕을 상대로 하여 왕위를 다투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

  그리고는 곧 인사를 드리고 나갔다. 탈해는 그 부근 교외의 나루로 나가 중국의 선박들이 항해해 오던 해로를 취하여 가려고 했다. 왕은 탈해가 체류하고 있다가 난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우려하여 급히 수군 5백 척을 내어 탈해를 쫓았다. 탈해는 달아나 신라의 땅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수군은 모두 되돌아왔다.

 (여기 이 기록에 실린 것은 신라의 것과 많이 다르다)

 후한 광무제 24년 -즉 수로왕 즉위 7년(4.D.48) 7월 27일이다.  9간들이 배알 차 와서 왕에게 진언했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들에게 있는 처녀 가운데서 가장 예쁜 자를 뽑아 들여 배필로 삼도록 하십시오. "

  왕은 답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천명이오. 나를 짝하여 왕후가 있게 됨도 또한 하늘의 명일 것이오. 그대들은 염려 마오. "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경편(輕便)한 배와 그리고 준마를 끌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다시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에 나아가 있게 했다.

 문득 가락국 앞 서남쪽 해상에서 붉은 빛깔의 돛을 걸고 붉은 빛깔의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가 있었다. 성산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간 등은 먼저 횃불을 올렸다.

  배는 마구 내달아와 앞을 다투어 상륙하려 했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은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듣고서 흔흔히 기뻐했다. 그리고 9간들을 보내어 좋은 배를 내어 영접해오게 했다. 9간들이 즉시 대궐로 모셔 들이려 하자 왕후는 입을 열었다.  "나와 그대들은 평소 알아온 터수가 아닌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겠소?"

  유천간 등은 돌아가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왕후의 말을 옳게 여겨 해당 관원들을 데리고 대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으로 가서 만전( 殿 : 장막으로 친 임금의 임시 거처)을 치고 기다렸다.  왕후는 바깥쪽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매어 두고 육지에 올라 우뚝 솟은 산 언덕에서 쉬고 있었다. 거기서 왕후는 입고 있던 비단 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로 드렸다. 그리고 왕후를 시종해 온 신하 두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라 했고, 그들의 아내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 있었다. 노예들까지 아울러 모두 20여 명이 되었다. 왕후가 가져온 화려한 비단이며 의상이며 금은 주옥이며 패물, 노리개들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는 점차 행재소(行在所 : 왕이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로 접근해 왔다. 왕은 나가 맞았다. 그리고 함께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왕후를시종해 온 신보, 조광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 아래에 나아가 뵙고는 곧 물러나왔다. 왕은 해당 관원에게 명령을 내려 왕후를 시종해 온 두 신하들 부처를 인도하여 각각 다른 방에 들게 하고 그 이하 노예들은 한방에 각각 5, 6명씩 들게 하고는 맛좋은 음료를 주고 좋은 침구로 재우게 했다. 그리고 가져온 의복이며 천들이며 보화들은 많은 군졸들을 둘러 세워 지키게 했다.

 비로소 왕과 왕후는 함께 침소에 들었다. 왕후는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阿踰타: 인도의 한 나라)나라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올해 5월 중의 어느 날 저의 부왕과 왕후는 저를 보고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꿈에 함께 옥황상제를 뵈었단다.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어 왕위에 나아가게 한 사람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신성스러운 분이다. 이제 새로 나라에 임하여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는 도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사뭇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바로 부모를 하직하고 그곳으로 가거라.'라고 말씀 하셨어요. 이리하여 저는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蒸棗)를 찾아 하늘을 옮아 아득히 반도(蟠桃)를 좇아 이렇게 외람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나이다. "

 왕은 응대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일 청을 했으나 함부로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이 몸은 행복하오."  왕과 왕후는 드디어 어울려 들었다.

