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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話] 원효대사

淸潭 2015. 10. 27. 10:02

  원효대사

 

원효는 탄생하자 총명하고 뛰어나, 학문을 스승 없이 하게 되었다. 그가  승려가 되어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시말과 불교를 널리 폈던 큰 업적은 당전(唐傳=唐僧傳)과 그의 행장(行狀)에 상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 적지 않는다. 다만 향전(鄕傳)에 실린 한 두 가지의 이상한 사실이 있으니 적어 둔다.- 원효의 행적에 대한 평가와 기록

 원효는 일찍이 상례(常例)에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만들련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 뜻을 알지 못했다. 이 때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께서 아마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원효의 노래

 이 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 들이게 했다. 궁리가 칙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려 하는데, 벌써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오므로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 속에 떨어져서 옷을 적시었다.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몸을 말리게 하니, 그곳에서 머물러 있게 하였다.

 공주는 과연 아기를 배더니 설총을 낳았는데, 설총은 나면서 총명하여 경서 와 역사책에 널리 통달했다. 그는 신라 십현 중의 한 분이다. 우리말로써 중국과 외이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 통달하고 이회하여 육경 문학을 훈해했으므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명경을 업으로 하는 이는 그 훈해를 이어받아 가며, 끊어지지 않는다.-원효와 요석공주의 인연과 설총의 탄생

 원효는 이미 계를 법하고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을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했다. 원효는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문구에서 따서 이름지어 무애라 하여 이내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다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우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는 컸던 것이다. - 만년의 행적

 일찍이 분황사에 살면서 화엄경을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에 이르러 그만 그쳤었다.   <중략> 또한 바닷 지 권유에 따라 노상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의 소를 지었다. 그 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두었으므로 이를 각승 이라 했는데, 이는 또한 본각과 시각 2각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가  과서 종이를 붙였으니 또한 기미가 상통해 창하고 화답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은 그 유해를 부수어 진용을 소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 사모하여 극도의 슬픈 뜻을 표시했다. 설총이 그 때 밑에서 예배하니 소상이 문득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으므로, 지금도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 원효의 저술과 입적 후의 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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