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술자리를 피하고 쓰러진 신숙주를 손수 자신의 寢殿에 눞혔다.
그리고는 자신이 덮는 사향이불을 덮어주고 자신은 중궁전으로 가버린 것이다.
하니,신하가 왕의 침실에 누워 하룻밤을 꼬박 잔것이다.게다가 더욱 가관인것은 신 숙주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있는 게 아닌가?
너무나 취해버려 밤 사이에 그만 실례[?]를 하고 만것이다.그러나 사실은 세조가 만취한 신 숙주를 눞이고 일부러 물을 쏟아놓은 것이었으니 세조는 과연 짖궂은데가 있었다.
아침에 깨어난 신숙주가 대경실색한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신 숙주는 그만 죽어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이런 불경스러운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할뿐이였다.
그때 세조가 웃으며 들어왔다."어제 밤새 안녕히 주무시었소?"
"어허 속이 편치 않으실텐데 해장술을 하셔야지."하면서 속풀이 술을 다시 마시게 되었다.
세조는 그 자리에서 일전에 본 신 숙주의 신후지지를 말했다.쉽게 말해 양도해 달라는 것이였다. 조선 천지 어느땅이 든지 수백만 평이라도 사패지지를 내리겠으니 그 터를 자신에게 줄수없느냐고 넌즈시 부탁했다 .자신의 침전에서 손수 신하를 재워주고 아침에 찾아와 부탁하는 데에야 어느 신하가 거부할수가 있겠는가?
신 숙주는 그제서야 어젯밤 주연의 속뜻을 깨닫고 쓴 웃음을 지었다.그러나 별도리가 없잖은가? 흔쾌히 받아드렸다.
그리하여 지금의 光陵이 생기게 된것이다. 세조는 권람의 묘터는 다시 돌려주고,신숙주의 은공을 보답한다는 뜻에서 그에게는 叔舟庵을 지어 주었다.
지금의 奉先寺 위쪽에 터가 있다.그리고 자신의 願堂으로 사찰을 세우니 이것이 바로 봉선사다. 물론 세조 사후에 정희 왕후 윤씨가 중창한 것이다.
그 전에는 운악사였고,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친히 썼다고 하고 ,그해 예종 원년에 현재 보물 제 397호로 지정된 범종[奉先寺 銅鐘]을 주조하였다고 한다.
광릉은 오백년 조선왕조의 왕릉중에서 최고의 명당자리이다.雲岳山 용맥이 뻗어내려 나란히 乳頭穴을 맺은 명혈처로서 대대로 영화를 누리는 福地이다.
조선 오백년 동안 선대 60년을 제외하고는 그 수많은 왕자. 왕손중에서 왕을 한것은 모두 세조의 자손뿐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살아서는 원각사를 세우고 죽어서는 광릉에 묻히니,세조의 풍수관 또한 특별한 바가 있었다고 하겠다.
**賜牌之地;임금이 개인 [백성]에게 특별히 하사한 땅.
*상기 두편은 세종대왕 그리고 두째아들 세조의 왕릉에 관해서 구전되어 오는 설화, 숨겨져 내려오는 비화를 채록으로 했는데,두 대왕은 유별나게 죽어서 돌아갈 신후지지에 욕심이 대단했다 라는것을 알수있다.
세종대왕의 여주 영릉 역시 광주이씨 시조 둔촌의 세째아들 묘터를 양도 받았는것 아닌가?, 이렇게 옛 선조들은 양택,음택 가릴것 없이 욕심이 많았다. 人傑은 地靈에서 난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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