 이틀 밤 하루 낮이 지났다. 이제는 왕후가 타고 왔던 배를 본국인 아유타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배에 딸린 사람은 모두 15명, 각각 쌀 열 석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본궁으로 수레를 돌렸다. 왕은 왕후와 함께 타고, 왕후를 시종해 온 신하들도 수레를 나란히 하고, 그리고 가져온 그 이국의 패물들도 모두 싣고서 서서히 대궐로 들어왔다. 그 때 시간은 막 정오가 되려 했다.

 왕후는 중궁(中宮)을 거처로 정했다. 시종해 온 신하들 부처와 남녀 사속들에게는 널찍한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종자들은 20여 칸짜리 빈관(賓?) 한 채에다 사람 수를 배정, 구별지어 들이고는 날마다 풍부한 음식을 주었다. 싣고 온 진기한 물건들은 안 창고에다 간수해 두고 왕후의 네 철 계절에 따라 필요한 양을 충당하도록 했다.

 어느 날,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9간들은 다 백관의 장들이나 그 직위며 명칭이 무지 촌스러워 결코 벼슬자리에 있는 귀인의 칭호라곤 할 수 없다. 혹 어쩌다 문명된 외국인이 전해 들으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되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

  드디어 아도를 아궁(我躬)으로, 여도는 여해(汝諧)로, 피도는 피장(彼藏)으로, 오도는 오상(五常)으로 고치고, 유수와 유천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냥 두고 아랫 사만 고쳐 각·각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했다. 신천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은 오능(五能)으로 고치고, 신귀는 음은 본래대로 두고 그 훈만 고쳐서 신귀(臣貴)라고 했다. 그리고 신라의 직제를 취해다 각간(角干)·앗간(阿叱干)·급간(級于)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나라의 규례와 한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배정했다. 이것이 곧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며 관서를 설치하고 직책을 배정하는 방도일 것이다.

 이리하여 나라와 집안은 질서가 갖춰지게 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므로 그 가르침은 엄숙히 작위를 짓지 않아도 저절로 위엄이 서고 그 정사는 엄격을 내세우지 않아도 잘 다스려져 갔다. 더욱이 왕이 왕후와 함께 있음을 비유하면 마치 하늘에게 땅이, 해에게 달이, 양(陽)에게 음(陰)이 있음과 같음에랴. 그리하여 그 공은 도산(塗山)의 딸들이 하우(夏禹)를 도운 것과 같았고, 당요(唐堯)의 딸들이 우순(虞舜)을 일으킴과 같았다. 몇 년을 잇따라 곰을 얻은 몽조(夢兆)가 있더니 왕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후한 영제 22년(A.D.189) 3월 1일에 왕후는 붕어했다. 향년이 157세, 나라사람들의 비탄은 대단했다. 구지봉 동북쪽에 있는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왕후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하던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왕후가 처음 가락국으로 와서 상륙했던 그 나루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부르기로 하고, 왕후가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에게 예물로 바쳤던 그 산언덕은 능현(綾峴), 붉은 빛깔의 깃발이 들어오던 그 바닷가는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르기로 했다.

 왕후를 따라온 신하 천부경(泉府卿)인 신보와 종정감(宗正監)인 조광은 가락국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딸 둘씩을 낳았다. 1, 2년을 더 지나 그들 부부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노예들은 온 지 7, 8 년이 지나도록 자녀들을 낳지 못하였고, 오직 고향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 지네다 모두 죽어 갔다. 그들이 살던 집은 텅 빈 채 아무도 없었다.

 수로왕은 왕후가 간 뒤로 매 양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비탄을 금하지 못하더니 왕후 간 지 10년이 지난, 후한 헌제(獻帝) 10년(A,D.199) 3월 23일 붕어했다. 향년은 158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부모를 여읜 듯, 왕후가 붕어했을 때보다 더욱 비통해 했다. 대궐의 동북방 평지에 높이가 한 길, 둘레가 3백 보 되는 빈궁을 축조하여 장사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 하였다. (하략)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가락국기(駕洛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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